흔히 ‘영화 같다’는 수식을 현실에 덧댈 때 그 수사는 무엇을 ‘영화 같다’고 말하고 있을까. 우리가 발 딛고 있는 이 세계엔 흔치 않던 우연의 마법이 밥 먹듯이 발생하고, 동화 속에서 꿈꿀 법한 환상과 낭만이 점유하는 바로 그 시점. 우리는 그 시점을 ‘영화 같은 순간’이라 명명해 왔다. 그렇다면 영화는 여태껏 현실과 등진 이야기만을 해 왔던가.

꼭 그렇지만은 않다. ‘현실’과 ‘비현실’은 모두 영화를 이루는 질료였다. 그렇지 않다면 영화를 만드는 이들의 뛰어난 포착 능력과 예민한 시선에 무릎을 치던 나도 없었을 것이다. 더 과격하게는 영화에 빠져들기 힘들었을지도. 영화가 선사할 수 있는 환상성과 현실성, 그 극명한 온도 차는 로맨스의 본질과도 닮아있다. 마치 우리가 꿈꾸는 사랑의 회화들, 사랑의 시작 앞에 품는 막연한 기대들은 막상 현실이 되고 나면 마냥 핑크빛의 윤곽만 남기진 않는다는 걸 깨닫는 것처럼 말이다. 그 때문인지 영화 속 사랑에 관한 집요한 현실 세계의 묘사는 예리하게 우리의 감각을 건드리며 공감을 불러낸다.

<멋진 하루> 스틸컷

서로의 바닥까지 확인하거나, 대단치 않은 욕망에 흔들리거나. 지지부진한 사랑의 흔적은 도처에 깔려있다. 낭만의 찬가를 피한 로맨스 영화는 생각보다 많거니와 이 영화들은 아름다움을 비껴감으로써 비로소 빛나는 영화가 된 사례이기도 하다. 군더더기 없이 이상적인 사랑의 형태가 아닌, 저마다의 모양과 체취로 투박하게 존재하는 조금 다른 사랑 이야기들을 소개한다.

 

존 카사베츠 <별난 인연>(1971)

<별난 인연> 스틸컷

박물관 큐레이터 ‘미니’(지나 롤랜즈)는 유부남 남자친구에게서 이별을 통보받는다. 그녀는 콧수염에 포니테일을 늘어뜨린 우스꽝스러운 비주얼의 주차장 직원 ‘마스코위츠’(세이무어 카셀)를 만난다. 돌발적이고 낯선 행동을 일삼는 마스코위츠는 결여가 많은 사람이다. (결여를 드러내지 않아서) 완벽해 보이는 미니와 그는 도무지 어울릴 것 같지 않다. 달라도 너무 다른 두 사람이 빚어내는 이야기는 괴상하게 로맨틱하다. 과연 이 영화가 로맨스를 보여주고 있는지, <별난 인연>으로 카사베츠 영화에 입문했다면 의아할지도 모른다. 그러나 <별난 인연>은 주로 지리멸렬한 인간군상을 포착해 온 존 카사베츠의 영화들 가운데서도 가장 달콤하고도 아름다운 영화임을 밝혀둔다.

<별난 인연> 트레일러

 

이윤기 <멋진 하루>(2008)

<멋진 하루> 스틸컷

헤어진 남자친구 ‘병운’(하정우)으로부터 빌려준 350만 원을 돌려받기 위해 1년 만에 그를 찾아 나선 ‘희수’(전도연). 그녀는 서른을 훌쩍 넘긴 노처녀 백조다. 병운은 그녀와 헤어진 후로 결혼했고, 두 달 만에 이혼했다. 게다가 여러 가지 사업을 건드리다 빚을 지고 이제는 집 없는 떠돌이 신세가 됐다. 어제 사랑하던 사이일지언정 오늘 두 사람은 채무 관계이다. <멋진 하루>의 줄거리는 갚을 돈을 구하는 병운과 그를 따라 동행하는 희수의 하루 여정이 전부다. 빛만 청산되면 다시 남이 될 두 사람의 하루는 지켜보는 우리의 마음 이상한 구석 어딘가를 자꾸 건드린다.

