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른 세계에 들어온 것 같아요.” 서점에 들어오는 손님 중 많은 분이 하는 말이다. 서점에 비치된 책과 오래된 가구도 이유가 되겠지만 유리창 밖의 모습으로는 상상할 수 없었던, 공간 안에서만 만날 수 있는 음악이 가장 큰 이유가 될 것이다. 밖에서 들여다본 서점의 모습이나, 안에서 보는 모습이나 보이는 것은 같은데도 귀로 전해지는 소리가 어떠냐에 따라 너무 많은 것이 달라진다는 (당연한) 얘기다. 이것은 영화에서도 마찬가지다. 같은 장면에도 음악이 어떤 역할을 하느냐에 따라 보는 이의 감동을 완전히 다르게 만들 수 있다. 그래서 대부분의 영화음악은 영화 속 명장면과 함께 회자된다. 하지만 때로는 영화 속 장면에 녹아들어 사람들에게 각인되는 것을 넘어, 오롯이 그 음악이 영화의 명성을 지켜주는 경우도 있다. 굳이 영화 속 명장면 없이도, 음반 자체로 행복감을 선사하는 몇 장의 음반을 소개한다.

 

<디센던트>(2011) OST

많은 사람들이 하와이를 동경한다. ‘가보고 싶은 여행지’ 순위 상위권에 항상 랭크되고 다녀온 사람들은 ‘천국’이라는 과한 수식을 진심으로 붙이는 곳. 하지만 잠시 머물러 그곳의 아름다움을 추억으로 간직하고 돌아오는 여행이 아니라 그곳에서 일상을 보낸다면, 언젠가 떠날 곳이 아니라 태어나고 발붙인 내 생활의 터전이라면 그 환상이 유지될 수 있을까? 누군가에게는 환상 속의 휴양지인 그 섬에서 생활인으로 살고 있는 한 남자와 그의 가족의 이야기를 그린 영화 <디센던트>는 우리가 미처 생각해보지 못한 하와이의 ‘일상’을 담고 있다. 주인공 ‘맷 킹’(조지 클루니)의 감정선을 따라 줄거리에 몰입하다 보면 굳이 하와이를 배경으로 하지 않아도 될 법한 생각이 들 정도로 하와이에 대한 우리의 환상과는 다른 방향으로 이야기가 흘러가지만, 그때마다 영화 속 음악들은 하와이 냄새를 진하게 풍기며 영화의 배경이 하와이임을 절감하게 한다.

모든 트랙을 하와이 음악으로만 채운 최초의 미국 영화음악인만큼 하와이의 실력파 뮤지션들이 대거 참여한 이 음반 속 크레딧은 무척 낯설게 느껴지지만, 음반을 들어보면 이름 모를 이 뮤지션들의 실력에 물음표를 그릴 일은 없게 된다. 필자 역시 평단과 청중이 모두 입을 모아 극찬했고 아마존 차트에 오랫동안 랭크되어 있었다는 사실을 이 앨범을 들고 나서 한참 후에 알았다. 그만큼 아무 정보 없이 음악을 접해도 충분히 매료될만하며 세대와 국가를 초월해 사랑받을, 소장가치가 충분한 음반이다.

독특한 하와이 창법으로 ‘노래하는 새’라는 별명을 가지고 있는 가수이자 작곡가, 우쿨렐레 연주자 레나 마차도(Lena Machado)의 ‘MOM’. 이 OST에는 그의 음악을 비롯해 하와이의 옛 음악과 현재의 음악이 고루 실려있다

 

<마음의 저편>(1982) OST

스산한 골목, 한 사내가 코트 깃을 올리며 길을 걷는다. 아주 긴, 홀로된 시간을 감내해 온 그는 누구에게도 자신의 괴로움을 털어놓지 않으며 필요 이상의 친절을 베푸는 누군가를 무시하는 일도 잘했다. 그렇게 홀로 걸어가는 그의 길 위에 한 여인이 걸어 들어와 나란히 걷는다. 둘은 서로를 의식하고는 있지만 특별히 말을 건네지는 않는다. 남자에게는 무거움이, 여자에게는 무심함이 배어 있다. 영화의 줄거리라고 생각하고 읽으셨다면 죄송하다. 이것은 이 음반을 들었을 때 필자가 느꼈던 감정이다.

