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제까지 남성은 주로 공적 영역인 노동 시장에서 일하며 가정의 생계를 위해 돈을 벌었고, 여성은 이러한 남성과 자녀를 뒷바라지하며 사적 영역인 집 안에서 일을 하는 것이 일반적으로 여겨졌다. 현대사회의 여러 변화 속에서 이러한 역할 구분은 어느 정도 흐릿해졌지만, 집안일과 직장생활의 병행, 육아, 감정노동 등 여성의 ‘일’을 둘러싼 이슈는 여전히 종종 발화된다. 모든 일이 가정과 사회가 돌아가게 하는 중요한 요소로 작용함에도, 여성의 가사와 돌봄 노동은 종종 ‘생산적인’ 일을 해내는 남자들을 ‘돕는’ 부차적이고 큰 가치는 없는 일로 간주되어온 현실은 씁쓸하다.

<히든 워커스 Hidden Workers>전은 국내외 작가 11인/팀의 작품을 통해 가려진 여성의 노동에 집중한다. 여성 작가들 본인이 노동의 당사자로 등장하는 작품들은 1970년대의 가사노동과 육아뿐 아니라 2010년대 서비스 노동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직업들을 보여주며 노동현장 속에서 보이지 않게 작용하는 젠더 구조에 대해 사유할 기회를 던진다. 시대가 변하고 사회도 변했지만, 여전히 가사와 육아, 그리고 돌봄 노동 등이 대부분 보이지 않는 곳에서 여성들에 의해 지속되고 있는 현실을 보다 깊숙이 들여다볼 기회다.

 

참여 작가와 작품 미리 살펴보기


1. 미얼 래더맨 유켈리스

<Hartford Wash: Washing/Tracks/Maintenance: Outside>, July 23, 1973

미얼 래더맨 유켈리스(Mierle Laderman Ukeles)는 여성주의 미술사에서 독보적인 위치를 차지하는 행위 미술가다. 가사노동이 곧 예술 활동임을 선언하는 그의 작품들은 사적 영역에만 머물러 있던 여성의 ‘유지관리(maintenance)’ 노동을 공적 영역인 미술관에 끌어들여 가시화하고, 생산과 재생산의 이분법으로 나뉘는 남성과 여성의 노동에 대한 비판적 시각을 포함한다.

 

2. 마사 로슬러

<Domination and the Everyday>, 1978

마사 로슬러(Martha Rosler)는 비디오, 사진-텍스트, 설치, 퍼포먼스 작업 등 다양한 영역을 아우르는 작가다. 그는 32분 길이의 단편 영상물 <지배와 일상>을 통해 엄마로서의 일상이 지속되는 사적인 공간에 대중매체를 통해 흘러들어오는 공적 사건들을 무작위로 끌어들여 보여준다. 이는 엄마로서 어린 아들을 먹이고 재우는 일과 예술계에서 일어나는 일들에 귀 기울이는 일 중 무엇이 더 중요한지 서열을 매길 수 없는 작가 자신의 혼란을 동시에 비춘다.

 

3. 임윤경

<너에게 보내는 편지>, 2012-2014(좌), <지속되는 시간>, 2014(우)

임윤경은 작품을 통해 ‘육아’를 색다른 시선으로 바라본다. 그는 아이들을 대할 때 들어가는 고민과 노력, 여느 서비스 노동보다 강도 높게 작용하는 감정노동을 돌보미들의 언어를 통해 섬세하게 그려내며, 젠더화된 구조 속에서 여성들이 주로 담당하는 일들이 결코 가볍거나 쉬운 일들이 아님을 사려 깊은 시선으로 담아낸다.

 

4. 릴리아나 앙굴로

<Negro Utópico (Utopic Negro)>, 2001

릴리아나 앙굴로(Liliana Angulo)의 작품은 작가의 정체성과 연결되는 역사를 건드린다. 스스로 피사체가 된 작가는 흑인으로서의 모습을 과장하여 분장함으로써 백인 가정을 돌보았던 흑인의 뼈아픈 과거사를 들춘다. 이로써 작가는 여성의 노동은 젠더의 구조뿐 아니라 인종의 권력 구조에 의해서도 조작되고 숨겨져 온 실상을 적나라하게 드러낸다.

 

5. 마야 자크

<Mother Economy>, 2007

이스라엘 텔아비브를 중심으로 활동하는 마야 자크(Maya Zack)는 유대인으로서의 본인의 정체성을 작업으로 연결한다. 흔히 떠올리는 주부의 모습을 비껴가는 깡마른 여인이 집안 곳곳을 분주히 배회하는 모습들을 통해 제2차 세계대전 당시 혼란기를 견뎌낸 여성들의 숨은 노력을 조명한다.

