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세먼지가 상륙했다. 도심뿐 아니라 사진들에서도. 어둡고, 빛바래고, 먼지가 잔뜩 낀 듯한 사진들이 인스타그램과 젊은 사진작가들의 작품에 자주 출몰한다. 이러한 먼지 느낌의 사진은 흑백사진과 필름 카메라 사진 중간쯤의 ‘회색지대’에 자리한다. 흑백보다는 채도가 높지만, 필름카메라 필터의 빈티지 느낌보다는 채도가 낮기 때문이다. ‘미세먼지 필터’의 세계를 더 들여다보자.

 

미세먼지 필터의 특징

출처- 왼쪽부터 시계 방향으로 @kawaamorii, @kongnani_, @w_ddiny, @w_ddiny

미세먼지 필터 사진의 특징은 낮은 명도와 채도 및 단순한 구도다. 특히 명도와 채도가 아주 낮아서, 사진에 빛과 색채가 간신히 맺힌 느낌이 들 정도다. 마치 새벽녘 그믐달이나 한밤중, 어둠에 눈이 적응했을 때 어슴푸레 보이는 풍경 같다. 그래서 사진에 한밤중처럼 차분하고 적막한 분위기, 건조하면서도 신비한 정서가 감돈다. 또 명도와 채도, 구도가 축소된 대신 사물 고유의 표면의 질감이 도드라진다. 어둡고 습한 곳에서만 이끼가 자라듯, 낮은 명도와 채도의 사진에선 유화로 그린 듯한 입체적인 물성이 사진에 촘촘히 돋아 있다.

 

미세먼지 필터 분위기의 모티브, 정물화

미세먼지 필터의 분위기는 정물화와 닮았다. 정물화는 16세기 말 네덜란드에서 처음 등장했다. 당시 네덜란드에서 무역이 활발해지자 부유해진 상인들이 부를 과시하려 했고, 이 때문에 식기와 귀한 식재료, 생활용품을 한데 담아낸 정물화가 생겼다. 그래서 정물화에는 ‘과시’의 뉘앙스가 있다. 또 정물화에는 ‘정지, 고요’와 ‘죽음, 무상함’이라는 뉘앙스도 있는데, 이는 나라별 ‘정물화’를 번역한 단어에 담겨 있다. 우리나라 정물화(靜物畵)처럼 ‘정지’에 초점을 맞춘 영어(Still life), 독일어(Stillleben)가 있고, ‘죽음’에 초점을 맞춘 이탈리아어(Natura morta, 죽은 자연), 스페인어(Naturaleza muerta, 생명 없는 자연)가 있다.

그래서 미세먼지 필터의 사진들도 정물화처럼 고요하면서도 무상한 분위기를 풍기며, 한편으로는 인스타그램과 같은 SNS에 과시하는 효과도 있다. 결국 사람들은 미세먼지 필터를 통해 정물화의 회화적 느낌을 되살리려 하고 있다. 흥미로운 점은 과거에는 회화가 사진처럼 사실적으로 표현하려 애썼다면, 이제 사진(기술)이 회화를 닮으려 한다는 것이다.

 

필터, 디지털이 입는 옷

먼지필터 이전에 유행했던 ‘구닥’, ‘픽테일 레트로’ 등 필름카메라 어플들과 아이폰의 ‘흐림필터’도 아날로그를 구현한 사례다. 특히 필름 카메라 필터들은 노이즈, 비네팅(어두운 외곽), 빛샘 효과, 심지어 찍은 사진을 며칠 뒤에야 확인할 수 있는 등 필름카메라 기능상의 한계로 인한 현상들을 일부러 극대화했다. 아이폰 iso 버전 10까지 있던 흐림필터 역시 거칠고 어두운 분위기가 포인트였는데, 이 때문에 새로운 버전으로 업데이트를 안 하는 사람들도 많았다.

이처럼 아날로그 필터들의 유행은 ‘물성’에 대한 목마름 때문이다. 필름카메라의 빈티지 효과는 ‘필름’이라는 물성의 한계 때문에, 흐림 효과는 ‘대기’라는 물리적 공간의 변덕 때문에 생긴 것이다. 디지털의 센서는 시각적 왜곡이 적을지 몰라도 의미와 분위기까지 담아내기는 어렵다. 의미와 분위기는 특정 요소를 극대화, 즉 왜곡시켜야 얻어지기 때문이다. 그리고 우리들은 의미와 분위기를 떼 놓고 살 수 없다.

그래서 기술이 계속 발전하더라도, 아날로그 효과를 극대화한 필터들은 끊이지 않을 것이다. 영화 <그녀(Her)>에 등장하는 고도 인공지능 운영체제 ‘사만다’의 목소리가 프로그램에 불필요한 ‘숨소리’를 흉내 냈듯이.

 

Writer

지리멸렬하게 써 왔고, 쓰고 싶습니다. 특히 지리멸렬한 이미지들에 대해 쓰고 싶습니다. 사진이나 미술 비평처럼 각 잡고 찍어낸 것이 아닌, 그 각이 잘라낸 이미지들에 대해. 어릴 적 앨범에 붙이기 전 오려냈던 현상 필름 자투리, 인스타그램 사진 편집 프레임이 잘라내는 변두리들과 같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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