버젓이 줄거리가 있는 영화에 삽입된 이 노래들을 들으며 내 마음대로 머릿속에 한 편의 영화를 찍어 놓은 것은 영화를 보기 전 이 음반을 접했기 때문이기도 했지만, 온라인, 오프라인 할 것 없이 곳곳을 돌아다녔음에도 영화를 볼 수 있는 루트가 없었기 때문이기도 하다. 수년째 음반을 들으며 어떤 영화일까 상상하던 중 약 1년 전, 마침내 유튜브에 업로드된 덕에 영화를 볼 수 있었다. 서로에게 질려버린 5년 차 연인이 각자의 환상을 좇아 다른 사람을 만나지만, 결국 서로에게 돌아온다는 아주 평이한 스토리는 영상 미학에 힘을 쏟는 데 정신이 팔린 감독 덕에 얄팍한 감정선으로 큰 공감을 주지는 못하지만 새로운 형태의 영상미를 실현하고자 한 흔적들은 나름 볼만하다. 그러나 음반으로 들었을 때 끊임없이 찬사를 내뱉게 했던 음악은 오히려 영상 속에서 빛이 바래 버린다.

<마음의 저편> 스틸컷

<대부>라는 명작으로 우리에게 익숙한 프랜시스 포드 코폴라 감독의 이 영화는 그가 1970년대의 장엄한 영광을 뒤로하고 내리막길을 걷고 있던 1982년 세상에 나왔다. 그는 로맨스 코미디와 뮤지컬을 섞은 이 작품에 막대한 자본을 들이며 재기를 위해 애썼지만 미국 개봉 당시 좋은 평을 얻지 못했고 흥행에도 참패했다. 그리고 그의 커리어는 예전의 명성과 점점 멀어졌다.

그렇게 조용히 잊혀진 영화와는 달리 영화의 OST는 여전히 훌륭한 음반으로 칭송받고 있다. 감독과의 친분으로 이 영화음악에 참여하게 된 톰 웨이츠는 그와 좀처럼 어울릴 것 같지 않은 컨트리팝 가수 크리스탈 게일을 파트너로 맞이해 신선한 조합을 보여주며 그의 음악 커리어에 ‘KS 인증마크’를 하나 더 보탰다. 누구든, 언제든 들어도 좋을 앨범이지만 스산한 바람이 불어올 때 들으면 특유의 분위기가 더 와닿을 것이다. 또한 연인들의 기념일 선물로도 좋을 듯싶다. 우리의 삶이 팍팍하고 딱히 멋없이 흘러가더라도 인생의 로맨틱한 순간에 이 음악이 깔린다면 누구든 영화 속 주인공이 된 기분을 느낄 수 있을 테니까.

톰 웨이츠의 ‘Broken bicycle’이 삽입된 영화의 한 장면, 환상적이고 탈현실적인 세트를 확인할 수 있다. 하지만 이 곡은 고독을 씹으면서 눈을 감고 온갖 잡념과 사랑의 기억들을 끄집어내며 들어보는 게 더 운치 있다. 철저히 톰 웨이츠와 나 둘이서만 음악을 만끽하는 기분으로.

 

<보디가드>(1992) OST

1992년 전 세계는 단 한 곡의 노래로 대동단결되었다. ‘앤다이아~’로 시작하는 이 곡의 열풍을 경험하지 못한 사람도 많을 만큼 세월이 흘렀지만, 이 곡이 남긴 기록으로 그 열풍을 얼마든지 짐작해 볼 수 있다.

- 빌보드 싱글차트 14주 동안 1위
- 빌보드 앨범 차트 5개월 동안 1위
- 1990년대 미국에서 발표한 앨범 중 가장 많이 팔린 앨범
- 팝 역사상 가장 많이 팔린 OST 앨범
- 빌보드 200, 톱 R&B 앨범, 핫 100 싱글, 핫 R&B 싱글 연말 결산차트에서 모두 1위한 유일한 앨범
- 한국에서 100만 장 이상 팔린 최초의 팝 앨범

당시 어느 거리, 어느 카페를 가도 이 음악이 흘렀고 온갖 드라마, 음악 프로그램은 물론이요 심지어 코미디 프로에서도 숱한 패러디물로 이 음악을 만날 수 있었다. 그만큼 엄청난 사랑을 받았으나 동시에 그것이 이 음악을 진저리나게 만들었다.

