색깔에도 온도가 있다면 로버트 헌터의 그림은 한겨울에 마시는 유자차처럼 따뜻할 것만 같다. 쉽게 눈을 뗄 수 없는 그림을 따라 한 발짝씩 나아가다 보면, 우리는 어느 순간 이상한 나라에 도착하게 된다. 로버트 헌터의 그림책 두 권을 통해, 꿈과 현실의 중간 그 어딘가에 정말로 존재할 것만 같은 묘한 세계로 초대한다.

<Collecting Art>
밴드 Elbow의 <All Disco> 앨범 트레일러
잡지 <Guardians>

 

 

몽환적인 그림을 그리는 일러스트레이터

몽환적인 색감으로 유명한 영국의 일러스트레이터 로버트 프랭크 헌터(Robert Frank Hunter). 그는 대학에서 일러스트레이션을 공부한 후 앨범 커버와 홍보 포스터, 조각품을 제작하며 상업 디자인 부문에서 활동했고, 뉴욕타임즈 등 각종 잡지에 일러스트 및 만화를 기고하기도 했다, 어른들을 위한 동화를 쓰고 싶었다는 그는 2011년부터 본격적으로 그림책을 만들기 시작한다, <새내기 유령> <하루의 설계도>처럼 도무지 내용을 짐작할 수 없는 제목과 독특한 설정이 인상적인 작품들을 말이다.
 

잡지 <Fan The Fire>
<Report something suspicious>, 지하철 안전 포스터


모든 예술가에게는 저마다의 뮤즈가 있다. 로버트 헌터의 경우에는 ‘토머스’와 ‘넬리’가 그렇다. 맨 앞장에 적힌 짧은 헌사나 작품 속 인물들을 통해 불쑥불쑥 등장하는 이 이름은 헌터의 조부모님이다. 실제로 그는 할머니 할아버지와 함께했던 유년 시절이나 그때 전해 들은 이야기들로부터 영감을 얻는다고 한다. ‘나를 키운 것은 8할이 바람’이라는 어느 시의 한 구절처럼, 작품 세계를 형성하는 데 큰 영향을 끼친 뮤즈들을 향한 헌터의 애정이 물씬 느껴진다.

 

 

<새내기 유령>

<새내기 유령>(2011)
이 작품은 그의 대표작이기도 하다.
<새내기 유령> 트레일러


그의 첫 그림책 <새내기 유령>은 첫 임무 수행을 나온 유령과 별의 탄생을 발견하고 싶어 하는 천문학자가 만나며 펼쳐지는 이야기다. 나무에 걸리는 바람에 무리에서 뒤처진 이 초보 유령은 때마침 밤하늘을 관찰하던 천문학자의 도움을 받아 동료 유령들을 찾아 나선다. ‘임무’를 수행하는 동료들의 모습을 목격한 유령은 충격에 빠지고, 임무를 수행하는 대신 천문학자의 꿈을 돕기로 결심하지만 설상가상 동료들에게 쫓기게 된다. ‘사람은 죽어서 별이 된다’는, 누구나 한 번쯤 해 본 상상을 바탕으로 탄생한 이 작품은 전문적인 과학 이론 대신 삶과 죽음이라는 철학적인 주제로 연결된다.
생의 여러 순간이 그렇듯 유령에게도 ‘처음’이 존재한다거나, 육신을 떠난 영혼을 밤하늘로 데려다주는 게 그들의 역할이라는 아이디어도 반짝이지만 가장 매력적인 건 결말 부분의 소소한 반전이다. 공존할 수 없을 것 같던 유령의 임무와 천문학자의 꿈이 서로를 발판삼아 이루어지는, 비극인 듯 희극 같은 반전은 독자의 마음에 오래도록 여운을 남긴다. 이 작품을 읽었다면, 유난히 고된 하루의 끝에서 밤하늘을 올려다보는 건 어떨까. 묵묵히, 그러나 환한 빛을 뿜으며 우리를 내려다보는 낯익은 얼굴을 발견하게 될지도 모르니 말이다.

