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콜 미 바이 유어 네임>과 <캐롤>은 서로 다른 영화임에도 불구하고, 로맨스 영화로서 필연적으로 품고 있을 각각의 사랑의 징후들을 꺼내보고 싶었다. 이 글은 분석보다는 두 영화의 기억을 되짚는 글에 가까우며, 관람 전보다는 관람 후에 유효한 글이 될 것 같다. 따라서, 스포일러는 최대한 배제하고자 했지만 프리뷰로는 친절하지 못할 수 있다. 두 영화를 모두 접한 관객들이 가볍게 읽어주시면 좋겠다.

<콜 미 바이 유어 네임> 포스터
<캐롤> 포스터

 

1. 만남

<콜 미 바이 유어 네임>


‘엘리오’(티모시 샬라메)와 ‘올리버’(아미 해머)의 첫 만남은 썩 달콤하지 못하다. 스물넷의 청년 올리버는 교수의 연구를 돕기 위해 별장을 방문하고 그의 아들인 열일곱의 엘리오를 만난다. 엘리오는 자유분방하고 당찬 모습의 올리버가 불편하고 못마땅했다. 매번 “Later! (나중에)”라는 인사로 휑하니 저 갈 길을 가던 올리버의 태도가 무례하다고 느끼던 엘리오. 그러나 그 불편함은 달리 말해 어떤 징후이기도 했다. 엘리오의 신경을 긁을 만큼 올리버가 그의 관심 범주에 있었다는 반증은 아닐까. 정말로 엘리오는 그즈음, ‘올리버 때문에’ 괜한 짜증과 복잡한 심경을 여러모로 내비쳤다.

 

<캐롤>


‘캐롤’(케이트 블란쳇)은 딸의 크리스마스 선물을 사러 들른 백화점에서 ‘테레즈’(루니 마라)를 만난다. 둘은 인형 매장에서 손님과 직원으로 마주하기 전까지 무의식적인(그러나 운명적이었을) 시선을 주고받았다. 눈에 띄는 외모와 매력적인 음색의 캐롤은 수줍은 성격에도 할 말은 다하는 직원 테레즈에게 ‘네 살 때 무슨 장난감을 갖고 싶었는지’를 물었고, 그렇게 장난감 기차를 구입한 그는 갈색 가죽장갑을 흘려둔 채 떠났다. 실수였는지 의도된 행동이었는지 알 순 없지만 극이 지속되면서 후자에 추측이 기운다. 뭐였건 상관은 없다. 그가 두고 간 장갑 덕분에 두 사람은 점심 식사를 함께하게 된다.

 

 

2. 긴장

<콜 미 바이 유어 네임>


이 영화에서 둘의 미묘한 감정의 줄타기를 탁월하게 묘사한 장면을 단번에 꼽을 수 있다. 바로 엘리오가 바흐의 곡을 연주하던 신(scene)이다. 나무에 걸터앉아 기타를 치던 엘리오에게 올리버는 방금 그 곡을 다시 듣고 싶다는 주문을 한다. 어느새 피아노가 있는 방으로 그를 부른 엘리오는 종전의 바흐 음악을 리스트 버전으로, 리스트 버전을 다시 부소니가 변형했을 법한 버전으로 바꿔 연주한다. 오롯이 ‘방금 그 곡’을 원했던 올리버의 요청을 익살스럽게 비트는 엘리오. 놀림을 당한 올리버는 방을 나간다. 엘리오는 이때를 놓치지 않고 그제야 그의 요청에 응답한다. 경쾌하게 아름다운 바흐의 피아노 선율은 올리버의 발걸음을 다시 돌려 방으로 불러들인다. 대단한 감정의 동요가 이는 장면이 결코 아닐 수 있지만 순식간에 우리를 간질간질한 로맨스의 늪으로 밀어 넣는 반칙 같은 장면이다.

 

<캐롤>

 
캐롤과 테레즈의 경우는 좀 더 조심스럽고 우아한 방식으로 흘러간다. 조심스러웠던 이유는 영화가 배경으로 하고 있는 당대의 사회가 동성애를 불법적인 것, 병적인 것으로 단죄하던 시기였기 때문일 것이다. 마치 이 갑갑한 현실을 체감시키려는 듯 카메라는 자주 창문 너머로부터 이들을 응시한다. 다시 점심 식사 이야기를 해보자. 캐롤은 장갑을 돌려준 테레즈에게 사례로 식사를 제안했고 점심 식사 중 테레즈는 캐롤에게 의미심장한 표현을 전달받는다.

