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버자이너 모놀로그(The Vagina Monologues)>

뉴욕 오프 브로드웨이 무대에서 1996년 초연하여 20년이 지난 현재까지도 페미니즘 연극의 고전으로 상영되고 있는 <버자이너 모놀로그>를 한국말로 번역하면 ‘보지의 독백’이다. 파격적인 제목으로 우선 주목을 끄는 이 작품은 극작가이자 페미니스트인 이브 앤슬러(Eve Ensler)가 직접 다양한 연령대와 직업을 가진 200명의 여성을 상대로 인터뷰한 내용을 바탕으로 쓰여졌으며, 연극 대본이지만 책 자체로도 충분한 가치를 지닌다.

Vagina Monologues: VDAY Prague International Voice 2012

여성의 성에 대해 당당하게 이야기하며 그에 대한 억압과 차별 역시도 자연스럽게 풀어내는 이 책을 읽다 보면, 남근숭배 사상이라는 말이 있을 정도로 남성의 생식기가 숭배되는 동안, 그 한켠에서 여성의 성기가 끊임없이 수난당해온 역사를 자연스럽게 알게 된다. 예컨대 클리토리스는 인체의 모든 기관 중에서 유일하게 오로지 여성의 오르가즘만을 위하여 존재한다.

만약 남성에게 그러한 기관이 있었더라면, 남성의 성적 우월성을 증명하는 용도로 활용되었을 법한 클리토리스는, 1593년 당시 마녀재판에서 ‘악마의 젖꼭지’라고 불리며 마녀로 판결되어지는 유죄 증거로 사용되어 가난하고 사회적으로 신분이 낮은 여성들을 처형하여 종교적인 질서를 유지하는 도구로 이용되었다. 또한, 미국에서조차도 1948년까지 여성의 자위행위를 막기 위하여 병원에서 클리토리스 절제 수술이 이루어졌으며, 여전히 전통이라는 미명하에 아프리카와 중동 등 28개국에서 어린 소녀들의 생명을 앗아가기도 하는 여성할례가 자행된다.

 

<남자가 월경을 한다면(Outrageous acts and everyday rebellions)>

또한, 여성의 ‘생리’를 부적절한 어떤 것으로 교육하여 여성들로 하여금 자신이 생리를 한다는 사실을 수치스럽게 만들고 숨겨야 하는 무언가로 만든 지금의 현실과는 달리, 일찍이 1세대 페미니스트 글로리아 스타이넘(Gloria Steinem)이 쓴 명민한 저서 <남자가 월경을 한다면>에서 묘사했듯, 만약 남성들이 생리를 했더라면 생리는 그 자체로 숭배되어 온 사회가 함께 만들어가는 생리 축제 및 정부 차원에서의 생리대 무상 지급 등의 특혜가 자연스레 이루어졌으리라 짐작되기도 한다.

작년 2017년 8월 국산 생리대에서 다량의 유해물질이 검출되어 환불 등의 조치가 이루어진 ‘생리대 파동’ 이후, 반품 및 환불 조치된 생리대들이 스리슬쩍 재판매 되기 시작한 작금의 현실을 생각해보면, 전 세계 인구의 절반인 여성들이 매번 한 달에 한 번씩, 한 주 남짓 동안 생리를 함에도, 생리대의 안전에 대한 조치가 이토록 하찮게 취급되는 것은 역시 현재까지도 생리를 드러내지 말아야 하는 무언가로 취급하는 전반적인 사회의 인식 때문이 크다고 생각되어진다.

물론 나 역시도, 대학 시절 처음 여성사를 교양 수업으로 들으면서 소위 ‘페미니스트’라고 불리는 사람들이 생리대를 그토록 노골적으로 드러내는 것에 대해 민망하다고 생각했지만, 생각해보면 생리라는 것이 애초에 왜 감춰지고 지워져야 하는 존재가 된 것인지, 이에 대해 정확하게 대답할 수 있는 사람이 있을지 의문이 든다. 그저 우리는 정확한 이유도 모른 채 ‘생리’라는 단어조차도 ‘그 날’이라는 말로 에둘러 표현하며 감추고 살도록 강요받아왔다.

 

<우리의 20세기(20th Century Women)>

그래서 2017년에 국내 개봉한 마이크 밀스(Mike Mills) 감독의 영화 <우리의 20세기>에서 주인공 소년 ‘제이미(루카스 제이드 주만)’게 페미니즘 서적을 건네 주는 등 조언자 역할을 하는 '애비(그레타 거윅)'가 여러 사람들이 모인 저녁 식사 자리에서 “생리가 뭐 어때서요? 자, 다 같이 자연스럽게 말해봐요”라고 말하며 “생리”라는 단어를 연발하는 장면은 일말의 통쾌함을 불러일으킨다.

