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일 어린이들이 굶고 있다>(1924), 석판

1980년대 한국 민중미술에 큰 영향을 주었던 케테 콜비츠는 1867년 7월, 프로이센 동부의 쾨니히스베르크에서 태어났다. 케테의 집안은 사회적으론 중산층 지식 계급에 속했지만 집안 분위기는 자신들이 속해 있는 계급보다는 그 사회에서 억압받는 계층, 소외되는 계급에 더욱 공감하고 동조하는 분위기였다. 외할아버지는 1848년 시민혁명 이후 민주헌법 제정에 참여했고, 기성 교회의 권위와 남을 배척하는 복음주의를 거부하고 합리주의와 윤리의식을 강조하는 자유 신앙 운동을 펼쳤던 사람이었다. 아버지 역시 프로이센 정부의 민중 억압과 부패상에 분노를 느껴 원래 법관이라는 직업을 버리고 양심대로 살아가기 위해 건축기술자가 된다. 1891년에 결혼한 그의 남편 칼 콜비츠도 의사로서 빈민구호 활동을 했던 사회주의자였다. 칼 콜비츠는 베를린의 가난한 동네에 자선병원을 세워 그곳에서 가난한 이웃들을 보살폈다. 케테 콜비츠도 병원에서 일하면서 고통받는 사람들을 많이 만났으며 이때의 경험이 그의 작품활동에 큰 영향을 주었다. 이러한 배경을 보면 그의 예술이 소외당하고 가난한 사람들에 포커스를 맞춘 것이 어쩌면 당연한 일이라고 하겠다.

10대부터 미술 수업을 받은 콜비츠는 현대 독일 판화의 아버지라 불리는 막스 클링거(1857~1920)의 판화작품에 영향을 받았다. 콜비츠는 사회 참여적인 성격을 띠는 판화를 선택, 자기 체험적인 고백과 시대를 담은 예술을 펼쳤다. 초기에는 에칭과 석판화를 주로 하였으나 이후 에른스트 바를라흐(1870~1938)의 영향을 받아 목판화를 만들었다. 평생에 걸쳐 275점의 판화를 제작했으며 그중 대부분이 흑백 판화다. 그는 불행한 사람, 특히 가난과 전쟁의 피해자들에게 관심이 있었고 그의 작품을 관통하는 것은 삶의 고통과 저항, 그리고 여성과 어머니로서의 시각이다.

 

직조공들

‘직조공들’ 연작 판화, <궁핍>(1893)
‘직조공들’ 연작 판화, <행진>(1897)

케테 콜비츠는 게르하르트 하웁트만의 희곡 <직조공들>이라는 연극을 보고 난 후 감명을 받아 판화를 제작하였다. 총 6점의 연작 판화인 ‘직조공들’은 가난한 직조공들의 삶을 처절하리만큼 적나라하게 그려낸다. 케테 콜비츠는 이 작품을 1898년 베를린 미술대전에 출품했고, 심사위원들은 이 작품에 금상을 주려 했다. 그러나 프로이센 정부는 이 작품이 지닌 급진적인 주제 때문에 황제가 시상을 거부하도록 했다.

 

농민전쟁

‘농민전쟁’ 연작 판화, <잡힌 사람들>(1908)

콜비츠의 두 번째 대형 연속 판화 시리즈인 ‘농민전쟁’은 1525년에 독일에서 일어났던 농민전쟁을 주제로 하고 있다. 콜비츠는 어떤 시각적 자료 없이 본인의 구상만으로 ‘농민전쟁’ 시리즈를 제작하였다. 이 시리즈로 1906년 빌라 로마나상을 받았다.

