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화상 Self-Portrait with Red Hat>(1968)


1907년 출생한 레오노르 피니(Leonor Fini)는 아르헨티나 출신이지만 이탈리아에서 성장하고, 1930년대부터는 파리로 이주하여 활동한 화가이다. 파리로 이주한 이후부터는 동시대에 초현실주의 그림을 그렸던 살바도르 달리, 막스 에른스트 등 남성 화가들과 교류하게 되었지만 특유의 독립적인 성격과 여성의 이미지를 남성 욕망의 대상으로만 표현한 그들에 대한 반감 때문에 공식적으로 초현실주의 그룹에 들어가는 것은 거절하였다. 하지만 프리다 칼로, 레오노라 캐링턴 등 여성 초현실주의 화가들과는 돈독한 관계를 이어갔다.

어릴 때부터 그림을 그렸지만 정식으로 그림을 배운 적은 없고 10대 시절부터 유럽의 미술관에서 르네상스와 매너리즘 양식을 독학으로 배워갔고 해부학책을 통해 미술 이론을 배웠으며, 독특한 존재감으로 예술가로서의 명성을 생전에 일찍 얻게 되었다.

 

<봄의 수호자 La Gardienne des Sources>(1967)

그림 속 여성의 주홍빛 머리는 나비가 몇 마리 앉아있는 듯, 스테인드글라스가 빛을 받아 반짝이는 듯, 울긋불긋하다. 꽃보다도 화려한 붉고 푸른 여러 모양의 잔들은 단순한 장식품이라기보다는 그림 속 여성이 직접 창조한 것처럼 보여 그가 창조의 힘을 가진 주체라고 느낄 수 있게 해준다. 얼핏 멈춰있는 잔들과 닮은 듯 고요하지만, 그림 밖 관람자를 똑바로 바라보는 여성의 강렬한 눈빛에서 만물이 다시 태어나는 봄의 활력과도 같은 약동하는 생명력이 느껴진다.

 

<La passagere>(1964)


이 외에도 꽃이라는 소재는 레오노르 피니의 많은 그림들 속에서 중요하게 다루어졌다.

Leonor Fini


또한, 고양이를 “잃어버린 천국”이라고 칭하거나 한때 23마리의 고양이와 살만큼 고양이를 좋아했던 피니에게, 고양이가 주요한 그림의 소재로 활용되는 것은 자명한 일이었다.

<Les Mutantes>(1971)
<Sphinx 3>(1980)


그의 그림 속 고양이들은 대부분의 그림에 함께 등장하는 등장인물들과 동등할 정도로 커다란 크기로 그려졌다는 점이 특징적이며, 단순히 고양이를 그리는데 그치지 않고 여성의 머리를 하고 고양이의 몸을 한 스핑크스에서 모티프를 따온 반인반수 형태의 초현실주의적인 그림을 그렸던 것도 눈에 띈다.

<Ophelia>(1963)


자신이 화가로만 한정되는 것을 거부한 피니는 셰익스피어와 보들레르, 그리고 에드거 앨런 포의 책의 삽화 작업뿐 아니라 발레와 오페라 등의 무대미술과 의상 작업 및 소설 집필까지 다양한 방면에서 활발한 창작 활동을 보였으며, 당시 흔치 않았던 독립적인 여성 예술가로서 그 자신의 삶의 방식 역시도 많은 관심을 받았다.

Leonor Fini


“나는 내게 운명 지어진 인생과는 전혀 다른 인생을 살게 될 거라고 늘 생각했다. 그런 인생을 살기 위해서는 저항해야 한다는 것도 아주 일찍부터 알고 있었다.”라는 말을 하기도 한 피니는 그 말을 고스란히 실천한 인생을 살았다. 평생을 독신으로 살며 스스로의 자유분방한 삶의 방식을 지켜냈고, 자신만의 독특한 패션을 고수하였으며, 양성애자였던 성적 취향을 환상적이면서도 낭만적인 화풍으로 그림 안에서도 과감히 드러냈다.

<Le long du Chemin>(1960s)
Leonor Fini


이러한 피니의 태도를 보여주는 유명한 일화가 하나 있다. 어느 날 피니는 한 초현실주의자와 약속을 잡고 만나기로 한 장소에 추기경의 주홍색 예복을 입고 나타났다. 그리고 “나는 사제복을 걸쳤을 때의 신성모독적인 느낌이 좋다.”라는 말을 했다고 한다. 지금 와서 들어도 기존의 남성 중심의 종교적인 관습에 정면으로 맞부딪치는 도발적인 행동이었다.

한편 자신의 집에 프리다 칼로의 그림을 걸어놓고 그 그림을 알아보는 사람만을 자신의 친구로 받아들였다고 할 정도로 초현실주의에 경도되었던 팝스타 마돈나의 활동에도 레오노르 피니의 작품들은 적지 않은 영향을 미쳤다.

 

Madonna ‘Bedtime Story’(Official Music Video)


마돈나의 1994년 앨범이자 그녀의 정규 6집 앨범이었던 <Bedtime Stories>의 타이틀곡 'Badtime Story'의 뮤직비디오에는 레오노르 피니뿐만 아니라 레오노라 캐링턴, 레메디오스 바로, 만 레이 등 초현실주의 작가들의 작업이 대규모의 예산을 들인 CG 효과를 통해 구현되었다. 이 뮤직비디오는 그 예술적인 가치를 인정받아 뉴욕현대미술관에 영구 보존되기도 하였다.

Leonor Fini <The End of the World>(1949)
Leonora Carrington <The Giantess>(1947)
Remedios Varo <The Lovers>
Man Ray <Ingres's Violin>(1924)


그뿐 아니라 2018년 봄/여름 시즌의 크리스티앙 디올의 오트 쿠튀르 컬렉션은 최근 활발하게 펼쳐지고 있는 미투 운동과 더불어 ‘그들의 시간은 끝났다’는 의미를 담고 있는 ‘#TimesUp’ 페미니즘 운동에서 드레스 코드를 블랙으로 통일한 데서 얻은 영감과 레오노르 피니의 블랙과 화이트 위주의 독특한 패션에서 함께 영향 받았다고 한다.

Leonor Fini
Paris Spring 18 Couture Dior’s surrealist collection
Paris Spring 18 Couture Dior’s surrealist collection
Paris Spring 18 Couture Dior’s surrealist collection
Paris Spring 18 Couture Dior’s surrealist collection
Leonor Fini

 

Writer

서울에서 살아가는 생활인이자, 하고 싶은 이야기들을 노래로 지어 부르고, 여기가 아닌 어딘가 다른 낯선 세상을 바라보며 사진을 찍는 작업자. 다른 사람들의 작업을 보고, 듣고, 이야기하는 것을 좋아한다. '유유'는 한자로 있을 '유'를 두 번 써서 '존재하기에 존재한다'는 뜻으로 멋대로 사용 중. 2018년 9월부터 그동안 병행 해오던 밴드 '유레루나' 활동을 중단하고, 솔로 작업에 더 집중하여 지속적인 결과물들을 쌓아나가고자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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