 

한편 영화 <우리의 20세기>의 시대적 배경인 1979년은 1세대 페미니즘 미술가였던 주디 시카고(Judy Chicago)가 대표작 <디너 파티(The Dinner Party)>를 세상에 선보였던 시기와도 맞물린다.

디너 파티(The Dinner Party, 1974-1979)

미술사를 공부하다 보면 책에서 다루는 대부분의 중요한 미술가들은 남성 작가이고, 상대적으로 여성 작가들의 수는 매우 적으며, 대부분의 여성들은 ‘뮤즈’로 대상화되는 현상을 발견할 수 있다. 그러한 서양 미술사조에 대항하여, 주디 시카고는 1970년 프레스노 주립대학에서 최초로 페미니즘 미술 프로그램을 개설하기도 한 작가로, 1974년부터 ‘여성의 역사’라는 주제로 신화적/역사적/예술적 발자취를 남긴 여성들을 기리기 위한 대형 설치미술 작업 <디너 파티>를 400명의 여성과 공동 제작 및 총괄하였다. 5년의 제작 기간을 거쳐 1979년에 완성된 이 작품은 샌프란시스코 현대미술관에서 처음 전시된 이후 6개국에서 16회 동안 전시되어 백만 명 이상의 관객을 동원하는 둥 많은 논란과 주목을 이끌어냈다.

종교적인 이미지를 느끼게 하는 정삼각형 형태의 대형 식탁 위에는 총 39명의 위대한 여성들이 상상의 만찬을 즐길 수 있도록 39벌의 식기 세트가 차려져 있으며, 각각의 개성에 맞게 제각기 다른 디자인의 접시와 잔, 식탁보로 구성되어 있다. 무엇보다도 여성의 음부와 자궁의 이미지를 형상화한 접시의 모양이 논란을 일으켰는데, 이는 “가부장적 제도 아래에서 멸시당해온 여성의 몸에 대한 권리를 그 주인에게 돌려주기 위한 의지의 표현”이었다고 한다.

또한, <디너 파티>의 식탁을 꾸민 식탁보에는 섬세한 자수가 놓여있으며, 각각의 접시들 역시도 하나의 도자 작품인데, 이는 남성 위주의 미술사조 때문에 주류 미술계에 진입할 수 없었던 여성들이 차선으로 선택했던 생활에서의 공예를 하나의 예술 작품으로 승격시키기 위한 의도적인 선택이었다.

정삼각형 형태의 식탁 제1면에는 선사시대부터 로마제국 시절까지, 제2면에는 기독교 태동기부터 종교 개혁기까지, 제3면에는 미국 건국기부터 여성운동기까지, 각각의 면에 기념비적인 여성 인물들이 13명씩 배치되어, 총 39명으로 구성된 위대한 여성들의 상상의 만찬이 완성된다. 여기에서는 그중에서도 눈에 띄는 몇몇 여성 예술가들의 테이블을 살펴보겠다.

아르테미시아 젠틸레스키(Artemisia Gentileschi)
<홀로페르네스의 목을 베는 유디트(Judith Beheading Holofernes, 1614-1620)>

아르테미시아 젠틸렌스키는 16세기 이탈리아 바로크 시대를 대표하는 여성 화가로 카라바조의 영향을 받아 강렬한 빛의 대비와 어두운 색조를 활용한 힘 있는 화풍으로 주목받았으며, 기존의 여성 화가들이 그릴 수 없도록 제한되었던 성경과 신화의 주인공들을 그림의 주제로 삼았다. 특히, 구약성서에서 적진의 장군이었던 홀로페르네스와 동침하고 그의 목을 베어 이스라엘을 구했던 여성 호걸 유디트(Judith)를 그린 그림이 그의 대표작인데, 이는 그의 나이 열일곱 살 때 아버지의 동료 화가이자 그의 스승이기도 했던 아고스티노 타시(Agostino Tassi)에게 강간당하여 길고 고통스러운 재판을 치러야 했던 젠틸렌스키의 개인사와도 연관이 있다. 다른 남성 화가들이 성적 대상으로써 유디트를 그린 것과 달리 그의 그림 속 유디트는 냉정하면서도 힘 있게 칼을 휘둘러 자신의 나라를 구한 영웅으로 묘사되었으며, 적진의 장군에 대한 맹렬한 분노는 화가 자신의 감정이 투영된 것으로 해석되기도 한다.