“신기한 사람 같아요. 하늘에서 떨어진 것처럼.”

이때 두 사람 사이에 묘한 긴장이 조성된다. 테레즈는 같은 말을 나중에 다시 한 번 듣게 된다.

 

 

3. 응답

<콜 미 바이 유어 네임>


사야 할 것이 있는 올리버의 산책길에 엘리오가 동행한다. 둘은 거대한 2차 세계대전의 영웅 동상 주위를 돌며 이야기한다. “넌 도대체 모르는 게 뭐냐”고 물어온 올리버를 향해 엘리오는 저도 모르게 올리버에 대한 생각을 불쑥 꺼내놓는다. 그것도 엄청난 우회의 방식으로. 어떻게 보면 그 생각은 전혀 말해지지 않았음에도 정확히 올리버에게 도달한다. 어쩌면 우리는 이쯤에서 눈치챘어야 마땅했을 것이다. “그런 이야기는 해선 안 된다”며 단호한 대답을 돌려주는 올리버가 애써 거짓말을 하고 있다는 사실을.

 

<캐롤>

 
테레즈는 캐롤의 초대를 받고 그의 집을 방문했다. 취미로 사진을 찍던 테레즈는 그의 집으로 가는 길에 크리스마스트리를 사던 캐롤을 카메라에 담았다. 그의 집에서 캐롤은 그 기억을 상기한다. “트리를 살 때 나를 찍었냐”고 묻는 그에게 테레즈는 어딘가 수줍은 얼굴로 대답한다. “친구가 그러는데, 사람에게도 흥미를 가져보라고 해서요.” 이 말은 중의적이다. 여기에서 ‘사람’이 가리키는 대상은, 표면상으로는 말 그대로 카메라의 뷰파인더에 들어올 ‘피사체’를 언급하고 있는 듯하지만 적확하게는 ‘캐롤’이라는 사람을 향해있다. 이어지는 둘의 대화에는 한층 완곡한 애정의 표현이 따라온다.

“(사람에게 흥미를 가지는 것)어떻게 되고 있어요?”

“아주 잘 되고 있어요.”

 

 

4. 확인

<콜 미 바이 유어 네임>

 
<콜 미 바이 유어 네임>의 제목은 이 영화에서 사랑을 확인하는 시점에 올리버의 입으로 말해진다.

“네 이름으로 날 불러줘. 넌 내 이름으로 부를게.”

이토록 생경한 사랑의 표현은 아름다운 시구를 듣는 것과 같은 착각을 안긴다. 타인을 나의 이름으로 불러본다는 것. 평생을 들어만 왔던 내 이름이 나의 입을 통해 말해지는 건 어떤 기분일까. 더군다나 이 순간 내 이름의 주인은 내가 사랑하는 ‘그’가 된다. 이는 두 사람이 사랑을 말하기 위해 나눠 가진 암호의 언어임과 동시에, 엘리오에게 가장 빛나는 대상일 올리버가 다시 ‘엘리오’가 되는 마법 같은 순간을 창조하는 언어다.

 

<캐롤>


시대적 한계를 담고 있는 탓에 <캐롤>에서 두 사람은 몇 번의 곡절을 겪는다. 캐롤에게는 이혼 절차를 밟는 중에 있는 남편이 있고, 여자를 사랑했던 전력이 있기 때문. 캐롤과 테레즈는 의심과 경멸의 눈초리들로부터 도피하듯 여행을 떠난다. 명징한 사랑의 표현 없이도, 이들은 서로에게 이끌리고 있다는 것을 서로를 살피는 눈빛으로 더욱 또렷하게 감지한다. 둘만의 여행에서 확인된 두 사람의 감정은 육체와 함께 전해진다. “하늘에서 떨어진 사람.” 다시금 일컬어진 찰나에, 이 우아한 언어는 정확하게 테레즈에게 도착한다.

 

 

 

Writer

예측 불가능하고 아이러니한 세상을 닮은 영화를 사랑한다. 우연이 이끄는 대로 지금에 도착한 필자가 납득하는 유일한 진리는 '영영 모를 삶'이라는 것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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