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찍이 제75회 골든글로브 시상식 뮤지컬-코미디 부문 작품상과 여우주연상을 거머쥐고, 제90회 아카데미 여우주연상, 여우조연상, 감독상, 각본상 등 네 개 부문에 노미네이트되며 작품성을 인정받은 <레이디 버드>가 2018년 개봉했다. 영화를 연출한 그레타 거윅 감독은 한 인터뷰에서 “시얼샤 로넌의 연기를 보고 나서야 레이디 버드를 알게 된 것 같다”고 말했다. 시얼샤 로넌이 ‘레이디 버드’ 역할에 얼마나 적격이었는지 한 마디로 함축해 보여주는 설명이다.

시얼샤 로넌은 레이디 버드와 닮았다. 비록 그가 레이디 버드처럼 평범한 학창 시절을 보내지는 않았고, 9살 무렵 배우 일을 시작해 12살 되던 해 <어톤먼트>에 출연하며 할리우드에 입성하는 등 대부분의 유년시절을 학교보다는 영화 현장에서 보냈다. 하지만 시얼샤 로넌이 그간 작품 속에서 맡아온 역할만큼은 매번 새로운 도전과 변화를 맞으며 다양하게 변주해왔다. 레이디 버드가 부모님이 지어준 ‘크리스틴’이라는 이름 대신 자신에게 직접 지어준 이름으로 불리길 원한 것처럼, 시얼샤 로넌 또한 남들의 시선이나 규정된 프레임에 갇히지 않고 꾸준히 자신만의 시각과 관점으로 영화 안에서 새로운 세계를 창조해냈다. 그가 그동안 얼마나 다양한 모습을 스크린에 새겨왔는지 확인해보자. 그의 ‘지금’을 이해하는 데 도움이 될 것이다.

 

1. 또렷한 첫인상

<어톤먼트>의 ‘브라이어니’

뉴욕 태생인 시얼샤 로넌은 아일랜드 출신인 부모님 사이에서 외동딸로 태어났다. 아버지 폴 로넌(Paul Ronan)과 어머니 모니카 로넌(Monica Ronan) 모두 배우 출신으로, 뉴욕에서 배우로 활동하다 시얼샤 로넌이 3살 되던 해 다 함께 아일랜드 칼로주로 건너가 생활했다.

아일랜드 공영방송을 통해 데뷔하고, 드라마에 출연하며 연기자의 길을 시작한 시얼샤 로넌을 단숨에 세계적인 스타덤에 올린 작품은 조 라이트 감독의 영화 <어톤먼트>(2007)다. 그는 언니와 그의 연인 사이를 오해해 그들의 삶을 파국으로 이끄는 13살 소녀 ‘브라이어니’를 강렬하게 연기하며 골든글로브와 아카데미 시상식에서 최연소 여우조연상 후보에 올랐다. 복합적인 감정선을 가진 캐릭터를 매끄럽게 처리했다는 평을 들었는데 당시 그의 나이는 극중 나이보다도 어린 12살이었다.

<러블리 본즈>의 ‘수지’

<어톤먼트>로 할리우드 영화계에 또렷한 첫인상을 새긴 시얼샤 로넌은 곧 피터 잭슨 감독의 <러블리 본즈>(2009)를 통해 크리틱초이스어워드 아역배우상, 새턴어워즈 최우수 신인배우상 등 수많은 시상식을 휩쓴다. 이 영화에서 그는 첫 데이트를 앞두고 이웃집 남자에게 무참히 살해당해 이승도 저승도 아닌 경계 어딘가에 맴도는 14세 소녀로 ‘수지’로 분해 자신과 남겨진 이들의 고통을 생생한 시각으로 그려냈다.

 

2. 다양한 장르에 두각을 보이다

<한나>의 ‘한나’

두 편의 영화로 성공적인 할리우드 스크린 데뷔를 치른 그는 줄곧 서늘하고 냉소적이며, 어딘가 몽환적인 분위기를 풍기는 캐릭터로 관객을 찾았다. 2010년 피터 위어가 감독한 영화 <웨이백>에서는 1940년 시베리아 강제노동수용소를 탈출하는 수감자 무리에 합류해 고비사막과 히말라야산맥을 관통하는 폴란드 소녀 ‘이레나’로 분했고, 2011년 조 라이트 감독과 또 한 번 호흡을 맞춘 영화 <한나>에서는 혹독한 훈련을 통해 양성된 16살 소녀 살인병기 ‘한나’를 인상적으로 연기했다.