 

버지니아 울프(Virginia Woolf)
<자기만의 방(A Room of One’s Own)>

버지니아 울프는 19세기 빅토리아시기 영국의 대표적인 여성 소설가이자 비평가로, 어린 시절부터 철학자이자 비평가였던 아버지의 교육과 엘리트 지식인들로 구성되었던 ‘블룸즈베리 그룹’에서의 활동을 통해 살아생전 이미 당대 최고의 작가로 인정받게 되었다. 특히, 인간의 내부 심리를 탐구하는 ‘의식의 흐름’ 기법을 통하여 실험적 모더니스트로 명성을 얻은 이후 말년인 47세에 발표한 <자기만의 방(A Room of One’s Own)>은 현재까지도 페미니즘 에세이의 고전으로 손꼽히며, 책의 내용 중 ‘인간은 남성적 여성이거나 여성적 남성이어야 합니다’라고 주장하거나 ‘500파운드와 자기만의 방’을 가짐으로써 여성들이 자신의 예술적 창조성과 자기 주체성을 이어나갈 것을 당부하는 내용은 백 년이 지난 현재 시점에도 유효한 메시지로 작용한다.

 

조지아 오키프(Georgia O'Keeffe)
<Black Iris>(1926)

조지아 오키프는 20세기 미국의 대표적인 여성 화가로 당시 서유럽에서 유행했던 모더니즘 경향과 관계없는 자신만의 독창적인 추상주의 그림들을 그려내어 주목받았다. 사회주의적이고 현대적인 주제만을 다루어야 한다고 여기던 그 당시의 남성 화가들과 달리 우리 주변에서 쉽게 볼 수 있는 ‘예쁜 꽃’을 그린다는 이유로 초기에는 무시당하기도 했지만, 거대하게 클로즈업된 꽃들은 얼핏 봐서는 꽃이라고 눈치채지 못할 만큼 추상적인 형태라 계속 바라보다 보면 하나의 소우주를 보는 듯한 느낌을 주기도 한다.

아이러니하게도 오랜 시간 동안 이러한 오키프의 꽃 그림들은 남성 평론가들의 일방적인 주장에 의하여 에로틱적인 관점에서 ‘여성의 성기’를 의미한다고 해석되기도 했는데, 오키프 자신은 그러한 시각을 강하게 부정하며 "대부분의 도시인들은 너무나 바빠서 꽃을 볼 시간조차 없다"고 말하며 일상적으로 쉽게 볼 수 있는 꽃을 사람들이 오랜 시간 동안 관찰하게 만들어 새로운 시각을 얻도록 만드는 것에 집중하였다.

이렇듯 다양한 여성들의 이야기를 내포하고 있는 <디너 파티>는 2007년 이래로 현재까지 뉴욕의 브루클린 미술관에서 상설전으로 전시되고 있다.

 

<브이데이(V-Day)>

다시, 앞서 언급한 연극 <버자이너 모놀로그>가 성황리에 공연된 이후, 이브 앤슬러는 순회공연을 다니며 공연 때마다 친척과 연인, 낯선 남성들에게 폭력을 당하고 살아남은 셀 수 없이 많은 여성들의 목소리를 듣게 되었고, 연극을 통해서 그러한 폭력들을 이야기 하는 데만 그치지 않고, 실질적으로 모든 종류의 폭력을 근절시키기 위해서 1998년 '브이데이(V-Day)라는 여성운동을 시작한다.

What is V-Day?

브이데이 단체는 <버자이너 모놀로그> 대규모 자선공연을 통해 기금을 마련하여, 미국뿐만 아니라 전 세계 119개 국가에서 성공적으로 활동해 온 여성운동으로 모임 조직, 영화 제작, 캠페인 홍보 등에 그치지 않고 케냐, 이라크, 아이티, 콩고 등에 여성할례 시술을 피해 집을 나온 소녀들을 위한 쉼터를 여는 등 다양한 활동을 이어갔다.

또한, 미국의 캠퍼스 내에서는 스타벅스와 브이데이 활동 단체의 숫자가 동등하다는 말이 있을 정도로 활발히 활동하는 대규모의 여성운동 단체임에도, 국내에서는 잘 알려지지 않은 것이 의아하여 자료를 찾아보니 연극 <버자이너 모놀로그>가 한국에 들어온 시점에 이러한 브이데이 운동 역시 함께 명맥을 이어가려고 했으나, 생각보다 진행이 잘 되지 않았다는 내용이 존재했다.

