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신을 ‘인형 장난 전문가’라 소개하는 그림책 작가가 있다. 바로, 그림을 그리는 대신 인형을 만들고 세트장을 지어 이야기를 담는 백희나다. 삭막한 현실에 마법을 건 듯한 이야기와 앙증맞은 디테일, 알고 보면 더 흥미로운 제작 과정까지 도저히 반하지 않고는 견딜 수 없는 백희나의 그림책 두 권을 소개한다.

 

<이상한 엄마>

출처 ‘그림책박물관’
잘못 연결된 전화로 선녀는 일일 엄마가 된다
출처 ‘그림책박물관’

겪어본 사람은 안다. 이마를 짚어줄 사람 없이 혼자서 앓는 밤이 얼마나 서러운지.
세상을 푹 적셔버릴 듯 비가 쏟아지는 오후, ‘호호’는 먹구름처럼 무거운 몸을 이끌고 집으로 향한다. 퇴근 시간까지 한참 남은 엄마는 텅 빈 집에서 혼자 앓을 호호 생각에 애가 탄다. 친정엄마에게 건 전화가 혼선되어 하늘 위 선녀에게 연결된 것도 눈치채지 못할 만큼. 잘못 걸려 온 전화에 어리둥절해 하던 선녀는 아이가 아프다는 말에 주섬주섬 날개옷을 챙겨 입는다.

뭉게뭉게 퍼지는 노란 안개처럼, 호호의 마음도 몽글몽글해진다
출처 ‘ch.yes24’


하얗게 분칠한 얼굴에 커다란 리본 머리, 범상치 않은 모습의 선녀는 기꺼이 호호의 일일 엄마가 되어 준다. 열이 펄펄 끓어 집으로 돌아온 호호를 맞아주고, 아플 땐 속이 든든해야 한다며 노란 안개가 퍼져 나오는 달걀 국도 끓인다. 노릇노릇 달걀 프라이를 부쳐 썰렁한 집안을 데우고, 달걀흰자를 저어 구름 침대도 만든다. 낯선 사람의 등장에 겁을 먹었던 호호도 점점 선녀가 부리는 마법에 빠져들기 시작한다.

출처 ‘ch.yes24’

엄마는 정신없이 빗속을 달려 돌아왔을 때. 호호는 푹신한 구름 위에 누워 곤히 잠들어 있다. 그제야 긴장이 풀린 엄마도 호호를 껴안은 채 깊고 달콤한 잠에 빠져든다, 선녀는 온데간데없이 사라졌지만, 식탁 위에 잔뜩 쌓인 달걀 볶음밥이 고소한 냄새를 풍기며 두 모자가 잠에서 깨어나기만을 기다리고 있다.

<이상한 엄마>의 배경이 되는 아파트
출처 ‘스토리보울 공식 홈페이지’
출처 ‘스토리보울 공식 홈페이지’

그림책보다는 스톱모션 애니메이션에 더 가까워 보이는 제작과정도 매력적이다. 세차게 쏟아지는 빗줄기와 방 안 가득한 안개는 아크릴판을 사용해 표현했고, 웃는 듯 아닌 듯 묘한 선녀의 얼굴은 조선 후기의 얼굴상을 바탕으로 제작되었다. 또, 엄마의 퇴근길 풍경은 작가가 어린 시절을 보냈던 망원동으로, A3 용지에 프린트한 사진을 삽입한 것이다. 무엇보다 소품의 배치나 조명의 각도, 카메라 촬영도 모두 작가가 맡아서 했다. 각도와 빛에 따라 인형의 표정과 느낌이 매번 달라지기 때문이다. 이야기가 더 진짜처럼 느껴지는 건 이렇게 인형들과 끊임없이 소통해서인지도 모른다.

<이상한 엄마> 메이킹

<이상한 엄마>라는 제목을 달고 있지만, 사실 선녀는 엄마라기에는 조금 묘하다. 두꺼운 분칠에 가린 얼굴을 자세히 들여다보면 왠지 남자인 것도 같고, 나이가 아주 많아 보이다가도 또 아닌 것 같다. 그렇지만 엄마라는 존재를 꼭 어떠한 것이라 규정지어야만 할까. 선녀가 부린 마법은 단순히 음식을 만들어준 것이 아니라, 아플 때조차 혼자 있어야 하는 아이와 아픈 아이를 두고도 회사에 있어야 하는 엄마의 마음을 어루만져 준 것이었다. 생판 모르는 사이인데도 아이가 아프다는 말을 그냥 지나치지 못하는 마음씨, 그거라면 충분하지 않을까.

