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상에는 많은 소설이 있지만 어떤 소설들은 우리를 영화제작자로 만든다. 얼굴도 본 적 없는 책 속 주인공을 가상 캐스팅 하게 만들고, 장면 하나하나 머릿속으로 직접 연출도 하게 만든다. 하얀 건 종이요, 검은 건 글씨일 뿐인 책장 한 장 한 장 그 사이로 우리에게 무언가를 보게 만든다. 물론, 소설을 덮고 나면 우리는 깨닫게 된다. 우리에겐 소설을 영화로 만들 능력도 자금도 없다는 걸. 하지만 뭐 어떤가. 우리에겐 상상력이라는 돈 안 드는 능력이 있는데.

3월 28일 개봉한 영화 <7년의 밤> 원작은 정유정 작가의 동명 베스트셀러다

읽는 사람으로 하여금 영화 제작의 욕망을 불러일으키는 매력적인 소설 4편을 모아봤다. 소설만으로도 충분히 읽는 재미가 있는 작품들이지만, 혹시나 하는 기대를 가져본다. 원작을 찾던 영화제작자가 이 기사를 읽고 이 소설들을 영화로 만들어주지는 않을까. 그렇게만 된다면 내 상상 속에 만들어졌던 영화가 어떻게 현실에 구현되었는지 비교해보는 그 재미를 느끼기 위해 영화관을 찾을 텐데 말이다.

 

 

강화길의 <다른 사람>

다른 사람 | 강화길 장편소설 | 한겨레출판 | 2017

그때는 몰랐어. 누군가에게 좋은 사람으로 보이고 싶다는 마음이 누군가 나를 학대하도록 내버려두는 마음과 닮았을지도 모른다는 걸 말이야.

2012년 등단한 이후로 줄곧 여성 문제에 대한 작품을 써온 작가, 강화길의 첫 장편소설이자 “심각한 사회문제가 되는 데이트 폭력에 대한 날카로운 문제 제기와 함께 최근 급부상하는 영(young) 페미니스트의 목소리가 구체적으로 담겨있다”는 평가를 받으며 263대 1의 경쟁을 뚫고 한겨레문학상을 받은 작품. 그런데 더 중요한 건 모든 걸 떠나서 이 소설, 무섭도록 재미있다는 것이다.

소설은 데이트 폭력의 피해자 김진아의 이야기로부터 출발한다. 같은 회사 상사였던 남자친구에게 다섯 번째 폭행을 당하던 날, 그를 신고한 진아. 하지만 5개월의 재판 끝에 가해자에게 내려진 벌은 겨우 벌금 300만 원. 진아가 자신의 이야기를 인터넷 게시판에 올려 공론화시키자 이번엔 직장동료가 진아에 대한 안 좋은 평판을 올려, 진아를 ‘맞아도 싼 년’으로 만든다. 회사를 그만두고 집에 틀어박혀 자신을 욕하는 글을 찾아 읽던 진아의 눈에 들어온 한 트위터의 글. 그 글은 잊고 지냈던 12년 전 진아의 대학 시절로, 죽은 친구 유리에 대한 기억으로 그를 데려간다.

영화 <라쇼몽> 포스터

언뜻 데이트 폭력 피해자의 이야기로 보이던 소설은, 양수진, 하유리, 김동희 등 새로운 인물들이 털어놓는 각자의 입장이 나오면서 12년 전 벌어졌던 사건의 전말을 쫓게 만든다. 김진아의 이야기를 들을 때는 양수진을 욕하게 되었다가 양수진의 이야기를 듣다 보면 김진아를 좋아하기 힘들어진다. 김동희의 이야기에서는 김동희가 정말 억울하게 느껴졌다가 하유리의 이야기에서는 점점 마음이 저린다. 마냥 착하고 마냥 나쁜 사람도 없이 저마다 자기 자신을 합리화하고 포장하는 인물들. 그들이 전하는 12년 전 그 시절의 이야기. 하나의 사건을 여러 가지의 시각으로 재현하는 영화 <라쇼몽>으로부터 탄생한 ‘라쇼몽 기법’이 떠오른다.