휘트니 휴스턴은 이 앨범을 내기 전에도 이미 ‘빅히트’ 가수였다. 하지만 그는 이 영화 아니, 이 앨범으로 ‘빅빅빅히트’ 가수가 된다. 빅히트 가수가 빅빅빅히트 가수가 되는 데에는 여러 가지 방법이 있겠지만 비록 연기를 잘 못 하더라도 영화를 한 편 찍고 기가 막힌 사운드 트랙을 한 곡 부르면 된다는 새로운 공식을 만들어낸다. (그리고 이 괴상한 공식은 아직 휘트니 휴스턴 외에는 깬 사람이 없다.) 전후 사정을 모르고 들었다면 그의 정규앨범처럼 받아들여질 수도 있을 이 앨범은 아시다시피 보디가드의 OST 앨범이다. 상처 많고 직업 정신이 투철한 잘생긴 남자 보디가드(케빈 코스트너)와 온실 속 꽃처럼 보호받는 예쁜 톱스타(휘트니 휴스턴)가 만들 수 있는 가장 뻔하고 개연성 없는 이야기로 영화는 혹평을 받았다. 게다가 이 훌륭한 음악들은 영화 속에서 아주 1차원적으로 활용된다. 휘트니 휴스턴의 새 앨범을 위한 두 시간짜리 뮤직비디오를 위해 영화를 찍은 게 아닌가 싶을 정도로 영화의 완성도는 실망스럽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전 세계적으로 흥행에 성공했으며 두 주인공의 인기도 고공행진을 이어갔다.

<보디가드> 스틸컷

십수 년이 지난 지금 앨범을 다시 꺼낸다. 열풍의 중심에서 한참 벗어난 시점에 차분히 첫 곡부터 듣다 보니 이제서야 제대로 음악이 들린다. 앨범 A면에 수록된 곡은 모두 휘트니 휴스턴의 곡으로 채워져 있다. 이미 우 리에게 익숙한 곡들임에도 불구하고 잡념 없이 빠져든다. 그 숱한 기록의 명백한 근거이자 자격은 다분히 그의 전성기 시절의 목소리에서 나왔던 것임을 다시 한번 확인한다. 휘트니 휴스턴에 가려져 있는지 없는지 숨도 못 쉬고 있었을 B면의 음악들도 다채롭다. 2017년 11월에는 <보디가드> 출시 25주년을 맞아 미공개 라이브 버전을 수록한 앨범도 출시됐다. 비록 그는 세상을 떠났지만 단순한 기록을 넘어 여전히 살아있는 감동으로 남겨진 그 목소리를 제대로 들어보자.

돌리파튼의 잔잔한 컨트리송이었던 이 곡은 휘트니 휴스턴을 만나 그야말로 환골탈태했다. 재미있는 사실은, 도입부에 무반주로 노래하는 부분은 케빈 코스트너의 제안으로 만들어진 것이라고 한다. 그리고 그의 제안은 이 곡을 더 극적으로 만드는데 크게 한 몫했다

 

<박하사탕>(2001) OST

다소 밋밋했던 영화 속 장면에 음악이 덧입혀지며 완벽해지는 경우도 있지만 반대로 영화 속 이야기가 너무 강렬해서 어떤 음악이 흘렀는지 기억나지 않는 경우도 있다. 한국 현대사의 가장 아픈 순간을 직시한 이창동 감독의 영화 <박하사탕>의 OST가 그런 경우다. 영화 속 어디에 음악이 흘렀나 기억을 쥐어짜 보아도 주인공이 야유회에서 ‘나 어떡해’를 부르던 장면, 시간을 거슬러 올라갈 때마다 나오던 달리는 기차신 정도일 것이다. 이것은 이창동 감독의 의도이기도 했다. 당시 영화에 음악을 과도하게 사용하지 않았으면 했던 감독의 주문에 따라 이재진은 장면의 저 멀리 떨어져 조용히 존재하는 음악들로 음반을 채웠다. 그러나 마음 편히 음악의 아름다움을 느낄 수 없었던 영화의 무거움을 지우고 이 음반을 들어보면 섬세하면서도 절제된 서정으로 차 있는 음반임을 느낄 수 있다.

<파이란>(2001), <우리들의 행복한 시간>(2006), <모던보이>(2008), <호우시절>(2009), <완득이>(2011), <아수라>(2016) 등 작품을 통해 이제는 꽤 많은 영화음악 팬들을 거느린 이재진이 장편영화의 음악감독으로서 처음 내놓은 음반이다. 1995년 유재하 가요제에서 은상을 받고 버클리 음대에 갈때까지만 해도 그는 영화음악보다는 싱어송라이터나 프로듀서 쪽에 음악 활동의 무게를 두고 있었다. 버클리 시절, 교수의 제안으로 시작한 영화음악은 이제 그의 삶이 되었다. 보사노바풍의 리듬과 피아노, 바이올린, 첼로, 오보에 등 고운 선율을 오가며 과하지 않은 멜로디를 연주하는 이 음반의 트랙들은 강렬하게 자신을 과시하지 않으면서도 은은하게 오래도록 귓가에 맴돈다. 청자의 기분에 따라 우울하게 들릴 수도 차분한 아름다움으로 들릴 수도 있다는 점 또한 매력적이다. 마침 봄이다. 꽃잎이 흩날리는 봄날의 거리를 거닐며 이 음반을 들어보길 권한다.