<새내기 유령>

 

 

영감이 되는 그림

존 홉킨스의 <Asleep Versions> 중 ‘Form By a Firelight’


때때로 예술은 또 다른 예술가에게 영감 그 자체가 된다. 이 작품은 <Viva La Vida> 등으로 유명한 록밴드 콜드플레이의 프로듀서이자 일렉트로닉 뮤지션인 존 홉킨스에게 큰 영감을 주었다. 이 작품을 접한 뒤 홉킨스는 <Immunity>부터 기존의 곡을 새롭게 편곡한 <Breathe This Air> 등 4곡의 음악이 수록된 EP <Asleep Versions>를 제작한다. 표지 일러스트는 물론이고 모두가 잠든 밤에 딱 어울릴 만큼 잔잔하다는 것까지, 여러모로 <새내기 유령>과 꼭 닮은 앨범이다. 가만히 귀를 기울이고 있으면 공기 중에서 푸르스름한 빛을 내뿜으며 헤엄치는 유령의 모습이 그려지는 것만 같다.

 

 

<하루의 설계도>

<하루의 설계도>(2013)
괘종시계 속으로 들어간 소년은 땅에 묶인 채 잠들어 있는 미지의 존재를 발견한다


<새내기 유령>이 별이 총총한 밤하늘이나 푸른색을 통해 신비한 느낌을 풍겼다면, 또 다른 그림책 <하루의 설계도>는 태양을 연상시키는 붉은색과 노란색으로 강렬하고 열정적인 느낌을 풍긴다. 이 작품은 프롤로그 형식으로 태초의 시작을 다룬 첫 번째 챕터와, 할아버지의 괘종시계 속에서 또 다른 세계를 찾아낸 소년이 등장하는 두 번째 챕터로 이루어져 있다. 헌터는 전작에 이어 이번에도 ‘이과적’인 소재를 ‘문과적’인 시각으로 풀어낸다. 설명 불가능한 사랑이라는 감정으로 태양이 움직이고 바닷물이 밀려들어 왔다 빠져나가는 자연 현상을 설명하는 것이다. 우주가 탄생하는 순간 태양을 짝사랑하게 된 지구, 우주의 소멸을 막기 위해 짝사랑을 방해해야만 하는 인물들 같은 설정도 재미있다. 헌터의 그림책을 읽다 보면, 어쩌면 진정한 예술이란 이렇게 서로 반대되는 분야를 어우를 때 탄생하는 것인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기도 한다.

<하루의 설계도>(2013)


인쇄와 판화에도 관심이 많고 ‘책’이 갖는 물질적 가치를 중요하게 여기는 로버트 헌터. 에디시옹 장물랭 출판사를 통해 한국에 소개된 이 두 권에 그림책에는 헌터의 남다른 열정이 그대로 반영되어 있다. <새내기 유령>은 일반적으로 사용되는 잉크가 아닌 다섯 가지 별도의 색으로 인쇄되었고, 판화의 느낌을 물씬 풍기는 <하루의 설계도>는 표지가 천 양장으로 제작되었다. 또한 책의 수익금으로는 나무를 심는다. 여러모로 의미 있는 작품인 셈이다.

<Lucid Dreaming>
<New York Times> 일러스트레이션


로버트 헌터의 작품은 분명 아름답지만, 단순히 시각적으로 예쁘기만 한 것은 아니다. 그의 작품은 한 번만 혹은 가볍게 읽어서는 정확히 이해하기 어렵다. 그래서인지 읽으면 읽을수록 생각할 것들도 많아지고, 때로는 같은 장면에 대한 해석이 여러 번 달라지기도 한다. 지금까지 그가 만든 그림책은 총 세 권. 독자의 욕심일지는 모르겠지만, 앞으로 끊임없이 더 많은 작품을 만들어 달라고 조르고 싶다. 천천히, 그러나 꾸준히 더 깊어지고 넓어질 ‘헌터 월드’가 자꾸만 궁금해진다.

로버트 헌터 공식 홈페이지 
로버트 헌터 블로그 

 

 

Writer

언어를 뛰어넘어, 이야기에는 세상을 변화시키고 삶을 풍요롭게 만드는 힘이 있다고 믿는다.마음속에 새로운 씨앗을 심어주고, 새로운 세계로의 통로가 되어주니까. 그래서 그림책에서부터 민담, 괴담, 문학, 영화까지 다양한 형태의 이야기들을 수집하고 있다. 이렇게 모은 이야기를 사람들에게 소개하는 중. 앞으로 직접 이야기를 만들기도 하며 더 풍성하고 가치 있는 세계를 만들어나가기를 꿈꾸고 있다.
전하영 블로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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