알브레히트 뒤러는 모든 독일인이 그의 그림과 자화상을 알고 있을 정도로 특출한 독일의 국민화가이다. 그는 자신의 매력에 흠뻑 빠져 수많은 자화상을 연대별로 남겨온 선구자로 평가되고, 영웅이자 스타로서 예술가의 르네상스 이상을 구현하였으며 신세계와 신기술에 몰두하였다. 또한 대륙 전체를 시장으로 만든, 구텐베르크에 의해 촉발된 인쇄물 유통망을 활용해 자신의 작품을 유럽 전역에 판매한 최초의 화가였다. 영국인이 셰익스피어를 통해 세계를 만났듯이 독일인은 뒤러라는 필터를 통해 르네상스 시기에 변화하는 유럽과 유럽이 전하는 새로운 세계를 만났다.

뒤러의 예술은 후원자나 황제 한 사람을 위한 것이 아니었다. 그는 판매를 목적으로 그림을 그렸다. 기민한 사업가였으며 상업적으로 크게 성공했다. 르네상스 시기 독일의 박람회와 강을 통한 무역 경로는 구텐베르크의 책처럼 뒤러의 그림을 효과적으로 전파했다. 뒤러는 유능한 아내 아그네스 프라이(Agnes Frey)와 함께 독일은 물론 해외까지 여행하며 판화를 판매했고 그림의 명성을 여기저기에 떨쳤다.

<계시록의 네 기사>(1498)
계시록의 네 기사는 <요한 계시록>에 기록된 네 명의 기사다
어린 양(그리스도)이 푸는 일곱 개의 봉인 중 처음 네 개의 봉인이 풀렸을 때 나타난다고 한다
네 기사는 각각 지상의 4분의 1씩을 지배했으며, 검과 기근, 동물로 인간을 죽일 수 있는 권위를 갖고 있었다

그리고 1498년 서양 미술사 최초로 주요 화가가 삽화를 그려 인쇄한 책 <요한계시록>이 출간되었다. 유명한 <요한계시록의 4인의 기수>를 비롯한 목판화 열다섯 점이 성서에 삽입되었다. 시기가 절묘했다. 많은 사람이 1500년을 세상의 종말로 생각하며 불안해하던 터라 책에 많은 관심이 쏟아졌다. 뒤러는 숙련공에게 많은 자본을 투자해서 목판을 제작하고 직접 책을 출간하였다. 지금이나 당시나 요한계시록은 흥행작이었다. 이 판화(아래 참조)로 뒤러는 남은 평생 쓸 돈을 벌어들였다.

 

 

뒤러의 판화들

<막시밀리안 1세의 개선문>(1515)

신성로마제국 황제 막시밀리안 1세의 의뢰를 받아 만든 개선문이다. 195개의 판을 모아 한 작품으로 만들었는데 당시까지 나온 판화 중 가장 큰 작품에 속한다. 막시밀리안 1세는 판화의 가능성을 인정하고 정치 선전에 활용한 최초의 통치자였다. 판화 속 개선문은 실존하는 건물은 아니었다.

<아담과 이브>(1504)

뒤러의 작품은 당대의 공방작업적 제작시스템을 반영하고 있다. 당대의 미술가들이 대부분 그랬겠지만 뒤러도 공방을 통한 일종의 집단창작시스템을 운영했다. 특히 뒤러의 작품은 판화가 많은 이유로 뒤러가 밑그림을 그리면 그의 제자들이 판화를 새기는 경우가 많았다. 물론 그가 직접 동판, 목판 작업을 하기도 하였다. 요즘의 만화제작공방과 시스템적으로 유사점이 있다. 미술이 순전히 개인적인 고뇌와 창작의 결과물이 된 것은 역사상으로 훨씬 이후의 일이다. 뒤러는 유화를 당연시하고 최고로 치는 그 당시의 분위기와 달리 판화에 몰두했을 뿐 아니라 판화의 인기를 전 유럽으로 확산시킨 장본인이다. 잘생긴 외모와 정교한 판화 솜씨로 뒤러는 지금의 아이돌 못지않은 인기를 누렸다고 전해진다.

<철갑코뿔소>(1515) 목판화

1515년 인도의 한 왕국에서 포르투갈에 선물로 코뿔소 한 마리를 보낸다. 이 신비로운 동물에 사람들은 열광하였으며 코뿔소에 대한 얘기가 널리 퍼진다. 위 그림은 실은 코뿔소를 직접 본 적이 없는 뒤러가 사람들의 이야기를 듣고 그린 그림이다. 하지만 이 그림은 이후 코뿔소에 대한 일종의 모델 그림이 되어 여러 곳에서 응용한 그림들이 등장한다. 200년 후 드레스덴의 마이센 도자기 공장이 과시용으로 도자기 코뿔소를 만들었다. 당시는 이미 진짜 코뿔소의 모습이 많이 알려진 때였지만 독일인이 좋아하는 것은 뒤러의 판화에 나오는 코뿔소 모습이므로 도자기 공장은 굳이 코뿔소를 실제 모습으로 만들지 않았다. 그의 판화 그림은 심지어 지난 세기까지 독일 일부 학교의 과학교과서에 실렸을 정도였다.