<바이올렛 앤 데이지>의 ‘데이지’

시얼샤 로넌의 킬러 역할은 한 번에 그치지 않았는데, 같은 해 출연한 영화 <바이올렛 앤 데이지>(2011)에서도 십 대 암살자 ‘데이지’ 역을 맡아 인상적인 연기를 펼쳤다. 순수함과 잔인함을 동시에 지닌 데이지의 신비로운 얼굴은, 시얼샤 로넌의 창백한 이미지와 맞물리며 좋은 시너지를 냈다.

<호스트>의 ‘멜라니’(좌), <하우 아이 리브>의 ‘데이지’(우)

이후 이어지는 필모그래피는 따로 언급이 필요할 만큼 인상적이다. 외계생명체가 인간의 영혼을 지배하는 미래 세계를 다룬 영화 <호스트>(2013)에서는 하나의 몸, 두 개의 영혼을 가진 신비로운 여인 ‘멜라니’를 연기했고, 같은 해 개봉한 영화 <하우 아이 리브: 내가 사는 이유>에서는 핵폭발이 일어나 강제로 이별하게 된 연인을 만나기 위해 전쟁터로 뛰어드는 강인한 여성 ‘데이지’로 분해 연기력과 흥행성을 모두 갖춘 할리우드 대표 여배우로 자리매김한다.

 

3. 다채로운 매력을 뽐내다

<그랜드 부다페스트 호텔>의 ‘아가사’

액션 블록버스터를 잘 보지 않는 사람이라면, <그랜드 부다페스트 호텔>에 나왔던 시얼샤 로넌의 얼굴이 낯설었을 수도 있다. 실제로 영화를 본 많은 관객들이 웨스 앤더슨 감독이 어디서 저토록 신선한 배우를 찾아냈을까 궁금해했다. 그도 그럴 것이 그간 시얼샤 로넌이 맡아온 역할은 주로 차갑거나 섬뜩하고, 때로는 불굴의 의지를 지닌 강인한 여전사로서의 모습이 대부분이었기 때문이다. 이 영화에서 그는 멘들스 빵집에서 온종일 페이스트리를 만드는 제빵사 ‘아가사’를 천연덕스럽게 연기하며 웨스 앤더슨 감독의 독특한 세계관에 자연스럽게 녹아들었다.

<브루클린>의 ‘에일리스’

그래서 <브루클린>의 ‘에일리스’는 어쩌면 시얼샤 로넌이 맡은 가장 평범하고 진실한 인물일지 모른다. 그는 이 영화에서 고향인 아일랜드를 떠나와 미국 브루클린에 막 정착하며 살아가는 평범한 아일랜드 이민자 ‘에일리스’를 진정성 있게 연기했다. 어쩌면 아일랜드인 부모에게서 태어나 아역 시절부터 할리우드에서 많은 시간을 보낸 그에게 영화 <브루클린>은 아이리시인 자신의 정체성을 새삼 상기시켜주는 계기가 되었을지 모른다. 실제로 그는 한 인터뷰에서 “촬영이 끝나도 눈물이 흐를 정도로 캐릭터에 완벽히 몰입했다”고 영화에 참여한 소감을 말했다. <어톤먼트>를 통해 2007년 미국 아카데미 시상식에서 최연소 여우조연상 후보에 올랐던 그는, 2016년 이 영화를 통해 최연소 여우주연상 후보로 다시 한번 아카데미를 찾았다.

 

4. 레이디 버드로 거듭나다

<레이디 버드>의 “크리스틴 ‘레이디 버드’ 맥피어슨”

<레이디 버드>는 뉴요커가 되고 싶은 새크라멘토 소녀의 성장담을 그린다. 그레타 거윅 감독의 자전적인 스토리를 바탕으로 완성한 성장 로맨스라지만, 그 속에는 시얼샤 로넌이 ‘레이디 버드’라는 엉뚱하고 용감한 소녀의 마음을 이해하고 알아가는 과정과 애정 어린 시선이 함께 담겨있다. 그는 ‘킬러’나, ‘전사’ 같은 그간의 비범하고 탈현실적 모습들을 거쳐, 가장 보통의 존재로서의 10대 소녀를 감정의 과잉 없이 차분하고 설득력 있게 연기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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