윌리엄 모리스(1834-1896)


윌리엄 모리스가 활동하던 당시 그와 그의 친구들은 라파엘 전파(Pre-Raphaelites)라 불리는 양식의 그림을 주로 그렸다. 모임의 이름이기도 한 라파엘 전파에는 가브리엘 단테 로세티, 에드워드 번-존스, 윌리엄 헌트 등이 포함돼 있었으며 당시의 화가, 비평가, 시인 등이 주축을 이루었다. 라파엘 전파는 19세기 중반 영국에서 일어난, 르네상스의 대표적인 화가인 라파엘로 이전 양식으로의 회귀를 주장하는 복고주의와 과학적 눈으로 현실을 재현하려는 사실주의를 동시에 지향한 그룹이자 사조이다. 이들 대부분은 그림 위주의 활동을 하며 당시에 유행했던 학구적인 예술에 반해 일어난 예술 운동에 매료된 작가들이었다. 하지만 윌리엄 모리스는 여기에 그치지 않고 보다 실용적인 예술로서의 디자인 분야에 더욱 골몰하게 된다. 그가 주도한 미술공예운동은 산업혁명으로 인해 모든 것이 기계화되고 대량생산됨에 따라 생활의 아름다움을 잃어버릴 것이라는 문제 제기를 통해 과거의 장인정신을 부활시켜 가구, 벽지, 커튼 등 생활 속의 공예품을 직접 손으로 제작하는 움직임을 일컫는다. 그의 이러한 운동은 훗날 독일로 건너가 바우하우스(Bauhaus) 운동에도 커다란 영향을 미친다.

 

윌리엄 모리스가 디자인한 벽지들

Acanthus wallpaper(1875)
Golden Lily in wallpaper pattern book © William Morris Gallery
Paisley Fabric
Hyacinth, pattern #480(1917)
Strawberry Thief
Anemone

 

정의할 수 없는 사람

시와 문학작품도 썼던 모리스의 판타지 장편소설 <세상 끝에 있는 우물>(1896) 등이 <반지의 제왕> 작가인 J. R. R. 톨킨과 <나니아 연대기> 작가인 C. S. 루이스에게 영향을 미치기도 하였다. <윌리엄 모리스의 생애와 사상>(1998)에서 박홍규 교수가 거명한 그의 직함은 양 손가락으로 꼽아도 모자란다. “19세기 후반 영국의 시인, 소설가, 극작가, 수필가, 번역가, 건축사상가, 공예가, 디자이너, 정치가, 사회주의자, 사회개혁가, 낭만주의자, 생태주의자, 환경보호운동가, 문화유산 보존운동가, 아나키스트, 유토피아주의자, 정치평론가, 교육사상가 등.”

그는 노동자의 삶에 깊은 관심과 의미를 부여하였으며, 그들이 노동과 예술을 삶에서 조화롭게 이루어서 보다 행복한 유토피아적 삶을 살길 바랐던 사회주의자였다.