소설을 읽는 내내 영화제작자가 되어 머릿속으로 양수진의 입장, 김진아의 입장, 하유리의 입장이 옴니버스로 구성되는 영화를 상상해본다. 각자의 시선으로 전개되면서 사건의 진실이 하나씩 밝혀지는, 그래서 도저히 눈을 뗄 수 없는 그런 영화. 하유리 역할은 어느 배우가 하면 좋을까. 시선을 한 몸에 받는 외모지만 미친 사람 같아 보일 정도로 과장된 행동과 연극적인 말투 때문에 늘 사람들에게 외면당했던 하유리. 다른 등장인물도 물론 중요하지만, 소설의 중심에 우뚝 서 있는 하유리의 캐스팅만으로 이 영화의 승패가 갈릴 것 같다는 생각도 해본다. 하지만 나는 영화제작자가 아니니 이쯤에서 상상을 멈추는 수밖에.

 

 

김애란의 <그곳에 밤, 여기에 노래>

비행운 | 김애란 소설집 | 문학과 지성사 | 2012

“워 더 쭈어웨이 짜이날?”

“제 자리는 어디입니까?”

테이프가 철커덕 소리를 내며 저절로 뒷면으로 넘어간다. 짧은 사이, 명화의 목소리가 들린다.

“리 쩌리 위안마?”

“여기서 멉니까?”

한국 소설을 사랑하는 사람 중에 김애란 작가를 모르는 사람도 있을까? 김애란의 장편소설 <두근두근 내 인생>은 이미 강동원, 송혜교 주연의 초호화 캐스팅으로 영화화된 적이 있다. 하지만 김애란 작가를 사랑해 마지않는 팬 중 한 명으로서 김애란의 작품 중 영화화된 것이 <두근 두근 내 인생> 한 편밖에 없다는 사실은 못내 아쉽기만 하다. 얼마나 좋은 작품이 많은데! 그중에서도 꼭 영화화되는 걸 두 눈으로 꼭 보고 싶은 작품을 고르라면 단연코 <그곳에 밤, 여기에 노래>다.

가문의 수치이자 한심한 인생의 표본, 몸에 열이 많아 연신 바지춤에 손에 찬 땀을 닦아대는 택시운전사 용대를, ‘언제나 말이 고파 크게 벌어졌던 눈’과 ‘사람을 향해 15도쯤 기울어져 있던 마음’을 가진 여자 명화를 글자가 아닌 두 눈으로 직접 보고 싶다. “워더 쭈어웨이 짜이날” “런스 니 헌 까오씽” 철커덕하고 돌아가는 용대 택시의 그 테이프 속 명화 목소리를 글자가 아닌 두 귀로 직접 듣고 싶다. 너무 큰 욕심일까? 영화 <파이란>이 원작인 아사다 지로의 <러브레터>를 떠올리기 힘들게 할 만큼 멋지게 각색해 명작으로 재탄생했듯이 누군가 이 소설을 영화화해주기를 바라는 것은 너무 과한 기대일까?

<그곳에 밤, 여기에 노래>를 읽다 보면 떠오르는 영화 <파이란>

 

 

박성원의 <하루>

하루 | 박성원 소설집 | 문학과 지성사 | 2012

누군가의 하루를 이해한다면 그것은 세상을 모두 아는 것이다.

아픈 아기를 차에 태우고 꽉 막힌 도로를 지나 은행 문 닫는 시간 전에 전세금을 송금하러 가고 있는 여자, 자신의 후배를 포함한 여섯 명의 직원에게 해고 소식을 전해야 하는 남자, 난독증 때문에 학원 친구들에게 놀림을 받고 집에 가는 길에 전봇대에 붙은 종이를 떼어 구기는 중학생, 선배에게 해고 통지를 받고 퇴근길 술을 마시는 후배. 아무도 잘못한 사람은 없다. 그 누구도 악의는 없다. 하지만 의식하지 못했던 순간의 선택들이 모여 결국은 거대한 불행을 이룬다. 소설의 말미에서 그것을 깨닫는 순간 우리는 등골이 오싹해진다. 어디서부터 잘못된 것일까. 자신도 모르는 사이 소설의 첫 장으로 다시 돌아간다. 그들을 그렇게 이끌었던 그 미세한 씨줄과 날줄들을, 그 거대한 그물의 실체를 다시 확인하기 위해.

