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미지- 구찌 페이스북

카멜레온빛 공간, 그 가운데 피가 흥건한 듯 붉은 바닥 위에 놓인 수술대. 그 사이로 이마에 제 3의 눈을 뜬 채 꿈틀거리는 뱀, 용, 잘린 머리를 든 모델들이 좀비처럼 배회한다. 이 공기를 채우는 극적인 음악과 주기적인 바이탈 사인, 환자 대기석에 앉아 마냥 마른 침을 삼키는 관객들. 흡사 ‘미치광이’의 꿈을 방불케 하며 세계인에게 충격을 준 이 쇼는, 지난달 이탈리아 밀라노에서 열린 명품 브랜드 구찌의 Fall/Winter 2018-2019 패션쇼다. 이 기묘한 쇼의 세계로 들어가 보자.

 

패션으로 박음질한 하이브리드

이 수술을 집도, 아니 패션쇼를 기획한 구찌의 크리에이티브 디렉터 알레산드로 미켈레(Alessandro Michele)는 이번 쇼의 모티프가 미국의 페미니즘 사상가 도나 해러웨이(D. J. Haraway)가 1985년 발표한 ‘사이보그 선언문’이라고 밝혔다.

이미지- 구찌 페이스북

미켈레가 “남성과 여성, 정신과 물질, 자연과 문화 등의 경계가 모호해진 시대에 타고난 정체성이 아니라 우리 스스로가 되고 싶은 것을 결정해야 한다”고 기획 의도를 밝혔듯, 사이보그 선언문에서는 기술적 혼합을 통해 동물과 사람, 여자와 남자, 인간과 기계 등의 이분법을 넘어선 하이브리드적 존재를 이야기한다. 그럼으로써 차별의 구실이었던 생물학 법칙을 넘어선 존재의 가능성을 말하는 것이 골자였다. 그래서 하이브리드적 존재는 기존의 이분법이 익숙한 사람일수록 기괴함과 불편함을 느낄 수밖에 없다.

구찌 수술실 패션쇼에서 단연 눈에 띄는 하이브리드적 요소는 영화사 로고나, 미국 메이저 리그 야구팀의 이니셜 등 일반 문화 코드보다도 ‘전통적으로 불쾌함을 유발하는 코드’들이다. 잘린 목은 물론 테러리스트들이 자주 쓰는 복면, 불길한 동물의 상징인 용과 뱀, 이단적 코드인 제3의 눈 등이 패션을 통해 짜깁기 되었다.

이미지- Saint Orlan 홈페이지

이런 점에서 구찌 패션쇼의 하이브리드는 하이테크놀로지와 구별된다. 다른 명품 브랜드의 패션쇼와 비교해보면 명확해진다. 드론을 등장시킨 돌체 앤 가바나 패션쇼와 로봇을 등장시킨 필립플레인 패션쇼에서는 기술의 발전 자체를 옮겨왔다. 하지만 구찌 쇼는 기술이 구현하는 ‘하이브리드 상태’를 옮겨 왔다. 도나 해러웨이와 동시대에 활약한 프랑스의 성형수술 퍼포먼스 작가 생트 오를랑(Saint Orlan)이 성형기술로 ‘예쁘게’ 만들지 않고, 뿔 모양을 자신의 얼굴에 ‘혼합’했듯이.

 

구찌 수술실 런웨이, 관객을 ‘모독’하다

이러한 하이브리드적 요소는 ‘모독’의 경험을 선사한다. 실제로 많은 사람들이 구찌 패션쇼가 ‘모독적’이라며 비난을 가했다. 일반적으로 패션은 청결과 체온유지 등의 1차적 기능을 넘어 소속이나 의례, 개성을 표현하는 2차적 기능까지 포함한다. 하이패션이 패션의 2차적 기능을 극대화했다면, 구찌 수술실 패션쇼는 ‘예술 경험’이라는 3차적 기능까지 발굴해 냈다.

Via ‘biz99’

구찌 수술실 패션쇼에서 편하게 앉아 감상할 준비를 하다가 당혹감에 빠진 유명 패션인사들은 마치 부조리극을 보는 관객들 같다. 특히 피터 한트케(Peter Handke)의 언어 부조리극 <관객모독>을 떠올리게 한다. 연극 <관객모독>은 사건, 플롯, 대사와 행위의 일치 등 전통적 연극의 요소들을 뒤섞어 언어 자체에 초점을 맞춘다. “우리는 여러분께 아무런 사건도 연기하지 않습니다”, “여러분은 구경합니다”라는 대사, 심지어 관객들에게 거칠게 퍼붓는 욕설 등이 그것이다. 구찌 수술실 패션쇼 역시 “우리는 여러분께 미적 편안함을 연출하지 않습니다” “여러분은 구경합니다”라고 말하는 듯하다. 파워 워킹 대신 조금 불안정하게 걷는 모델들도 흡사 배우들 같다.

하이패션은 비록 일반인이 이해를 못 하더라도 미/추의 잣대 안에 있었지만, 보는 이의 평가의 지위를 박탈하는 ‘모독’은 없었다. 물론 구찌 패션쇼는 온전히 모독적이고 전위적이지는 않다. 백인 모델이 대부분인 데다 깡마르고 키 큰 체형 일색이었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불쾌함이 아름다움과 위화감 없이 결합된 경지를 보여줬다. 다시 말해 구찌 수술실 패션쇼는 패션이 물리적 봉제선을 없애는 것을 넘어, 문화적 봉제선을 없앨 수 있음을 보여줬다.

기리보이 '인체의 신비' 세로라이브 스틸컷(좌), 헤이즈 'MIANHAE' MV 스틸컷(우)

패션이 문화를 선도하는 하나의 축인 만큼, 구찌의 수술실 패션쇼 코드는 널리 퍼질 것이다. 이미 수술실 모티프는 뮤지션 헤이즈와 기리보이의 뮤직비디오에서도 볼 수 있다.

 

Writer

지리멸렬하게 써 왔고, 쓰고 싶습니다. 특히 지리멸렬한 이미지들에 대해 쓰고 싶습니다. 사진이나 미술 비평처럼 각 잡고 찍어낸 것이 아닌, 그 각이 잘라낸 이미지들에 대해. 어릴 적 앨범에 붙이기 전 오려냈던 현상 필름 자투리, 인스타그램 사진 편집 프레임이 잘라내는 변두리들과 같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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