윌리엄 모리스의 아내 제인 버든 모리스


친구 가브리엘 단테 로세티의 그림모델이기도 한 아름다운 여인 제인 버든과 결혼한 모리스는 자신의 꿈을 이루어 줄 신혼집을 친구들의 도움으로 완성하게 된다. 이는 나중에 ‘레드 하우스’라고 불리는 윌리엄 모리스를 대표하는 집이 된다. 건물은 친구였던 건축가 필립 웹이 지었고 모리스와 예술가 친구들이 협력하여 집 내부와 외부를 장식하였다. 그는 레드 하우스에서 예술 작품을 만들고 그의 사상과 예술 행위를 영위하는 터전을 만들고자 하였다. 그리고 집안의 반대를 무릅쓰고 결혼한 아내 제인 모리스와 행복한 시간을 꿈꾸었다. 그러나 모리스를 신분 상승의 발판으로 삼았다고 전해지는 제인은 비천한 집 출신이지만 영민하여 곧 상류사회에 적응하기 위한 모든 자질을 열심히 갖추어 나간다. 프랑스어와 이탈리아어도 할 줄 알게 되고 피아노도 연주하며 그 어떤 귀족 부인 못지않은 우아함을 지니게 된다. 그러한 그녀의 우아함에 반한 버넌 리(Vernon Lee, 1856-1935)가 <미스 브라운>이라는 소설을 썼고 <미스 브라운>에 나온 캐릭터에 영감을 받아 버나드 쇼(Bernard Shaw, 1856-1950)가 <피그말리온>을 썼으며 이에 기초해 뮤지컬과 영화 <마이 페어 레이디>가 나왔다고 한다. 이쯤 되면 그는 한 시대의 아이콘 같은 존재라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가브리엘 로세티, <The Salutation of Beatrice>(1869)
제인 모리스를 그린 것으로 전해진다


그러나 친구이자 모리스 마셜 포크너(Morris Marshall Faulkner & Co)라는 디자인 회사를 같이 창립한 가브리엘 로세티가 아내 제인을 사랑하게 된다. 라파엘 전파의 대표적 인물인 가브리엘 로세티는 윌리엄 모리스의 물심양면 도움 덕분에 라파엘 전파 2기 활동도 할 수 있었던 친구이다. 둘의 사랑은 곧 그 시대 최고의 스캔들이 되면서 사람들의 입에 오르내렸고 세 사람을 다 괴롭혔다. 그러나 아내를 몹시 사랑했던 모리스는 모든 불명예와 야유를 뒤집어쓰면서도 아내를 지키려 애썼다. 그가 로세티에게 어떠한 비난도 퍼부었다는 얘기가 없는 걸 보면 아내와 친구의 명예 모두 지켜주려 했던 보기 드문 사람이 아니었을까 하는 생각도 든다. 모리스는 딸 둘을 낳고 5년간 살았던 레드 하우스를 떠나 다시는 돌아오지 않았다고 한다. 모리스는 죽을 때까지 제인과 이혼하지 않았다.

레드 하우스
윌리엄 모리스, <La Belle Iseult>(1858)
아내 제인을 모델로 그렸다


윌리엄 모리스는 현대 디자인의 아버지로 불리며 그의 사상과 실천은 근대 디자인의 출발점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랬던 그가 말년에는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예술은 책이었노라고 고백하고 나이 56세에 켐스콧공방(Kelmscott Press)를 연다. 이 시절 모리스는 책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활자체라 생각하고 중세의 글꼴을 모범으로 하는 새로운 글꼴을 만들어 책 자체가 예술작품이 되는 책 만들기에 몰입하였다. 이 예술 책들 중 가장 걸작으로 꼽히는 작품은 제프리 초서(Geoffrey Chaucer)의 작품집이다.

윌리엄 모리스가 디자인하고 출판한 제프리 초서의 책(1896)
윌리엄 모리스가 디자인한 책(1890) 
윌리엄 모리스가 친구 Edward Burne-Jones의 부인을 위해 쓰고 디자인한 책


남편 사후 제인은 윌리엄 모리스 기념관을 짓고 딸 메이가 편집한 윌리엄 모리스 작품집에 많은 도움을 주는 등 남편을 기리는 일에 적극적으로 헌신했다. 윌리엄 모리스는 사후에 더욱 높이 평가되고 있으며 1996년에는 전 세계 각국에서 모리스 타계 100주년을 기념하는 행사를 치르기도 하였다.

윌리엄 모리스가 필립 웹의 가구로 장식한 19세기 영국 방의 풍경
켐스콧공방 근처 윌리엄 모리스 자택 내 침실
윌리엄 모리스 회사에서 만든 공예품
윌리엄 모리스 회사에서 만든 공예품(1890)

 

메인 이미지 윌리엄 모리스, <Cray>(188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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