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 유수 영화제와 영화 잡지에서 계속해서 회자되는 이름이 있다. 일명 ‘SEL(Sensory Ethnography Lab)’이라고 불리는 하버드 감각민속지학연구소이다. 이 연구소는 전 세계적으로 가장 도전적이고 실험적인 영화를 만든다는 정평을 받고 있다. 인류학자들이 만들어내는 ‘영화적 도전’이, 어떻게 영화계를 흔들었는지 살펴보자.
‘민족지’라는 것은 인류학자 혹은 민족지학자가 기록한 책이나 논문을 뜻하는 단어다. 하지만 인류를 기록하는 데 언어적 한계를 느낀 학자들은 그 모습을 사진과 영상에 담기 시작했다. 그리고 이러한 자료들이 단순한 자료 수집이 아니라 그 자체로 예술이 될 수 있다는 것을 깨달았을 때, 하버드 대학교는 영화 연구소와 인류학 부서를 결합한 SEL을 설립했다.
국내에는 이 이름이 많이 알려져 있지 않지만, SEL은 이미 영화제에 여러 차례 이름을 올렸고, <시네마 스코프>나 <사이트 앤 사운드>와 같은 영화 잡지에서 여러 찬사를 받은 바 있다. 영화계는 인류학자들이 만들어내는 새로운 감각적 영화에 이례적인 박수를 보냈고, 이 연구소의 실험적인 도전들은 물론 지금도 계속되고 있다.

 

감각의 ‘극한 장르’를 경험하다

<리바이어던> 포스터

실재하는 세계를 느낄 수 있도록 정밀하게 짜인 SEL의 영화들은 관객들에게 새로운 경험을 공유한다. 영화 <리바이어던>의 트레일러를 보자. 마치 파도 밑에 누워서 달려오는 갈매기들을 마주하는 듯한 이 영상은, 괴팍하고, 지저분하고, 익숙하지 않기에, 모종의 ‘두려움’까지 느끼게 한다.

영화 <리바이어던> 트레일러

“인생이 지저분하고 예측 불가한 것이라면, 이 인생을 담는 매체인 다큐멘터리 또한 지엽적이고 개방적일 수밖에 없지 않을까요?”

이 영화를 만든 SEL의 인류학자 루시엔 캐스탱 테일러 감독의 말처럼, <리바이어던>은 오히려 굉장히 현실적인 영화다. 카메라는 관객들을 괴물 리바이어던 그 자체인 것 같은 바다로 초청한다. 인간의 언어는 무심하게 지나가고 (심지어 자막조차 달리지 않는다) 바로 코앞에서 짠 내가 날 것 같은 영상들이 가열차게 나열된다. 그리고 이것은 곧 ‘체험’으로 변한다. 이 영화는 북대서양의 해양 산업을 담고 있으며 기업이 착취하는 노동자와 바다의 모습을 그리고 있다. 그래서 영화는 어업에 관련된 인류의 모습뿐만 아니라, 소외당하고 착취당하는 모든 것을 조명한다. 인류의 일상은 인간만으로 채울 수 없고 수많은 ‘자연의 일상’ 또한 합쳐진 결과임을 영화로 보여주고 있는 것이다. 그렇기에 카메라의 시선은 인간의 것을 뛰어넘어 자연을 대변한다. 넘실대는 파도를 그대로 유영하고 날아오르며 부딪힌다.

뉴욕 타임즈의 영화 리뷰 영상

SEL의 연구원들은 인터뷰를 통해 이 화면에 대한 일화를 이야기했다. 어업이라는 극한의 환경을 담아내야 했던 현장이니만큼, 이들은 촬영을 진행하다가 카메라를 잃어버리는 ‘대실수’를 저지르기도 했는데, 잃어버린 카메라를 보완하기 위해 썼던 것이 바로 아주 조그만 고프로 카메라였다고 한다. 이들은 이 고프로 카메라를 아예 바다에 던져 넣거나, 하늘에 던지면서 과감하게 사용했다. 그리고 과연 그들이 원하는 결과를 볼 수 있었다. 루시엔 감독은 이 카메라 덕분에 “화면이 더 투명해졌고, 시청자의 상상력을 더욱 자극했다”며 만족스러워했다.

