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타임> 지가 선정한 ‘인류 역사상 가장 영향력 있는 사진 100선’에 낯익은 사진 한 장을 볼 수 있다. 미국의 기념관이나 공원, 군부대 같은 장소에서 동상이나 기록물로 흔하게 존재하는 사진으로, 1945년 2월 태평양전쟁이 끝나갈 무렵의 이오지마(硫黄島) 전투에서 스리바치산 정상에 6명의 미군 병사가 성조기를 꽂는 장면이다. 이 사진을 찍은 종군기자 조 로젠탈(Joe Rosenthal)은 퓰리처상을 수상하였고, 작품은 태평양전쟁을 상징적으로 묘사한 대표적 사진으로 남았다.

일본의 화산섬 이오지마. 좌측 끝에 둥글게 솟은 산이 스리바치산이다

화산에서 분화한 유황 재로 뒤덮인 조그마한 화산섬 이오지마를 뺏고 지키기 위한 35일간의 전투는 치열했다. 미군 쪽은 전사자 6,821명을 포함한 2만 9천여 명의 사상자가 발생했고, 일본군은 200여 명만 투항한 채 2만여 명이 전사했다. 총 5만여 명의 사상자를 낸 이오지마 전투는 ‘죽기 전에 꼭 알아야 할 세계역사 1001’ 중 하나로도 꼽힌다. 미군의 점령으로 전투가 끝난 뒤에도 많은 에피소드와 논란이 있었다. 많은 사상자를 낸 전투 방식, 일본군 사령관의 지략, 성조기 게양 사진의 진위 문제 같은 많은 논란거리는 종종 영화와 드라마의 소재로 쓰였다.

그중 클린트 이스트우드 감독은 독특하게 미군과 일본군의 관점으로 영화를 각각 제작하여 화제가 되었다. 영화 한 편으로는 양쪽의 관점을 동시에 담아내기 어렵다고 판단한 것이다. 결국 영화는 워너브라더스와 드림웍스가 제작 투자를 하고, 같은 시기에 나눠 촬영함으로써 두 편의 영화가 된다. 미군의 관점에서 풀어낸 이야기가 <아버지의 깃발>이고, 일본군의 관점에서 풀어낸 이야기가 <이오지마에서 온 편지>이다.

 

<아버지의 깃발>

Flags of Our Fathers | 2006 | 감독 클린트 이스트우드 | 출연 라이언 필립, 제시 브래포드, 아담 비치

스리바치산 정상에 성조기를 게양했다고 알려진 6명의 미군 중 1명의 아들인 제임스 브래들리가 전투에 참여한 군인들과의 인터뷰를 통해 쓴 동명의 책을 원작으로 했다. 현장감 넘치는 전투 장면과 6명 중 살아남은 3명이 전쟁자금 조달을 독려하기 위한 미국 정부행사에 동원되는 장면을 대비하며 전쟁과 영웅의 허상을 고발한다.

전투에서 생존한 아메리칸 인디언 출신 헤이스가 미국 사회에 적응하지 못하고 인디언 보호구역에서 가난한 농부로 살며 관광객들에 1달러를 받고 기념사진을 찍어주는 장면은 미국 사회의 부조리와 전쟁 영웅 신화의 허상을 상징적으로 보여준다. 흥행 성적은 기대에 미치지 않았고 아카데미 수상도 놓쳤으나, 역설적으로 일본 아카데미상 최우수 외국작품상을 수상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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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오지마에서 온 편지>

Letter from Iwo Jima | 2006 | 감독 클린트 이스트우드 | 출연 와타나베 켄, 니노미야 카즈나리, 이하라 츠요시, 카세 료

전투에서 최후를 마친 일본군 사령관 타다미치 쿠라바야시 중장의 실제 그림편지를 주요 소재로, 그의 인간적 모습과 탁월한 전략을 편지 형식으로 잔잔하게 풀어낸다. 하버드대학 출신이며 몇 편의 소설을 쓰기도 한 쿠리바야시 중장은 당시 맹목적인 일본 장군들과는 다른 세밀한 전략으로 전쟁에 임했다. 해안선 수비를 포기하고 땅굴과 참호를 이용한 게릴라 전술로 미군에 큰 피해를 입혔다. 하지만 현재까지도 만여 명의 일본군 시신이 실종 상태이고, 그도 그중 한 명이다.

일본인의 시각을 담기 위해 원래는 연출을 구로사와 아키라 감독에게 맡기려고 했으나 이루어지지 않았고, 대신 일본의 유명배우인 와타나베 켄 외 모든 일본군 역할의 배우를 일본인으로 공개 캐스팅하였다. <아버지의 깃발>보다 2개월 늦게 영어 자막으로 개봉했음에도 좋은 흥행 성적을 기록하였다. 2007년 아카데미 시상식 최고음향상과 골든글로브 외국작품상을 거머쥐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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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감독이 하나의 사건을 각각 다른 시각으로 다룬 두 편의 영화를 만드는 사례는 흔치 않다. 두 편 모두 반전 메시지를 담고 있고, 전투 신보다는 전투에 내던져진 개인의 심리묘사가 주를 이룬다. 전쟁과 영웅, 정치와 매스컴의 허상을 향해 냉소하는 클린트 이스트우드다운 영화다. 이왕 볼 거라면 시간을 내 두 편을 함께 보라고 권하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