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곤 사토시의 유작이 된 <파프리카>의 한 장면

향년 47세로 요절한 비운의 천재 곤 사토시. 4개의 장편과 하나의 단편, 13부작의 TV 시리즈가 그가 남긴 애니메이션의 전부라는 사실은 정말 애석한 일이다. 췌장암으로 투병하던 그의 죽음에 미완으로 남은 <꿈꾸는 기계>는 끝내 제작이 중단됐다. 곤 사토시만큼 독특한 세계관을 가진 애니메이션 감독은 드물다. CG기술이 끝없이 도약 중인 지금이야 애니메이션이 구현하던 표현력의 파이를 실사영화와 일부 나눠 가졌다고 하겠지만, 여전히 2D 애니메이션만이 성취할 수 있는 독자적 영역은 존재한다.

 

 

불안한 심리를 조각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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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퍼펙트 블루>의 주인공 ‘미마’

곤 사토시는 2D 애니메이션에서 체감할 수 있는 상상의 한계를 무한히 확장한다. 그의 작품들에선 현실과 비현실이 뒤섞이고, 시공간은 왜곡되며, 분열된 자아가 실재와 마주치기 일쑤다. 이때 현실의 영역에 느닷없이 끼어드는 비현실은 환각이기도(<퍼펙트 블루>), 기억이기도(<천년여우>), 꿈이기도 하다(<파프리카>). 인간의 가장 입체적일 면면을 좇아가는 곤 사토시의 세계는 진짜와 가짜의 구별이 불가한 그야말로 아노미의 향연이다. 인간의 유약한 내면을 만화적 상상력으로, 때로는 영화적 연출로 그리는 그의 재능은 그만의 인장으로 작품 속에 드러난다. ‘불안’이라는 큰 줄기로부터 뻗어 나가는 분열과 환각의 테마는 작품 속에서 저마다 새롭게 시각화된다.

 

 

망상대리인 ‘곤 사토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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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왼쪽부터) <천년여우>, <크리스마스에 기적을 만날 확률>

곤 사토시는 극장용 애니메이션 <퍼펙트 블루>(1998)로 데뷔한 이래, <천년여우>(2001), <크리스마스에 기적을 만날 확률>(2003), <파프리카>(2006)까지 발표하는 작품마다 세계 유수의 영화제에 초청되며 차세대 거장을 예고했다. 그러나 ‘천재’라는 꼬리표가 늘 그렇듯 이런 거창한 수사들을 먼저 접한 사람들이 유별난 기대를 품고 곤 사토시의 작품에 다가선다면, 그 기대에 완벽히 부응하지 못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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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V 시리즈 <망상대리인> 꿈의 노인 장면
데이빗 린치의 <트윈픽스>를 떠올리게 한다

필자의 개인적인 감상에도 그의 작품들은 2퍼센트 아쉽다. 나도 모르게 입이 떡 벌어지는 시퀀스들을 마주하며 그 순간의 전율에 감격하지만 너무 많은(아까운) 상상력을 90분 남짓한 짧은 시간에 쏟아부어 전체적으로 스토리가 성글어진 느낌을 지울 수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곤 사토시의 아니메는 분명 보물 같은 영화들이다. 그의 유일한 TV 시리즈 <망상대리인>의 제목처럼, 곤 사토시는 스스로 관객들의 망상대리인을 자처하는 양 화면 속에 망상들을 펼쳐 놓았다.

 

 

작품은 여전히 살아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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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왼쪽부터) 대런 아로노프스키 <블랙스완>, 곤 사토시 <퍼펙트 블루>

실제로 많은 유명 감독들이 그가 남긴 자취의 영향 아래 있다. 대런 아로노프스키 감독은 <블랙스완>(2010)을 통해 <퍼펙트 블루>를 적나라하게 오마주했고, 그의 다른 작품 <레퀴엠>(2000)에도 곤 사토시의 흔적이 더러 보인다. 뿐만 아니라 크리스토퍼 놀란의 <인셉션>(2010)과 <파프리카>의 기초 설정 및 장면들의 유사성은 영화팬들 사이에 꾸준히 회자되는 떡밥이다. 한국 애니메이션의 독자적 세계를 구축해온 연상호 감독 역시 곤 사토시의 열렬한 팬임을 밝히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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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프리카> 현실과 꿈이 뒤틀리는 장면

아직 그의 세계에 발 담그지 않은 행운을 가진 독자들에게 두 편의 영화만 간략히 소개한다. 이 두 편의 영화가 입에 맞는다면 그의 유일한 단편 <오하요>와 TV 시리즈 <망상대리인>까지 섭렵해 볼 것을 권한다.

 

<퍼펙트 블루>(199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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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퍼펙트 블루> 스틸컷

곤 사토시의 장편 애니메이션 데뷔작. 3인조 아이돌 그룹 참(CHAM)의 멤버 ‘미마’는 회사의 노선 변경에 따라 배우로 전향하게 된다. 배우로서의 인지도를 높이기 위해 미마는 드라마의 강간 장면, 누드 화보 촬영 등을 감행한다. 거기다 미처 몰랐던 스토커의 존재를 인지하기 시작하면서 미마는 정신적 착란을 겪는다. 자기 혐오, 기억 상실, 정신 분열까지. 갈수록 심각해지는 미마의 심리는 어제와 오늘을 구분할 수 없는 지경에 이른다.

<퍼펙트 블루> 트레일러

 

<파프리카>(20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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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프리카> 스틸컷

정신과 치료사 ‘치바’에게는 또 하나의 자아가 있다. 18세의 꿈 탐정인 ‘파프리카’. 파프리카는 사람들의 꿈 속에 들어가 그들의 무의식에 가 닿으며 환자가 안고 있는 불안의 원인을 탐색한다. 어느 날, 치바의 연구소에서 꿈나라로 들어갈 수 있는 열쇠인 DC-MINI(디씨미니)라는 장치가 도난당한다. 제어장치를 채 달지 못한 DC-MINI의 실종으로 꿈의 테러에 대한 위협은 커져가고, 여기엔 거대하고 무서운 음모가 도사리고 있음을 알게 된다.

<파프리카> 오프닝 신

 

 

Writer

예측 불가능하고 아이러니한 세상을 닮은 영화를 사랑한다. 우연이 이끄는 대로 지금에 도착한 필자가 납득하는 유일한 진리는 '영영 모를 삶'이라는 것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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