<마나카마나> 스틸컷

물론 SEL의 영화가 항상 이렇게 역동적인 방식으로만 실재를 담아내는 것은 아니다. <마나카마나>라는 영화에서 카메라는 거의 움직이지 않는다. 극소로 움직이는 화면 대신 담기는 것은 사람들의 움직임이다. 네팔의 사원을 넘나드는 케이블카는 수많은 사람을 실어 나르고, 그 케이블카를 따라서만 움직이는 카메라는 네팔 사람들의 몸짓과 이야기를 아주 고요하게 담아낸다.

영화 <마나카마나> 트레일러
<마나카마나> 포스터

 

사운드의 가능성을 확장하다

SEL의 영화에서 빠질 수 없는 것이 바로 사운드트랙이다. 많은 영화 비평가들은 SEL 영화의 도전적 가치를 더욱 빛내주는 것이 바로 사운드라고 이야기한다. SEL 연구소의 매니저인 에렌스트 카렐은 영상에 담긴 온갖 소리들을 매우 세심하게 디자인한다.
SEL의 영화는 인류가 만들어내는 소리뿐만 아니라, 지금까지는 노이즈라고 명명되었던 ‘그 밖의 다른 소리’들에게도 똑같이 귀를 기울인다. 사람들의 대화 속에는 바람 소리, 동물들이 내는 소리, 물이 첨벙거리는 소리들이 계속해서 들려온다. 그리고 관객들은 계속해서 카메라 ‘밖’의 세계를 인식하게 되며, 그 너머의 세계에 대한 감각을 투명하게 느끼게 된다.

영화 <스윗그래스> 트레일러

<스윗그래스>는 사운드의 확장성이 아주 확연히 드러나는 수작이다. 사운드는 한 곳에 멈춰 있거나 모여 있지 않고 아주 길게 퍼져 영상 자체를 압도한다. 마이크는 하나의 소리에만 귀 기울이지 않는다. 한 가지 소리가 들려오면 그 밖으로 계속해서 다른 소리들이 짜깁기 되어 들려온다. 카메라의 프레임이 답답해질 만큼, 소리는 집요하게 관객들을 따라붙고 존재감을 알린다.

<스윗그래스> 포스터
에렌스트 카렐 ‘oberterzen-unterterzen’

에렌스트 카렐은 소리들을 통해 새로운 감각을 전달하는 사운드 디자이너로도 활동하고 있다. 그가 디자인하는 소리들이 어떤 확장적 느낌을 전달하는지, 그가 발표한 앨범 사운드 트랙을 통해 들어보자.

사실 SEL의 영화들은 ‘이해하기 어렵다’라는 대중들의 평가를 받는다. 영화 <리바이어던> 트레일러의 댓글 반응으로만 보아도 이 영화들에 대한 대중들의 시선이 그리 곱지만은 않음을 알 수 있다. 하지만 분명한 것은 이 실험적인 영상들은 ‘실험적임’을 위해 존재하는 것이 아닌, 인류에 대한 심층적인 고민을 통해 얻은 결과물이라는 것이다. 인간을 어떻게 담아야 할지를 고민할 때, 비로소 예술은 진정한 진일보를 이룬다. 이 연구소의 영화들은 인류를 바라보는 시선의 확장과 영화의 확장을 동시에 이루어냈다. 마지막으로 이 영화를 “괴물”이라고 소개했던 한 영화제 심사위원의 말을 빌려오며 이 글을 끝맺고 싶다.

“우리는 여전히, 영화가 무엇인지 정확하게 알지 못합니다.”

이 ‘영화’라는 단어는 언제든지 ‘인간’으로 대체될 수 있을 테니.

 

하버드감각민속지학연구소 홈페이지 

 

메인 이미지 <마나카마나> 스틸컷

 

Writer

아쉽게도 디멘터나 삼각두, 팬텀이 없는 세상에 태어났지만 그 공백을 채울 이야기를 만들고 소개하며 살고 있습니다. 시나리오를 쓰고, 영화를 만들고, 으스스한 음악을 들으며, 여러 가지 마니악한 기획들을 작당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