영화 <씨민과 나데르의 별거> 예고편

누군가의 악행도 누군가의 악의도 없이 그저 저마다의 작은 행동들이 엮이고 쌓여 비극적인 결말을 낳는 영화 <씨민과 나데르의 별거>가 떠오른다. 모로코, 일본, 멕시코의 사건들이 모여 하나의 거대한 이야기로 엮어지는 영화 <바벨>이 떠오른다. 세상의 많은 이야기들은 선과 악의 대립을 다루지만 사실상 우리가 사는 세상은 선과 악의 구분이 모호하다. 우리는 다른 사람에게 영향을 끼치기도 하고, 다른 사람들로부터 영향을 받기도 하며 살아간다. 그리고 대부분 비극은 그러한 사소한 영향들로부터 시작된다. 그렇기에 이러한 삶의 진실을 보여주는 영화들은 살인마가 나와 끔찍한 짓을 저지르는 그 어떤 공포영화보다도 더 소름 끼치게 무섭다. 그리고 <하루>를 읽고 있노라면 이 소설도 분명 그런 영화가 될 수 있을 것이라고 확신하게 된다. 아마 이전까지 한국에서 본 적 없던 가장 무시무시한 영화가 되지 않을까.

영화 <바벨> 예고편

 

 

김미월의 <프라자 호텔>

아무도 펼쳐보지 않는 책 | 김미월 소설집 | 창비 | 2011

내가 바로 그때의 나라는 걸, 우리가 바로 그때의 우리라는 걸, 증명할 수 있을까.

줄거리만 놓고 본다면 다른 세 편의 소설들에 비해 영화화되기에는 조금 부족해 보일 수도 있다. 소설집 <아무도 펼쳐보지 않는 책>에 수록된 단편 <프라자 호텔>은 부인과 ‘프라자 호텔’에서 휴가를 보내기로 한 남자가 부인의 커피를 사러 호텔을 나서면서 회상하는 ‘프라자 호텔’에 얽힌 첫사랑 이야기가 줄거리의 전부니까. 하지만 강하고 센 캐릭터에 극적인 클라이막스가 있어야만 영화가 성립하는 건 아니지 않은가. 어떤 감수성을 건드리는 것만으로도 영화는 충분히 자기 목표를 달성하기도 한다. 이를테면 <건축학개론> 같은 영화처럼. 혹시 모를 일이다. <건축학개론>도 누군가 줄거리만 두고서 ‘영화화되기에는 부족해’라며 반대했을지도. 장담컨대 첫사랑 윤서와 주인공의 풋풋했던 그 시절 이야기를 스크린에 옮겨 놓는다면 아마 첫사랑을 해본 적 있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보는 내내 흐뭇한 미소를 지을 수밖에 없을 것이다.

영화 <건축학개론> 예고편

물론, 한 남자가 추억하는 첫사랑 이야기가 소설의 다는 아니다. 소설의 또 다른 주인공은 서울의 한복판에서 모든 역사를 내려다본 프라자 호텔. 광주민주화운동의 진상규명을 요구하는 시위에서부터 노무현 대통령 서거, 용산 참사 그리고 하다못해 김건모의 ‘잘못된 만남’과 노찾사의 ‘마른 잎 다시 살아나’까지. 시골에서 갓 상경한 열아홉 대학생이 삼십 대 직장인이 되어가는 수십 년의 시간 속 수많은 역사적 사건들을 소설은 대놓고 드러내지 않고 자연스럽게 녹여낸다. 첫사랑 이야기에 역사적인 의미까지 담아 살을 조금 더 붙여나가다 보면 한 편의 근사한 영화가 완성될 것 같은 건 나만의 생각일까?

 

상상해본다. <나미야 잡화점의 기적>이 그랬듯, <7년의 밤>이 그랬듯이 이 소설들도 언젠가 영화화되는 날을. 그날이 오면 포스터를 보며 자랑스레 이렇게 말해보는 거다. 안 그래도 그 소설 영화로 만들면 좋을 것 같다 했었는데! 마치 영화화되는데 내 머릿속 상상이 큰 기여라도 한 것처럼. 그리고 상상 속의 그 영화와 실제 영화를 비교하는 재미를 느껴보는 거다. 소설 속 용대와 명화와 유리와 윤서를 스크린으로 직접 만나보면서. 그러니 혹시 누구 안 계실까요? 이 소설, 영화로 만들어주실 분!

 

 

Writer

광고회사 카피라이터. 카피 쓴다는 핑계로 각종 드라마, 영화, 책에 마음을, 시간을 더 쓰는 중.
ANSO 블로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