앞서 2015년 한국에서 트위터 등 SNS에서 활발하게 진행됐던 ‘#OO계_내_성폭력’ 해시태그 운동이 있었음에도, 2017년 들어 미국 할리우드에서 하비 와인스타인의 성추문 사태에 따른 ‘#미투(Me too)’ 해시태그 운동이 주목을 얻고 나서야, 안태근 전 법무부 검찰국장과 노벨상 후보로 거론되어왔던 고은 시인, 극단 연희단거리패의 이윤택 전 예술감독 등이 역으로 영향을 받아 가해자로 수면 위에 떠오른 걸 보면 유교 사상이 바탕이 된 한국의 가부장적 사회 체제가 얼마나 공고하며, 부당한지 오히려 더욱 실감하게 된다.

물론 일련의 사적 폭로에만 의지한 여성운동이 바람직하다고만은 볼 수 없다. 폭로를 시작한 피해 여성들은 그 자신이 ‘완전무결한 피해자’여야 함을 요구받는 한편, 한국에는 아직까지 ‘사실적시에 의한 명예훼손’이라는 법이 존재하여, 피해자들이 실제로 존재했던 사실을 말하는 것만으로도 법적 공방을 각오해야 하기 때문이다. 게다가 폭로의 과정에서 몇몇 발언들은 허위 사실인 것으로 밝혀지기도 하여 혼란을 불러일으키기도 했다. 하지만 다른 모든 사회운동이 그렇듯 여성운동 역시 ‘사람이 하는 일’이기 때문에 완벽할 수만은 없다. 여성운동에만 지나치게 엄격한 잣대를 들이대는 사람들의 편견 역시도 여성혐오적인 시각은 아닌지 예민하게 지켜볼 필요가 있어 보이며, 이러한 흐름이 단순히 일시적인 이슈로만 끝나서는 안 되며, 반드시 법적 제도 개선을 통하여 사회 시스템을 고쳐나가야 할 필요성을 느낀다.

 

<비포 선셋(Before Sunset)>

여행지에서 만난 낯선 남녀가 사랑에 빠진다는 내용으로 많은 사람들의 꿈이 된 로맨스 영화 <비포 선라이즈>(1995) 이후 9년 만에 나온 후속작 <비포 선셋>(2004)에서조차 주인공 ‘셀린(줄리 델피)’과 ‘제시(에단 호크)’의 기나긴 즐거운 대화 중에 셀린이 문득 생각난 듯이 “얼마 전에 어릴 때 기억이 착각임을 깨달았어. 8살 때쯤 엄마가 항상 밤길을 조심하라고 얘기했어. 무서운 아저씨가 사탕을 주며 나쁜 짓을 할지도 모른다고. 그 말을 하도 들어서 실제로 당한 거로 착각했어.”라고 얘기한다. 2004년 무렵의 영화 속에서 두 주인공이 가볍게 웃으며 이야기 한 그 장면이, 문득 현재 시점에서 되돌아보니 어쩐지 가슴에 차갑게 내려앉는 듯한 감각이 들 정도로, 여성의 삶에 자연스럽게 녹아 들어있는 가부장제 하에서의 폭력이 얼마나 집요하며 일상적인지 실감하는 요즘이다.

현재의 전세계적인 페미니즘 물결을 따라 더욱 많은 여성들의 ‘보지의 독백’이 터져나와 삐뚤어진 남성관을 주입받으며 고통받아온 남성들 역시도 함께 구할 수 있길, 성별을 뛰어넘어 모두가 동등한 인간으로서 상대방을 존중할 수 있게 되길, 용기 있는 여성들의 목소리에만 의지하여 부당한 상황들이 바뀌길 바랄 것이 아니라 문체부에서 현재 검토 중이라는 ‘원 스트라이크 아웃’ 방식 등의 제도적인 개선들이 조속히 이루어지길, 간절히 바래본다.

 

Writer

서울에서 살아가는 생활인이자, 하고 싶은 이야기들을 노래로 지어 부르고, 여기가 아닌 어딘가 다른 낯선 세상을 바라보며 사진을 찍는 작업자. 다른 사람들의 작업을 보고, 듣고, 이야기하는 것을 좋아한다. '유유'는 한자로 있을 '유'를 두 번 써서 '존재하기에 존재한다'는 뜻으로 멋대로 사용 중. 2018년 9월부터 그동안 병행 해오던 밴드 '유레루나' 활동을 중단하고, 솔로 작업에 더 집중하여 지속적인 결과물들을 쌓아나가고자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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