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87년 1월 14일, 남영동 대공분실에서 조사받던 스물두 살 대학생 박종철이 고문으로 사망한다. 또 하나의 의문사로 덮일 수도 있었다. 그런데, 한 젊은이의 무고한 죽음을 접한 사람들이 하나둘 용기를 내고, 그 선택에 충실했던 이들의 행동이 사슬처럼 맞물리며 거대한 역사적 파동을 만들어낸다. 영화 <1987>은 당시 강고한 공권력 아래 숨죽였던 사람들의 용기가 만들어낸 1987년의 뜨거운 공기를 온전히 재현한다.

 

* 영화의 스포일러가 있습니다.

 

한 대학생의 죽음이 6월의 광장으로 이어지기까지

졸지에 시신으로 돌아온 스물두 살 아들을 차갑게 얼어붙은 강물 속에 흘려보내야 했던 한 아버지의 슬픔에서 1987년의 시간은 시작된다. 경찰은 “책상을 탁 치니 억 하고 죽었다“는 어처구니없는 망언으로 사인 은폐를 시도한다. 그러나 고문치사를 당한 대학생의 부검을 명령한 검사(하정우), 진실을 취재하고 보도한 기자(이희준), 고문치사에 대한 진실을 알린 교도관(유해진), 시대의 변화를 촉구하며 시위를 하다 죽은 대학생(강동원) 등 수많은 사람들의 용기 있는 선택이 모여 역사의 물줄기를 바꿔 나간다.

1980~1990년대는 대학가 데모가 일상화되고 최루탄 냄새가 넘쳐나던 격동의 시기였다. 민주화 운동 인사에 대한 고문이 빈번하게 자행되고, 백골단이라 불리던 사복경찰관들의 몽둥이가 휘날리며 비명과 신음이 거리 곳곳에 난무하던 불안한 시절이었다
힘없이 죽어간 아들을 위해 아무것도 해줄 수 없었던 아버지는 "철아, 잘 가그래이. 이 아부지는 아무 할 말이 없데이"라며 아들을 떠나보냈다

그래서 영화를 보다 보면 슬픔과 분노, 탄식 등 여러 감정이 교차적으로 밀려든다. <1987>은 실재했던 이들의 드라마가 가진 생생함에 덧붙여 그들이 겪었을 법한 감정의 파고를 손에 잡힐 듯 따라가며, 그들 중 한 명이라도 다른 선택을 했다면 6월 광장의 시간은 불가능했을 수 있음을 새삼 상기시킨다. 그리고 우리가 딛고 선 오늘의 역사가 평범한 이들의 분투를 딛고 올라선 것임을 체감하게 만든다.

 

각자의 자리에서 용기 있게 맞선 사람들의 이야기

영화 <1987>에서 대사가 있는 배우만 무려 125명, 수많은 배우들의 진심 어린 선택이 모여 이 영화를 이룬다

인물의 선택 사이, 행간에 놓인 감정의 변화까지 따라가는 영화 <19897>에서 인물 하나하나를 연기한 배우들의 면면은 영화를 빛내는 가장 큰 요소다. <1987>에 출연한 배우들 모두 분량의 많고 적음을 떠나 1987년 시간의 톱니바퀴 속에서 각자의 역할을 해내며 릴레이로 주인공을 맡아 매 순간 진실한 연기를 펼쳤다. 캐릭터를 보는 것만으로도 그 시대에 만연한 불안과 공포를 실감할 수 있다. 한국 영화계에서 내로라하는 연기파 배우들이 영화에 등장하는 크고 작은 얼굴을 대변해주었기에 가능한 일이다.

 

2018년의 모든 ‘연희’에게

어쩌면 <1987>은 2018년의 연희(우리)들에게 보내는 편지 같은 영화다. ‘연희’(김태리)는 영화의 주요인물 가운데 유일하게 허구적으로 창작된 캐릭터다. 그는 시대의 변화를 막아서는 쪽을 경멸하면서도 그 변화에 가담하지 않고 시종 무관심한 태도를 유지한다. 그는 민주화 인사의 뒤를 돕는 삼촌에게, 그리고 시대의 변화를 촉구하며 시위를 벌이는 학교 선배 이한열에게 ‘그런다고 세상이 바뀌냐’며 뼈아픈 질문을 던진다. 그러던 연희가 움직이는 건, 한사코 지켜내고자 했던 소중한 사람들이 짓밟히는 광경을 끝내 보고야 말았기 때문이다. 폭력의 시대에 스스로 방관자가 되고자 했던 연희는 어느 순간 이끌리듯 시위의 한복판에 서서 팔을 휘두르며 구호를 외친다. 그리고 영화는 더 나아가, 스크린 밖에 놓인 관객들에게 문득 잊더라도 결코 잊어서는 안 될 시대와 역사를 온전히 마주할 것을 부탁해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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