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용한 열정>은 당대에는 은둔자로 불리며 큰 명성을 얻지 못하였으나 시대를 앞서간 문학적 감수성으로 현재는 미국 최고의 시인으로 간주되는 에밀리 디킨슨에 관한 영화이다. 주인공은 <섹스 앤 더 시티>에서 당찬 도시 여성을 보여주었던 신시아 닉슨(Cynthia Nixon)이 연기하였다. 테렌스 데이비스가 그려낸 에밀리 디킨슨 영화는 그녀의 전기영화라기보다는 아픔과 감수성을 화면을 통해 전달하고자 애쓰는 한 편의 문학작품이다. 각본도 감독 자신이 다 쓴 것으로 알려져 있다. 매사추세츠주의 애머스트에서 태어나 평생을 그곳에 살면서 말년에는 자기 방 밖에도 거의 나가지 않았던, 어찌 보면 기이한 성격의 시인을 그의 시와 언어로 있는 그대로 표현하려 애쓴 노력이 이 영화에 역력하다. 사랑하는 사람들을 차례로 떠나보내며 더욱 내면으로 침잠하는 그녀의 고통과 아픔이 보는 이에게도 느껴진다.

<조용한 열정> 포스터

랄프 왈도 에머슨, 헨리 데이비드 쏘로, 월트 휘트만 같은 시인들처럼 그는 관습적으로 쓰이는 제한된 뜻에서 자유롭기 위해 시적 표현들을 나름의 표현으로 바꾸어 쓰는 실험을 감행하였다. 디킨슨은 거의 하루에 한 편씩 시를 썼고 1800편에 달하는 시를 완성했으나, 출판에 대해 매우 회의적인 의지를 가지고 있었기에 생전에는 4편 정도만이 출판되었다. 그 회의감은 자신의 시적 감수성과 압축된 언어에서 오는 특별함을 이해해주지 않는 당대 사람들에 대한 실망에서 비롯된 것이었다. 그의 사후에 동생 라비니아(Lavinia Norcross Dickinson)가 시 원고 뭉치를 발견해 이를 출판하게 된다. 영화는 사랑하는 가족들의 죽음이나 사모했던 목사 부부와의 만남, 또는 오빠의 불륜 외에 딱히 드라마틱한 사건이라고 할 만한 내용도 없으며 기승전결의 구조도 아니다. 어떤 상황과 그에 대한 결과를 보여주는 방식이 일반적인 연출이라면, 이 영화는 상황에 대한 주인공의 대응을 담담하게 그려나가는 연출 방식을 취한다. 덧붙여 친오빠의 불륜을 목격하는 내용은 감독의 상상에서 나온 것이라고 한다.

<조용한 열정> 스틸컷
<조용한 열정> 스틸컷

영화의 출발은 인상적이다. 기숙학교에서 본인의 죄를 회개하라는 원장의 말에 순종하는 다른 학생들과 달리 “깨닫지도 못한 죄를 어떻게 회개하나요?”라며 홀로 꼿꼿이 원장에게 반문하는 주인공을 보여준다. 이때 흐르는 시는 아래와 같다.

모든 황홀한 순간엔 고통이 대가로 따른다
황홀한 만큼 날카롭고 떨리도록
사랑받은 시간만큼 비참한 수년
치열하게 싸운 동전들 눈물 가득한 금고

<조용한 열정> 스틸컷

영화에서 디킨슨은 종교가 모든 일상을 통제하는 시대에 맞서 자유의지를 지닌 존재로 살기 위해 분투한다. 그는 청교도 신앙에 대해 회의했으며, 구원의 희망에 대해 강한 반발심을 가지고 있었다. 그는 가족과의 갈등과 애정, 여성에게 가해지는 억압, 기독교의 폭력적인 권위 등 시대에 저항했던 자신의 감정에 관해 썼다. 영화에서는 당시 신앙에 맹목적이고 광신적인 인물에 대한 묘사로 사모하던 목사의 부인을 예로 든 장면이 인상적이다. 집으로 초대한 목사 부부에게 차를 드시겠냐고 주인공이 묻자 목사 부인은 차도 커피도 하지 않겠다며 그러한 모든 즐거움은 불순한 쾌락이라는 생각을 드러낸다. 그러한 부조리한 맹목적 신앙에 의심을 품고 도전했던 디킨슨의 삶은 예민하고 깨어있던 그에게는 어쩌면 당연한 건지도 모른다. 그는 죽음과 어둠, 생의 무력감, 사랑하는 것과의 이별 등 실존적인 깨달음과 꽃과 벌, 자연의 아름다움도 놓치지 않고 썼다. 그렇게 모든 시는 삶이었고 디킨슨이 버텨낸 시간이었다. 테렌스 데이비스 감독은 에밀리 디킨슨이 겪은 사건들을 재구성하고 찍는 스토리텔링 영화 대신 그의 시를 풀어내는 쪽으로 영화를 이어간다.

모든 가족이 기도하는 중에 혼자 꼿꼿한 주인공

다음은 사랑하던 유부남 목사가 떠난 후에 쓴 <만약 그대가 가을에 오신다면>이라는 아름다운 시이다.

가을에 그대 오신다면 여름은 훌훌 털어버릴래요
미소와 콧방귀로 파리를 쫓듯
일 년 뒤 그대 오신다면 각 달을 공처럼 말아
서랍에 넣을래요. 때가 올 때까지
만약 더 늦어진다면 손 위에서 셀게요
그러다 손가락이 나락에 떨어질 때까지
만약 이 생이 끝나고 당신과 함께할 수 있다면
이 생은 벗어버리고 영원을 맛볼래요.

- 에밀리 디킨슨, <가을에 당신이 오신다면> 중에서

에밀리 디킨슨이 사모했던 실제 찰스 워즈워스 목사
영화에서 ‘에밀리 디킨슨’역의 신시아 닉슨(좌) 실제 에밀리 디킨슨(우)
에밀리 디킨슨이 살았던 집
에밀리 디킨슨의 친필원고

상처받은 가슴 하나 위로할 수 있다면
내 삶은 헛되지 않으리
쓰라린 삶의 고통을 덜어 주고
아픔을 가라앉힐 수 있다면
의식을 잃어가는 울새 한 마리
둥지로 돌려보낸다면
내 삶은 헛되지 않으리

- 에밀리 디킨슨, <만약 내가>

테렌스 데이비스 감독
테렌스 데이비스 감독과 영화 출연진들

영국 감독 테렌스 데이비스는 1988년 장편영화 <먼 목소리, 정지된 삶>으로 데뷔한 이래 29년간 겨우 8편의 작품을 세상에 내어놓았을 뿐이다. 그는 매우 신중하고 느리게 영화를 만들고 있지만 그 미학적 성취만큼은 누구도 부인할 수 없다. 자전적인 이야기를 담아내거나 직접 각본을 쓰고 각색하는 그는 시적인 은유가 돋보이는 영상 스타일로 주목을 받는다. “영화와 텔레비전 드라마는 다른 것”이라는 주장을 해온 그의 영화는 선형적인 서사 전달보다 영화적 형식의 아름다움에 집중한다. 최근 테렌스 데이비스가 심취한 대상은 여성의 삶이다. 2000년 <환희의 집>, 2011년 <더 딥 블루 씨>는 물론 2015년 <선셋 송>까지 억압받아온 여성에 대한 관찰을 이어가고 있다.

<조용한 열정> 2차 예고편
<조용한 열정> 내용 요약 예고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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