 

6. 조혜정 & 김숙현

<감정의 시대: 서비스 노동의 관계미학>, 2014

조혜정과 김숙현이 제작한 <감정의 시대: 서비스 노동의 관계미학>은 다양한 직종의 서비스 노동자들의 인터뷰 내용을 배경으로, 각 직업에 해당하는 의상을 입은 무용수들이 직장 환경으로 꾸며진 공간 안에서 특정 동작을 유지하는 모습을 정제된 화면에 담아낸다. 이들은 늘 친절하고 순종적이어야 하는 서비스업계 종사자들이 감당하는, 보이지 않는 감정의 무게를 고난도의 퍼포먼스로 변환하여 가시화한다.

 

7. 김정은

<네일레이디>, 2013

김정은은 뉴욕에서 활동하던 시절 손톱관리사 즉, ‘네일레이디’로 일했던 경험을 작업으로 끌어온다. 가부장제의 질서 안에서 여성성과 결부된 순종, 꾸밈, 도움 등의 이미지 때문에 여성에게 특히 많이 돌아가는 네일케어 서비스업의 현실을 세밀히 비춘다. 전시 기간 중 토요일 오후 2시에서 6시 사이에 미술관을 방문해보자. 운 좋게 본인의 손이 작가가 찾는 손과 비슷하다면, 컬러 서비스까지 받고 작가 작품에 손모델로 등장할 수 있는 행운도 누릴 수 있다.

 

8. 심혜정

<아라비아인과 낙타>, 2013

미술작가이자 영화감독인 심혜정은 퍼포먼스를 비롯해 실험영화, 극영화, 다큐멘터리 등 다양한 장르의 작업을 하고 있다. 그는 자신의 어머니를 간호하는 재중동포 아주머니에 대한 이야기를 담은 30분 길이의 단편 <아라비아인과 낙타>를 통해 여성의 이주노동에 얽힌 깊고 예민한 문제를 들여다본다.

 

9. 폴린 부드리 & 레나트 로렌즈

<CHARMING FOR THE REVOLUTION>, 2009

1998년 이래 듀오로 활동하며 젠더 이슈에 관한 작업을 선보인 폴린 부드리(Pauline Boudry)와 레나트 로렌즈(Renate Lorenz)는 <차밍 포 더 레볼루션>을 통해 경제의 틀 안에서 여성의 노동이 차지하는 위치와 그에 얽힌 복잡한 관계를 비춘다. 이들은 가부장적 질서와 경제를 결합함으로써 젠더에 의해 이원화된 노동의 구조와 그 안의 불평등을 한꺼번에 비꼰다.

 

10. 마리사 곤살레스

<Female, Open Space Invaders>, 2010-12

마리사 곤살레스(Marisa Gonzalez)는 전 세계의 다양한 위기에 지속적으로 관심을 두고 작업하는 멀티미디어 아티스트다. 그는 다큐멘터리 <여성, 바깥 공간 점령자들>을 통해 필리핀 여성들의 노동 환경과 일상 생활, 그들이 받을 수 있는 임금이 홍콩에서 일하는 현지인들이 받는 최저임금보다도 낮은 암울한 실상들을 실감 나게 비춘다.

 

11. 게릴라 걸스

<Guerrilla Girls Images and Projects>, 1985-2017

1985년부터 지금까지 핑크 립스틱을 바른 고릴라 가면을 쓰고 익명으로 활동해 온 여성 예술가 집단 게릴라 걸스(Guerrilla Girls)는 예술계 내의 성 불평등을 때로는 위트있게, 때로는 신랄하게 고발하는 작업들을 펼쳐왔다. 여성 예술가들에게 얽힌 불평등한 상황들을 수치화된 기록으로 증명한 이들의 작업물을 이번 전시를 통해 폭넓게 확인해볼 수 있다.

 

+Tip. <히든 워커스 Hidden Workers>전은 영상 작품이 많은 관계로 관람하는 다소 시간이 걸리므로, 전시 마감 최소 1시간 전까지 입장하여 천천히 둘러보면 좋다.


장소
코리아나미술관 전관
일정 2018년4월5일(목)~2018년6월16일(토), 일요일 휴관
시간 오전10:00~19:00
요금 성인 4,000원, 학생 3,000원
문의 02-547-9177
홈페이지 http://www.spacec.co.kr/

(사진 및 자료제공= ⓒ코리아나미술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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