무엇을 ‘어느 장소’에서 하는가는 우리의 영감에 엄청난 영향을 끼친다. 공간이라는 매개체는 사람들의 영감을 날카롭게 벼려, 평소에는 느낄 수 없었던 것들을 예민하게 잡아낼 기회를 선물한다. 특히나 ‘그곳’에 음악이 버무려진다면 어떨까. 자주 듣던 음악을 낯선 장소에서 들었을 때, 그 음악이 다르게 들리는 경험은 누구나 한 번쯤은 해보았을 것이다.

음악과 공간. 우리 삶 가까운 곳, ‘영(靈)’에 더욱 가까운 것들. 이 두 가지가 모여 또 하나의 새로운 예술을 만들어내는 프로젝트들을 소개한다.

  

1. 이탈리아와 ‘Autumn leaves’

한 버스킹 영상이 동영상 플랫폼에서 큰 인기를 끌었다. 콘트라베이스 연주자 최준혁이 이탈리아에서 거리 연주가들과 함께 즉흥으로 연주하는 영상이다. 영상의 오프닝, 최준혁 연주가는 이들에게 “Autumn leaves(를 하자)!”고 외치고, 바이올리니스트는 “템포는?”이라고 되묻는다. 그가 박자를 잡자 이들은 함께 연주를 시작한다. 시작되는 아름다운 선율에 이를 지켜보는 사람들의 얼굴에 미소가 드리운다.

콘트라베이스 최준혁 'Autumn Leaves' (이탈리아 여행 중)

이 영상의 즐거운 묘미는, 이것을 촬영한 촬영자가 공연 중간에 갑자기 시선을 돌려, 그들을 둘러싼 이탈리아의 아름다운 건축물과 풍경을 잡아내는 것이다. 이들이 연주하는 장소가 어디인지, 그 분위기는 어떠한지. 촬영자는 본능적으로 이 부분을 보여주고 싶어 했다. 그리고 이것은 탁월한 선택으로 이어졌다. 이 영상에 달린 많은 댓글을 통해 알 수 있듯이, 사람들은 음악과 더불어 공간에 주목했다.

지나가는 사람들, 갑자기 튀어나와 이들과 함께 사진을 찍는 이름 모를 아주머니, 동전을 넣는 사람들의 모습이 아름다운 건축물과 뒤섞여 그만의 풍경을 자아낸다. 이러한 모든 것들이 결합하여 우리에게 너무나 친숙한 ‘Autumn leaves’는 새로운 느낌으로 다가온다.

 

2. 레인보우99의 ‘여행 프로젝트’

버스킹과는 또 다른 느낌의 프로젝트를 소개한다. 공간이 영감 자체가 되어 음악을 완성하는, 레인보우99의 ‘여행 프로젝트’다. 레인보우99는 낯선 여행지에서 음악을 만드는 프로젝트를 진행했다. 그는 자신이 본 영감의 공간들을 음악으로 재현하고, 그 속에서 연주하며 음악과 공간을 동시에 완성했다.

레인보우99 ‘청주 옥화 1경’

‘청주 옥화 1경’이라는 음악을 들어보자. 연주는 청주 옥화 1경 ‘청석굴’에서 진행되었다. 굴의 입구에서 그는 이 공간에서 받은 영감을 음악으로 연주했다. 이 음악은 ‘청주 옥화 1경’이라는 공간이 없이는 완성되지 못한다. 움직임이 거의 없어 스틸 사진처럼 보이는 영상은, 묵묵한 그의 연주와 조금씩 느리게 변하는 빛의 모양이 어우러져 새로운 감각을 전달한다. 물론 이 공간과 음악 자체가 가지고 있는 아름다움은 덤이다.

Caption레인보우99 ‘Night Bus LIVE Feat. HYEJiPARK’

이 영상에 나오는 음악의 제목은 ‘Night bus’다. 그렇기에, 다소 직관적으로 그들은 어두운 밤거리 저편에서 이 곡을 연주한다. 하지만 이러한 직관적인 장소의 선택은 물론 특별한 선택이 되었다. 지나가는 차량, 불야성의 도시뿐만 아니라 차량 진입 금지 표시판, 더러워진 갓길 벽까지 그들을 둘러싼 배경은 누구도 손대지 않은 그대로 음악과 함께 ‘Night’를 구성한다.
흔히 볼 수 있는 익숙한 풍경이지만, 선율이 있기에 이는 특별한 영감으로 우리에게 다가오고, 이 이미지들은 미니멀한 음악에 공간감을 더해 그 자체로 풍성하게 보이는 효과를 부여한다.

레인보우99의 ‘여행 프로젝트’는 아주 다양한 공간에서 진행되었고, 유튜브를 통해 공간과 음악을 함께 들을 수 있다.

 

3. A Winged Victory For The Sullen과 유대인 회당

A Winged Victory For The Sullen(이하 WVFS)는 앰비언트와 일렉트로닉을 결합한 2인 밴드이다. 이들은 아름다운 음악을 아름다운 공간에서 연주하는 것으로 유명하다. 그리고 이번에 그들이 선택한 곳은 폴란드 크라쿠프의 아름다운 ‘유대인 회당’이다. 유대인의 영적 생활 영향력의 중심지였던 ‘크라쿠프’. 그곳에 있는 회당들은 말 그대로 신앙의 매개체 역할을 감당했다. 그것만으로도 WVFS가 왜 곡을 연주할 장소로 이곳을 골랐는지 이해할 수 있다.

영상을 보면 그들이 공간 구성을 아주 세심하게 했음을 알 수 있다. 메인 조명은 회당에서 흔히 사용하는 촛불로 대체하고 있고, 악보를 비추는 조명 또한 이 색깔에 맞춘 주황빛 조명을 사용했다. 뒤에 빔프로젝터를 사용하여 쏜 영상의 색 또한 마찬가지다. 섬세하게 준비된 공간은 음악의 선율이 더해질 때, 비로소 완성된다. 그들은 이곳에서 ‘Steep Hills Of Vicodin Tears’라는 곡을 연주했고, 이 곡과 공간은 완벽한 싱크로율로 전율을 전한다.

이것을 라이브로 보고 들었으면 어땠을까. 신의 발밑에 엎드려 키스하며 “저는 당신께서 만드신 천국의 끝자락을 저 아래 폴란드 크라푸크에서 보았습니다”라고 말했을지도 모른다.

 

영감을 얻기 위해 많은 시간과 돈을 투자할 필요는 없다. 나에게 익숙지 않은 새로운 공간, 그곳에서 우리가 좋아하는 음악을 들어보자. 단순히 그것만으로도 우리는 일상에서 놓치고 있었던 영감의 충만함을 느낄 수 있을 것이다.

 

Writer

아쉽게도 디멘터나 삼각두, 팬텀이 없는 세상에 태어났지만 그 공백을 채울 이야기를 만들고 소개하며 살고 있습니다. 시나리오를 쓰고, 영화를 만들고, 으스스한 음악을 들으며, 여러 가지 마니악한 기획들을 작당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