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후 4~5시 즈음이 되면 서점 앞에는 한바탕 음악 소리가 들린다. 휴대용 카세트를 들고 다니시는 할머니가 가게 앞을 지나가기 때문이다. 노래를 어찌나 크게 들으시는지 온 동네가 쩌렁쩌렁 울리는 것 같다. 고속도로 뽕짝 음악이나 흘러간 옛 가요를 들을 때도 있지만, 대체로는 한이 서린 목소리를 가진 여가수 노래가 흘러나온다. 문득 ‘저 노래는 어떤 곡이고 어떤 사연이 담겨있을까?’ 궁금해 견딜 수가 없다. 할머니의 음악 이야기를 듣고 싶어서 벼르고 있다가 언젠가 먼저 말을 건넸다. 

 “안녕하세요, 할머니. 노래를 좋아하시나 봐요.”
“응. 오며 가며 지루해도 이거 있으니께 좀 낫지.”
“지금 나오는 건 누구 노래예요?”
“몰러. 오래된 노래여. 나 처녀 때부터 들었으니까. 뭐 누구나 마나 부르던 이는 죽었겠지.”
“아이고. 슬프시겠네.”
“슬프긴 뭐가 슬퍼. 나도 곧 죽을 텐데.” 

한 해가 저문다. 저문다는 생각을 하면 그 날의 풍경이 종종 떠오른다. 노래를 남긴 이는 떠났고, 노래를 듣던 할머니와 이 글을 쓰는 나도, 내 글을 읽고 있는 누군가의 한 해도 이렇게 저물어가고 있다. 저물어 가는 삶과 음악, 오늘은 그 이야기를 해볼까 한다.

 

<녹턴>

가즈오 이시구로 ❙ 김남주 옮김 ❙ 민음사 ❙ 2010.11.12

단편집 <녹턴>에 수록된 첫 번째 단편 <크루너>. 이탈리아 베니스의 산마르코 광장에서 기타를 연주하는 떠돌이 연주가 ‘야네크’는 관객석에 앉아있는 노년의 신사를 보고 깜짝 놀란다. 신사는 야네크의 어머니가 어린 시절부터 열렬히 사모하던 토니 가드너였다. 검고 빛나던 머리카락은 백발로 변해 있었지만 말끔한 외모는 여전했다. 미국의 전설적인 가수인 토니 가드너를 눈앞에서 본 것만으로도 살 떨리는 일인데 이 남자, 야네크에게 노래를 연주해 달라고 제안한다. 그것도 자신의 부인을 위해 준비한 특별 세레나데를. 

▲ Chet Baker ‘I Fall in Love Too Easily’. 소설에서 토니 가드너가 준비한 세레나데의 첫 곡. 부인과 처음 사랑에 빠지는 순간을 함께 했던 노래라며, 노래에 담긴 사연을 야네크에게 이야기한다.

어렸을 때부터 레코드판에서만 보던 전설 같은 존재인 토니 가드너. 그의 부탁에 야네크는 흥분을 감추지 못하지만, 정작 토니 가드너는 스스로를 한물간 딴따라로 치부한다. 야네크는 세레나데를 준비하며 토니 가드너와 많은 이야기를 나누고, 그가 준비한 낭만적인 세레나데 속에 숨겨져 있던, 생각지도 못한 사연에 혼란을 느낀다. 한때 명성을 날렸던 60대 가수. 그의 인생은 화려하게 빛을 내던 쨍한 낮을 지나 석양의 지점으로 향하고 있다. 저무는 삶을 어떻게 그려갈지에 대한 토니 가드너의 결단에 야네크가 얼마나 공감했는지는 모르겠다. 하지만 그것과는 상관없이 야네크의 가슴 속에 토니 가드너는 영원히 위대한 가수로 남아있다.  

▲ Glen Campbell ‘By The Time I Get To Phoenix’. 토니 가드너가 전성기 시절에 불렀던 노래. 그의 광팬이던 야네크의 어머니는 영상 속 글렌 캠벨(Glen Campbell)보다 토니 가드너의 버전이 훨씬 좋다고 추앙했다.

다섯 편의 단편 소설을 묶은 <녹턴>은 부제가 ‘음악과 황혼에 대한 다섯 가지 이야기’다. 말 그대로 이탈리아, 영국, 스페인 등 여기저기를 떠돌며 연주하는 떠돌이 음악가과 한때 음악가가 되고 싶었던 사람들, 무명 음악가 등의 사랑과 세월을 다룬 책이다. 저자 가즈오 이시구로는 젊은 시절 싱어송라이터를 꿈꾸었을 만큼 음악에 조예가 깊다고 알려져 있다. 그의 소설에는 멋을 한껏 부린 문장도, 과격한 이야기 진행도 찾아보기 힘들다. 밋밋하고 심드렁한 문체로 힘 있는 이야기를 만들 줄 안다. 소설은 성공 궤도에서 조금씩은 비껴 나가 있지만, 음악을 사랑하는 (혹은 사랑했던) 사람들의 일상적인 듯 일상적이지 않은 에피소드들을 통해 젊은 시절을 지나 중년 혹은 노년으로 향하는 사람들의 삶을 조명한다. 책 속에는 실제 뮤지션과 그들의 음악이 자주 언급되는데, 주석이 거의 없으니 직접 찾아 듣는다면 소설 속 이야기가 훨씬 풍성하게 읽힐 것이다.