 

<질투의 드라마>(1970) OST

무작정 이 음반을 들어보기를 막무가내로 권한다. 답답한 사무실, 교실 혹은 집 어디든 현재의 것을 집어 던지고 아무 정보 없이 생경한 세계로 여행을 하듯이 말이다.

아무리 온라인으로 세계의 모든 음악을 들을 수 있는 세상이라 할지라도 우리는 많은 것을 놓치고 살아간다. 이탈리아 영화음악의 거장이지만 우리에겐 익숙지 않은 이름, 아르만도 트로바졸리(Armando Trovajoli) 역시 그런 존재 중 하나다. 50여 년 전 만들어진 이탈리아 영화를 볼 일은 흔치 않다. 특히나 한국에서의 개봉 여부조차 확인되지 않는 이 영화를 본 사람은 더욱 흔치 않을 것이다. 심지어 필자도 이 영화는 보지 못했다. 하지만 그런 건 아무래도 상관이 없다. 비록 영화는 볼 수 없지만 이 음반을 손에 쥘 수는 있기 때문이다.

<질투의 드라마>라는 한국어 제목으로 소개된 이 앨범은 이탈리아 명장 에토레 스콜라 감독의 작품으로 <Dramma Della Gelosia>라는 원제의 코미디물이다. 1970년 칸영화제에서 남우주연상을 탈만큼 꽤 성공을 거뒀다. 시대나 국적을 따질 필요 없이 서정적인 음율과 이국적 색채를 가득 담고 있는 이 음반은 국내에서는 극소수의 음악 팬들에게만 알려져 있다. 다양한 변주를 가한 메인 테마, 위트가 가미된 감동, 차분하게 겹쳐지는 하모니, 우아함을 잃지 않는 흥겨움 등 다채로움 속에서도 특유의 무드를 놓지 않고 이어간다. 그렇다. 이 음반의 키워드는 ‘무드’다. 낭만도 로맨스도 아닌 무드. 내 비루한 하루하루를 벗어날 수는 없지만 눈을 감고 이 음반을 듣고 있으면 마음이나마 어딘가로 훌쩍 무드를 찾아 떠날 수 있는 이런 음반이 있다는 것은 정말 다행이다.

유튜브에 찾아보면 영화 전체는 아니더라도 짧게 편집된 영상들을 찾아볼 수 있다. 음악만 들었을 때는 크게 느끼지 못했던 코미디물의 냄새가 물씬 난다

지금 같은 영상시대가 오기 전, 어른들은 늘 아이들에게 책을 읽으라고 했으며 그림 없이 글만 읽는 행위가 상상력을 풍부하게 한다는 말씀을 자주 하고는 하셨다. 때문에 만화책은 해로운 것으로 이야기됐다.

지금에야 근거 없는 이야기로 비쳐지지만 그런 독서하는 마음으로 이 앨범을 들어보는 일도 꽤 재미있을 것이다. 영화가 어떤 내용일지, 이 음악은 어떤 장면에 삽입됐을지를 상상하며 듣다 보면 원작보다 더 멋진 시나리오 한 편이 탄생할지도 모를 일이다. 뭐든지 찾으면 나오는 시대에 파도 파도 찾을 수 없는 어떤 것들이 여전히 존재한다는 것은 감사한 일이다. 다행히 이 글을 읽는 대부분의 독자는 1970년대 이탈리아를 잘 모르고 음반 중간중간 튀어나오는 이탈리아어를 알아들을 리 만무하니, 그 상상의 폭은 더 넓어질 수 있다.

 

 

Writer

오래된 정경들이 넘치는 동네에서 작은 음악 서점인 ‘초원서점’을 운영한다. 방송작가, 스크립터, 콘텐츠 기획 등을 거쳐 공연 카페에 오래 머물렀다. 2016년 5월 연 초원서점에서 음악과 닿아 있는 다양한 장르의 서적들을 판매하고 음악과 음악 서적 관련 행사들을 기획, 진행하며 ‘음악으로 말을 거는 사람’으로 살고 있다. 가사가 아름다운 한국 음악들을 특히 좋아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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