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린 시절

아버지의 임지를 따라 여행 중이던 어머니의 배 속에 있던 누레예프는 시베리아 횡단 열차 안에서 태어난다. 그의 집안은 평범한 농부 집안이었으나, 러시아 혁명 때 기회를 놓치지 않은 아버지가 붉은 군대의 장교가 된 덕분에 좀 더 나은 생활을 영위하게 된다. 하지만 아버지가 군대에서 돌아온 후 우파(Ufa)라는 곳으로 가게 된 가족은 추위와 배고픔으로 많은 고통을 겪었다. 그러나 그곳에는 뜻밖에도 꽤 괜찮은 수준의 오페라 하우스가 있었다. 공연을 좋아했던 어머니는 공연 표가 1장밖에 없어도 아이들을 몰래 공연장 안으로 데리고 들어가 공연을 보게 하였다. 이곳에서 누레예프는 발레리노가 될 결심을 한다.

누레예프의 성장 모습 via ‘Nureyev Foundation’ 

 

학교생활

학교와 외부 선생님들께 포크댄스와 무용을 배운 누레예프는 뛰어난 재능을 보여 레닌그라드로 가서 더 공부할 것을 추천받는다. 그러나 발레가 남자답지 않다고 여긴 아버지의 반대가 심했다. 우여곡절 끝에 다른 아이들보다 뒤늦게 볼쇼이 발레학교에 입학한 그는 알렉산더 푸쉬킨 (Alexander Pushikin)이라는 훌륭한 스승을 만나 졸업 즈음에는 마린스키발레단과 볼쇼이 발레단에서 솔로이스트 계약을 제안받는다. 마린스키와 결국 계약을 맺은 그는 여러 발레 무대를 통해 팬클럽까지 생기는 등 높은 인기를 구가한다. 하지만 발레단에 있는 동안 그의 까다로운 성격으로 종종 사람들과 마찰이 일기도 했다.

 

서방으로의 탈출

발레 <지젤> 공연 중인 누레예프 via ‘Nureyev Foundation’ 

소비에트 정권은 정치적 이념에 따라 발레의 형식과 특징들을 모두 바꾸어 놓는다. 당시 소비에트 발레는 공격적이고 야만스러운 소비에트연방의 이미지를 아름다운 귀족문화를 지닌 나라로 바꾸어 놓는 데 일등공신 역할을 하였다. 특히 해외 공연을 통해 보여준 러시아 클래식 발레의 화려한 무대장치와 의상들은 큰 파문을 일으킨다. 이로 인해 큰 수입을 벌어들인 연방은 무용수들을 엄격하게 감시하였는데, 그들은 정부에서 정한 스케줄대로 활동할 수밖에 없었다. 누레예프는 이러한 정부의 태도에 환멸을 느끼고 불만을 토로하곤 했다.

그러던 중 1961년 파리공연을 가게 된 누레예프는 파리에서 센세이션을 일으킨다. 언론과 대중들은 그의 춤을 보고 ‘러시아 발레의 유리 가가린’이라는 별명을 붙인다. 이러한 성공적인 파리 공연을 뒷전으로 하고 런던공연을 위해 출국 준비 중이던 발레단에게 KGB는 누레예프만 모스크바로 돌아갈 것을 명령한다. 이미 정부의 블랙리스트에 이름이 올라있던 누레예프는 모스크바로 돌아가면 무슨 일이 있을지 예측할 수가 없었기에 생명의 위협을 느끼고 출국 전에 KGB의 눈을 피해 ‘망명’을 외치며 프랑스 경찰에게 몸을 던진다. 그는 소비에트 연방에서도, 또 서방세계에서도 능력을 인정받은 무용수였기에 그의 망명은 큰 이슈였고 소비에트 연방은 사회주의 사회의 파행이 알려질까 두려워 그를 귀국시키기 위해 온갖 회유와 협박을 하였으나 성공하지 못하였다. 심지어는 교통사고를 위장해 그를 살해하려는 시도까지 있었지만 실패로 돌아갔다.

 

마고트 폰테인과의 오랜 파트너쉽

마고트 폰테인과 누레예프
<로미오와 줄리엣>(1965) ⓒFREDERIKA DAVIS 

서방 세계에 정착한 그는 승승장구하며 전 세계를 누빈다. 누레예프는 영국의 전설적인 발레리나 마고트 폰테인과 20년 넘게 파트너로 호흡을 맞추면서 <지젤> <백조의 호수> <돈키호테> <공기의 요정> <잠자는 숲 속의 미녀> 등을 같이 공연하였다. 둘은 서로에게 자극이 되었고 서로를 고무시키며 훌륭한 파트너로서 역할을 다하였다. 그는 다른 무용수들과도 여러 공연을 하였으나 최고의 공연은 역시 마고트 폰테인과 함께했을 때였다. 둘은 평생 좋은 친구로 남았다.

 

에릭 브룬과의 관계

에릭 브룬(좌)과 함께

서방 세계로 탈출 후 누레예프는 자신이 평소 동경하던 로얄 코펜하겐의 수석 무용수 에릭 브룬을 만난다. 서로의 성격과 춤 스타일이 너무나 달랐으나 둘은 에릭 브룬이 죽기 전 1986년까지 25년간 함께한다. 대놓고 동성파트너와의 관계를 오픈한 탓으로 에릭 브룬은 누레예프를 만난 후 크게 성공하지 못하였다는 평을 듣기도 한다.

 

마지막

누레예프의 시기별 사진들 via ‘Nureyev Foundation’ 
말년의 누레예프

그는 당대 가장 위대한 무용수로 인정받았고 특히 현대무용을 시작하면서부터 자신이 출연한 대부분 무용의 안무를 직접 짜면서 무용의 발전에 혁혁한 공헌을 하였다. 니진스키와 마찬가지로 남성 무용수의 역할을 보조적인 것에서 주인공으로 바꿔놓는 데 결정적 역할을 한 무용수이기도 하다. 1983년 파리 오페라의 무용 감독으로 임명된 그는 1992년 그가 마지막으로 안무를 맡은 <라 바야데르> 공연까지 그 무대에서 활동했으며 이듬해 초 에이즈로 생을 마감하였다.

파리 남쪽에 있는 누레예프의 무덤 Photo ⓒkinettelamossa
영화배우 Ralph Fiennes가 감독한 누레예프 영화 <The White Crow> 촬영 현장 
<Dance to Freedom> traile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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