영화 <멋진 하루> 예고편

 

샘 멘데스 <레볼루셔너리 로드>(2008)

<레볼루셔너리 로드> 스틸컷

‘에이프릴’(케이트 윈슬렛)과 ‘프랭크’(레오나르도 디카프리오)는 첫눈에 반해 행복한 가정을 이룬다. 교외의 ‘레볼루셔너리 로드’에 두 사람의 보금자리를 꾸리고 둘은 나아가 파리로의 이민을 꿈꾸며 살아간다. 새로운 삶에 들뜬 두 사람 앞에 프랭크의 승진 기회가 찾아오고, 의견이 엇갈린 이들의 싸움은 점차 지독해져 서로에게 지워지지 않을 상처를 남긴다. 우리 내면의 이상과 현실을 더듬으며 극단으로 치닫는 <레볼루셔너리 로드>의 현실 로맨스. 두 배우의 연기에 몰입해 숨이 차오르다 끝내는 적막 속에 놓이는 경험을 하게 될지도 모른다.

<레볼루셔너리 로드> 트레일러

 

에릭 로메르 <만월의 밤>(1984)

<만월의 밤> 스틸컷

에릭 로메르의 희극과 격언 6부작 중 한 작품. 인테리어 장식가 ‘루이즈’(파스칼 오지에)는 건축가인 연인 ‘레미’(체키 카료)와 파리 외곽의 마을에서 동거 중이다. 레미는 루이즈와 결혼하기를 원하지만 그녀는 독립적인 삶을 꿈꾸며 이를 거절한다. 루이즈는 파리에 혼자만의 공간을 마련해 자유로운 생활을 누릴 준비를 마쳤다. 그러나 그녀는 정작 홀로 방에 남겨지자 만날 사람을 찾아 전화를 돌린다. 에릭 로메르의 다른 작품들과 마찬가지로 어떤 모순점에 서 있는 인간의 심리를 섬세하게 그려내는 작품이다. 파티를 즐기지 못하는 레미와 그를 못마땅해하는 루이즈를 보여주는 극의 초반만 보더라도 그 탁월한 인간의 심리 묘사에 감탄하게 될 것이다.

<만월의 밤> 트레일러

 

신동일 <나의 친구, 그의 아내>(2008)

<나의 친구, 그의 아내> 스틸컷

요리사 ‘재문’(박희순)과 미용사 ‘지숙’(홍소희)은 신혼부부다. 재문의 친구 ‘예준’(장현성)은 미혼의 외환 딜러로, 두 사람의 든든한 지지자가 되어 준다. 지숙은 지나칠 정도로 각별한 둘의 우정이 때론 이해되지 않아도 언제나 두 사람을 위해주는 예준이 고맙다. 부부는 아들 ‘민혁’을 낳고 재문은 이 행복을 예준과 나누고 싶지만 직장에서 성공가도를 달리고 있는 예준은 이 전화가 성가시다. <나의 친구, 그의 아내>는 평범한 제목과는 달리, 선이 굵은 치정 소설을 읽는 듯한 강렬함을 남긴다. 매끄럽기보다는 플롯만큼이나 날 것 그대로의 명징한 표현이 두드러지는 작품이다. 계급 사회의 비극으로 읽힐 여지도 있는 이 영화는 세련되진 않지만 분명히 드물고도 새로운 한국 영화 중 하나다.

<나의 친구, 그의 아내> 유튜브 예고 영상 링크

 

메인 이미지 <만월의 밤> 스틸컷

 

Writer

예측 불가능하고 아이러니한 세상을 닮은 영화를 사랑한다. 우연이 이끄는 대로 지금에 도착한 필자가 납득하는 유일한 진리는 '영영 모를 삶'이라는 것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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