 

아들의 죽음과 반전운동

<비통한 부모>(1932), 블라드슬로 독일 전쟁 기념관

1차대전이 일어나자 케테 콜비츠의 두 아들도 전쟁에 참여하게 되었다. 전쟁 참가에 반대한 남편과 달리 케테는 아이들의 뜻을 존중하자고 하였다. 자신의 아이만 이기적으로 쉬운 길로 가게 할 수 없다는 뜻이었다. 하지만 1914년 둘째 아들이 죽자 케테 콜비츠는 큰 충격을 받았다. 아들이 죽은 날 그녀의 일기에는 단 한 줄만이 적혀 있었다. ‘당신의 아들이 전사했습니다.’ 1932년에 그녀는 아들 페터의 죽음을 기리는 <비통한 부모>를 제작하였다. 1942년에는 페터의 이름을 물려받은 큰손자 페터 또한 2차 세계대전으로 인해 사망한다. 이 두 가지 사건은 그에게 견디기 힘든 재난이었다. 그는 큰손자가 사망한 1942년에 마지막 판화이며 유언과도 같은 <씨앗들이 짓이겨져서는 안 된다>를 제작했다.

<씨앗들이 짓이겨져서는 안 된다>(1942)

그 자신의 일기엔 이렇게 적혀 있다.

‘늙은 여인은 자식들을 자신의 외투 속에 품고 절대로 빼앗기지 않겠다는 듯 팔을 활짝 펴 소년들을 감싸고 있다. <씨앗들을 짓이겨서는 안 된다>, 이 요구는 <두 번 다시 전쟁을 해선 안 된다>와 마찬가지로, 막연히 그리는 바람이 아니라 율법이다. 명령이다.’

<애도>(1938-1939)
<희생>(1922-23)
<죽은 아들을 껴안고 있는 어머니>(1941)
<피에타>(1937-1938)
<죽음의 부름>(1934-1935)

 

만년

<칼 콜비츠와 함께한 자화상>(1940), 목탄
<소녀를 무릎에 앉힌 죽음>(1934), 석판
<죽음이 덤벼든다>(1934), 석판

1936년경 나치는 케테 콜비츠의 작품을 퇴폐 미술로 지정하여 그를 베를린 예술 아카데미에서 해임하고 박물관에서 그의 작품들을 철거했으며 독일에서의 활동을 금지하였지만 ‘어머니와 아이들’을 소재로 한 그림들은 잘라내어 자신들의 프로파간다에 이용하였다. 한편 미국에서는 그의 70번째 생일을 기념하여 작품전을 열고자 제의하였고 콜비츠 작품 수집가인 뉴욕의 에리히 콘은 미국 이민까지 주선할 정도였다. 하지만 그는 가족의 신변 위험을 걱정하여 거절하였다.
1940년 남편 칼이 병으로 사망하였다. 전쟁이 격화되자 케테 콜비츠는 베를린을 떠나 피난길에 올랐고, 살던 집은 폭격을 맞아 파괴되었다. 이때 콜비츠의 많은 작품들도 함께 타버렸다. 콜비츠는 1945년 4월 22일 사망하였으며 그의 사망16일 후 전쟁은 끝났다. 참여 미술의 선각자였던 케테 콜비츠의 미술은 1930년대 중국 루쉰의 판화 운동과, 1980년대 대한민국의 민중미술에도 큰 영향을 미쳤다.

<과부II>(1922-1923)
<러시아를 도우라!>(1921), 플래카드

 

자화상 시리즈

<이마에 손을 얹은 자화상>(1910), 동판
<자화상>(1924), 크레용화
<너무나 지친 자화상>(1934), 목탄
<왼쪽을 향한 옆얼굴>(1938), 석판
에른스트 바를라흐, <떠 있는 천사>(1927) via ‘Ekir’ 

에른스트 바를라흐는 1차대전 희생자를 위한 조각을 부탁받았는데, 그렇게 완성된 작품이 <떠 있는 천사>다. 이 작품은 아들을 잃은 케테 콜비츠의 얼굴에서 착안해 만들었다는 소문이 있다. 독일 북부의 오래된 소도시 귀스트로프의 성당에 있는 이 조각은 실제로 케테 콜비츠의 자화상과 많이 닮았다. 바를라흐는 처음부터 의도했던 것은 아니었으나 조각상의 얼굴이 그렇게 나왔다며, 정말 처음부터 의도했다면 분명 실패했을 거라 말했다.

케테 콜비츠를 다룬 영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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