 

<내 기타는 잠들지 않는다>

신중현 ❙ 해토 ❙ 2006.06.25

살아있는 뮤지션의 역사를 쓴 책은 생각보다 많지 않다. 뮤지션의 생각을 엮은 수필집이 아닌 본인의 음악인생을 통틀어 이야기하는 자서전 말이다. 대개는 그가 죽은 뒤에야 누군가가 그의 생전 원고를 긁어모아 유고집을 내거나 혹은 타인의 시각으로 쓴 평전이 나온다. 다행히도, 여기 한국 록 음악 역사를 이야기할 때 빠지지 않는 존재의 자서전이 있다. <내 기타는 잠들지 않는다>는 신중현, 그가 자신의 삶을 돌아보며 집필한 자서전이다.

1938년생. 해방 이전에 태어나 일제강점기와 해방, 한국전쟁 같은 한국사의 굵직한 순간들을 몸소 겪고, 서슬 퍼런 독재의 칼날에도 굴복하지 않아 멀고 먼 길을 돌아와야 했던 신중현은 위대한 음악가 이전에 ‘살아있는 현대사’다. 그의 삶은 그야말로 영화 같다. ‘4층 건물 주인집 아들로 태어나 떵떵거리며 살다가 몰락하고, 이후 부모를 여의고 남의 집을 전전하다가 노동자로 일하고, 음악가로 활동하다가 온갖 제약에 쓰러지고 마침내 전설이 되다.’ 이렇게 한 문장으로 축약해도 드라마틱한 삶의 흐름이 그려지는데, 여기에 덧붙여 어릴 적 대나무와 전화선 철사를 이용해 자기 손으로 첫 기타를 만들고 여기저기서 부속품들을 긁어모아 라디오를 만들어 듣던 천재, 미8군 무대를 점령한 작고 어린 동양 남자, 권력의 압박에도 굴하지 않는 우직한 뮤지션 같은 소스까지 버무려진 일대기를 읽다 보면 ‘열정’과 ‘패기’ 같은 뻔한 단어들의 의미가 생생하게 와 닿는다. 

▲ <히키-申 기타 멜로듸 輕音樂 選曲集 (마스터피스골드시리즈)> 신중현이 미8군에서 유명한 꼬마 기타리스트로 이름을 날리던 시절, 동요를 재즈와 로큰롤 등의 장르로 편곡해 발매한 연주 앨범. 당시 그의 활동명은 히키신이었다.

책에는 암울한 시대의 한국 사회상 속에서 악착같이 살아남아야 했던, 그러면서도 음악만은 놓지 않았던 지난날부터 컴퓨터로 음악 작업을 시작한 노년기의 음악 여정까지 솔직하고 세세하게 기록되어 있다. 1950년대 이후 한국 사회의 모습도 생생하게 만날 수 있으며 또한 연주자, 가수, 작곡가 등 방대한 활동을 했던 그의 연도별 음반을 직접 정리한 목록도 볼 수 있다.  

▲ 신중현 ‘아름다운 강산’. 1971년 박정희 정권 시절, 대통령 찬가를 만들라는 청와대의 요청을 단호히 거절하고 발표한 노래.
▲ 신중현 ‘나그네’. 신중현은 김삿갓(1807~1863)의 시에 곡을 붙여 <김삿갓>(1997)을 발매했다. 그가 컴퓨터로 작업한 첫 번째 앨범이기도 하다.

2006년 공식적인 은퇴 무대를 가졌지만, 이후에 몇 차례 무대에 오르기도 했으며 지난 10월에는 버클리 음대 명예박사 학위를 받았다. 그의 나이는 올해로 78세. 생물학적으로는 많은 나이지만 책의 제목처럼 그의 기타는 아직 잠들지 않았다. 부고를 받아보기 전에 꼭 한 번 무대 위에 선 그의 모습을 보고 싶다. 

▲ 2013년 8월, 아들들과 함께한 가장 최근의 공연 모습. 그저 살아있음에 감사하다.

 

새해를 맞이하는 기쁨보다 한 해를 보내는 슬픔이 커지면 나이를 먹은 것이라고 했던가. 그렇다면 나도 나이를 먹었나 보다. 2016년에는 데이빗 보위(David Bowie), 프린스(Prince), 레너드 코헨(Leonard Cohen), 조덕환 같은 굵직한 음악 인생을 살아온 뮤지션들이 생을 마감했다. 해를 거듭할수록 우리의 삶을 점철했던 뮤지션들의 죽음을 마주하는 일이 늘어날 생각하니 새해가 달갑지만은 않지만, 피할 수 없는 일이라면 즐겨야지. 새해에는 아직 우리 곁에 존재하지만 언젠가 사라질 별들이 저물어 가는 과정을 제대로 들여다봐야겠다. 아름답던 별들은 저물어가는 모습도 아름다울 것이라고 조금은 기대하면서.

 

Writer

오래된 정경들이 넘치는 동네에서 작은 음악 서점인 ‘초원서점’을 운영한다. 방송작가, 스크립터, 콘텐츠 기획 등을 거쳐 공연 카페에 오래 머물렀다. 올해 5월 연 초원서점에서 음악과 닿아 있는 서적들을 판매하며 책, 음악과 관련한 행사들을 기획, 진행한다. 가사가 아름다운 한국 음악들을 특히 좋아한다.

초원서점
주소 서울 마포구 염리동 488-15 1층
인스타그램
페이스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