 

 

<어제 저녁>

출처 ‘그림책박물관’
출처 ‘그림책박물관’

그런가 하면 <어제 저녁>은 페이지를 잡아당기면 병풍처럼 와르르 펼쳐지는 형식에 이야기 구성 방식도 독특한 작품이다. ‘유쾌한 아파트’에는 총 아홉 가구가 산다. 마음이 약해 늘 굶주리는 사냥꾼 여우, 저녁마다 노래를 부르는 개 부부, 꼬불꼬불한 털이 잔뜩 엉킨 양……. 개 부부의 양말이 사라진 어느 날 저녁 6시, 옆집에서는 이틀이나 굶은 여우가 산양에게 저녁 초대를 받고 오리 유모는 아기 토끼 여덟 마리를 재우고 있다. 물건 수집이 취미인 생쥐는 크리스마스 장식을 구하러 외출하고, 아파트 밖에서는 고양이가 케이크를 배달하러 오는 중이다. 각기 다르게 펼쳐지던 아홉 개의 일상은 개 부부가 울부짖으며 차례차례 연결된다.

양말은 생각지도 못한 곳에서 발견된다
출처 ‘가온빛’

아기 토끼들은 잠에서 깨어 날뛰고, 현관문을 열려던 양은 깜짝 놀라 잔뜩 엉킨 털 속에 열쇠를 떨어뜨린다. 여우는 이끼 수프뿐인 저녁 식사 때문에 개 부부를 따라 울고 싶어진다. 이렇게 모두에게 엉망이 된 저녁은 양말이 발견되며 다시 차례로 해결된다. 개 부부는 생쥐가 크리스마스 장식으로 걸어놓은 양말을 발견하곤 기쁨의 노래를 부르고, 노랫소리를 들은 아기 토끼들은 단꿈에 빠진다. 집에 들어가지 못하던 양은 때마침 지나가던 얼룩말의 도움으로 털 속에 파묻힌 열쇠를 되찾고, 제시간에 배달된 케이크는 여우와 산양의 저녁 식사의 하이라이트가 되며, 배달원 고양이와 마주치는 바람에 집으로 뛰어 돌아온 생쥐는 개 부부의 노래를 들으며 마음을 진정시킨다. 쓰러진 도미노를 다시 차곡차곡 일으키듯, 이야기는 돌고 돌아 다시 제자리로 돌아온다.

출처 ‘스토리보울 공식 홈페이지’


이 작품 역시 언뜻 보고 넘어가기 쉬운 장면 하나에도 엄청난 정성이 녹아 있다. 인형이 고개를 기울이는 각도부터 벽지의 종류, 스탠드의 위치, 인형이 입고 있는 옷, 사진의 각도 등 모든 요소들이 수백 번의 테스트를 거쳐 결정된다. 앙증맞은 소품들도 마찬가지다. 아기 토끼들의 8층 침대는 비눗갑 여덟 개를 하나하나 개조해 만들었고, 손가락 두 마디만 한 크기의 초콜릿 머드 케이크도 실제로 반죽해 구웠다, 오리 유모가 아기 토끼들에게 읽어주는 그림책이 작가의 다른 작품인 <달 샤베트>라는 설정도 사랑스럽다.

더 사실적인 표현을 위해 실제 반죽으로 구운 케이크
출처 ‘스토리보울 공식 홈페이지’
출처 ‘스토리보울 공식 홈페이지’
더 자세한 제작과정이 궁금하다면 이곳으로 가면 된다

나 혼자 사는 게 더 익숙한 요즘이다. 밥도 혼자 먹고 여행도 혼자 다니고, 어쩌다 이웃이라도 마주치면 어색하게 고개를 돌린다. 백희나의 세계에선 서로가 서로의 일상을 채운다. 아무런 대가 없이 누군가를 도와주기도 하고, 먼저 손을 내밀어 새로운 관계를 만들기도 하면서. 만약 이 이야기가 정말 판타지처럼 느껴진다면, 먼저 누군가에게 다가가보는 건 어떨까. 행동하는 순간 판타지는 비로소 현실이 된다. 그리고 백희나의 그림책은 우리에게 그럴 용기를 준다.

 

 

Writer

언어를 뛰어넘어, 이야기에는 세상을 변화시키고 삶을 풍요롭게 만드는 힘이 있다고 믿는다.마음속에 새로운 씨앗을 심어주고, 새로운 세계로의 통로가 되어주니까. 그래서 그림책에서부터 민담, 괴담, 문학, 영화까지 다양한 형태의 이야기들을 수집하고 있다. 이렇게 모은 이야기를 사람들에게 소개하는 중. 앞으로 직접 이야기를 만들기도 하며 더 풍성하고 가치 있는 세계를 만들어나가기를 꿈꾸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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