뒤러의 판화를 이용한 마이센 도자기 코뿔소, ‘Rhinoceros’; Meissen porcelain based on a sculpture by Johann Gottlieb Kirchner(1730) via ‘psychosputnik
뒤러 판화를 응용한 마이센 도자기(1750 collection of the Duke of Northumberland, Alnwick Castle)
뒤러 그림을 응용한 영국 도자기 via ‘UK Art pottery’ 
와인, ‘La Spinetta, Barbera d'Asti Ca Di Pian’ 라벨, 뒤러 그림을 응용했다
<기도하는 손>(1508)
<멜랑콜리아 I>(1514)
<골방 안의 성 제롬>(1514)
<기사, 죽음 그리고 악마>(1513)

위 작품은 대중적으로 인기가 많았다. 무장을 하고 숲길을 가는 기사와 말이 완전 측면으로 그려져 동물과 인체에 대한 비례에 대한 뒤러의 연구 결과를 잘 알아볼 수 있다. 기사 옆에는 모래시계를 든 시체의 모습인 ‘죽음’, 그의 뒤에는 여러 가지 동물을 조합한 괴물의 형태인 ‘악마’가 그를 유혹하려 한다. 그러나 ‘마귀의 계궤를 능히 대적하기 위해 하나님의 전신갑주를 입으라’(에베소서 6장)는 말대로 신앙으로 무장한 기독교 기사는 흔들림 없이 제 갈 길을 가는 모습이다.

 

 

자화상

<13세의 자화상>(1484)
<엉겅퀴를 든 화가의 초상>(1493), 22살 때 모습

위 그림에서는 뒤러가 손에 들고 있는 푸른 나뭇가지가 유독 눈에 들어온다. 이는 엉겅퀴에 속하는 식물로 독일에서는 ‘남자의 충절’을 의미한다. 미술사가들은 이 그림을 두고 뒤러가 약혼녀인 아그네스(Agnes Frei)에게 선물한 것으로 추측하기도 한다.

<장갑을 낀 자화상>(1498), 27살 때 모습

그림 속 뒤러를 보면 트레이드마크인 자신감 외에도 우아한 기품이 느껴진다. 그는 베네치아풍의 복장을 하고 당시 유행하던 흑백의 줄무늬 모자를 썼다. 머리 스타일과 수염의 세부 묘사는 화가가 여전히 북유럽 화풍을 계승하고 있음을 보여준다.

<모피코트를 입은 자화상>(1500), 29살 때 모습

화려한 모피 코트를 차려입은 화가는 정면을 응시한 채 오른손을 들어 손가락으로 심장을 가리키고 있다. 뒤러가 활동하던 당시에 정면을 응시한 자세는 오로지 그리스도나 왕에게만 허용되었다. 뿐만 아니라 왕족이나 귀족만이 입을 법한 모피 코트를 화가가 걸치고 있는 모습도 당시로써는 꽤 파격적이었다. 비록 서른이 채 안 된 젊은 화가였지만, 뒤러는 이 작품을 통해 ‘나는 예술가다!’라고 세상을 향해 당당히 외쳤던 것이다. 실제로 뒤러는 그림 안에 “나, 뉘른베르크 출신의 알브레히트 뒤러는 29세의 나이에 불변의 색채로 나 자신을 이렇게 그렸다.”라고 써놓았다. 뒤러는 이 자화상에 그림과 함께 글을 써놓아 자신의 모습이 영원히 남아 있으리라는 것을 암시했다.

 

 

뒤러의 유화들

<동방박사의 경배>(1504)
<토끼>(1502)
<히에로니무스 홀츠슈허>(1526)
<만 명의 기독교도들의 고문>(1508)

 

 

뒤러의 생가


뉘른베르크에 자리한 뒤러의 집(Albrecht Dürer's House), 뒤러가 1509년부터 사망할 때인 1528년까지 살았다.

 ‘뒤러 하우스’ 둘러보기

 

 

뒤러의 서명


독일 르네상스 회화의 완성자로 불리는 뒤러는 자신의 직업에 대해 대단한 긍지와 자부심이 있었고, 화가의 사회적 지위에도 남다른 관심이 있었다. 그는 이전 시대의 화가들과 달리 자신의 작품에 서명을 남겼다. 자신의 이름 첫 글자인 A와 D를 가지고 하나의 복합적인 문양을 만들어서 자의식 강한 화가로서의 모습을 보여주었다. 서명은 화가의 신분을 확인해주고 그의 이름을 널리 알리는 역할을 했다. 아울러 화가의 작품을 상업적으로 성공시키는 원동력이 됐다. 뒤러는 홍보의 중요성과 자신의 작품을 유통하는 가장 효과적인 방법이 무엇인지 제대로 간파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는 자신의 작품을 외국으로 판매하기 위해 특별히 전문 대리상을 고용하기도 했다. 후에 Logotype으로 발전되는 로고의 시초이기도 한 그의 서명은 훗날 독일 하면 떠오르는 유명한 여러 로고들로 연결된다.

지금은 유로화로 통일되었지만 독일이 마르크화를 쓸 당시에 독일 지폐는 뒤러의 그림 또는 스타일이 싹쓸이했다. 이는 뒤러가 독일사람에게 어떤 의미인지를 보여준다. 황제 카를 5세가 미켈란젤로에게 꼭 이루고 싶은 소원을 말해보라고 했을 때 그는 “제가 가장 부러운 사람은 알브레히트 뒤러입니다.”라고 말했을 정도로 뒤러는 부, 명예, 외모, 인기를 다 갖춘 인물이었다.

뒤러의 이름을 딴 도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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