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의 추위에 지칠 무렵, 싱가포르는 바로 이맘때 훌쩍 떠나고 싶은 곳이다. 실제로 싱가포르를 여행하기 가장 좋은 시기로 우기가 끝난 직후인 2월부터 4월 사이를 꼽는다. 문화예술, 건축, 미식 등 다양한 주제로 여행하기 좋은 이 나라에서 최근 더욱 주력하고 있는 분야는 아트. 몇 년 사이 동남아시아 최고의 아트 허브로 꼽힐 만큼 주요한 아트 플레이스가 늘어났고, 1월 말 개최하는 아트 축제 ‘싱가포르 아트 위크’나 마리나베이샌즈에서 열리는 아트 페어인 ‘아트 스테이지’ 등 동남아시아에서 손에 꼽히는 미술 행사들이 개최되고 있다. 특히 미술에 조금이라도 관심 있는 여행자라면 반드시 들러야 할 장소가 있다. 바로 2015년 11월 개관한 내셔널 갤러리 싱가포르(National Gallery Singapore)다.

내셔널 갤러리 싱가포르 외관


영국 식민지 시절인 1929년과 1939년 지어진 시청과 대법원의 역사적인 건물을 개조해 미술관으로 탈바꿈시킨 이 건축물은 기존의 건물 구조를 최대한 살리고 보존했다. 갤러리를 둘러보다 보면 세월이 깃든 시설을 곳곳에서 확인할 수 있다. 내셔널 갤러리 싱가포르에 방문하면 우선 압도적인 규모에 놀란다. 각각 5층과 6층짜리 2개 건물이 이어진 공간에서 중국 1세대 현대 화가인 우관중(Wu Guan Jhong)의 전시실을 포함해 다양한 상설전과 특별전이 열리고 있다. 지금도 프랑스 오르세 미술관의 인상주의 작품을 대거 선보여 관람객들의 사랑을 받고 있는데, 지난 11월 시작한 이 특별전은 3월 11일까지 이어진다.

구 시청과 대법원을 개조한 내셔널 갤러리 싱가포르의 내부


일정이 길지 않은 여행자라면 당연히 8천여 점 이상을 전시한 이 드넓은 갤러리에서 ‘전략적 관람’이 필요하다. 그렇다면 내셔널 갤러리 싱가포르에서 집중해야 할 것은 무엇일까? 의심할 여지 없이 답은 동남아시아 작가들을 만나는 일. 이곳은 ‘Southeast Asia Gallery’란 이름을 단 전시실만 총 3개 층으로, 전 세계에서 동남아시아 현대미술 컬렉션을 가장 많이 갖추고 있다. 평소 쉽게 만날 수 없었던 동남아 현대미술 작품을 마음껏 감상할 기회이자, 동남아 아티스트들이 부침을 겪었던 20세기 자국의 역사를 어떻게 바라봤는지, 그 예민한 시각 또한 느낄 수 있다. 그중에서도 내셔널 갤러리 싱가포르가 자랑하는 몇몇 주요 작가와 작품들을 살펴봤다.

 

에르난도 오캄포(Hernando R. Ocampo) – 필리핀

에르난도 오캄포, <Dancing Mutants>


필리핀 네오리얼리즘의 대표 작가 중 한 명. 주로 제2차 세계대전 이후 필리핀의 현실을 묘사한 작업을 했고, 대담한 색채를 사용해 필리핀 자연 풍경을 묘사한 작품도 많다. 특히 필리핀의 동식물을 새로운 추상화 기법으로 표현한 작품들이 인상적인데, 내셔널 갤러리 싱가포르에서는 <Dancing Mutants>(1965)를 전시 중이다. 붉은색과 초록색의 조합으로 독특한 자연의 리듬을 표현한 작품이다.

 

응우옌 지아 트리(Nguyen Gia Tri) – 베트남

응우옌 지아 트리, <Landscape of Vietnam>


옻칠 작업을 하는 작가로 잘 알려진 응우옌 지아 트리는 베트남 현대미술에서 빼놓을 수 없는 이름. 옻칠을 예술의 영역으로 끌어올렸다는 평가를 받으며 오늘날 많은 베트남 화가들에게 큰 영향을 미친 작가다. 정치, 사회 이슈에 대해 적극적으로 표현했고 장대한 풍경과 여성, 아이들을 묘사한 작품도 많다. 내셔널 갤러리 싱가포르에 전시된 <Landscape of Vietnam>(1940)은 동양미가 물씬 풍기는 옻칠 작품으로, 그의 작품세계를 엿보기에 충분하다.

 

헨드라 구나완(Hendra Gunawan) – 인도네시아

헨드라 구나완, <War and Peace>


최근 몇 년 사이 미술품 경매에서 작품이 높은 가격에 거래되며 컬렉터들에게 인기를 누리고 있는 작가다. 그는 식민지배를 겪었던 인도네시아의 역사 속에서 동시대의 아픔을 함께 겪었고, 공산당 지지자로 13년간 감옥에 수감되기도 했다. 자국민들을 독려하는 투쟁적인 포스터나 강렬한 색채로 민중의 역동적인 움직임을 표현했다. <War and Peace>(1950년대)는 총을 들고 산을 바라보고 있는 두 사람을 묘사했는데, 해진 옷을 입고 있지만 인물들의 힘 있는 표정이 강렬한 인상을 남긴다.

 

조젯 첸(Georgette Chen) – 싱가포르

조젯 첸, <Lotus in a Breeze>


싱가포르 시각예술의 선구자로 꼽히는 여성 작가 조젯 첸은 중국 태생으로 일찌감치 파리와 뉴욕의 예술적 환경에서 공부했고, 40대 중반인 1953년부터 싱가포르에 정착해 수십 년간 자신이 영감을 받은 문화와 환경에 대해 그렸다. 은퇴한 다음 해인 1982년, 싱가포르 문화훈장을 수상했다. 내셔널 갤러리 싱가포르에서는 세밀한 기법으로 연꽃을 그린 <Lotus in a Breeze>(1970)나 중국 외교관 유진 첸의 초상화 <Portrait of Eugene Chen>(1940), 그리고 <Self-Portrait>(1946) 등 그녀의 대표작 여러 점을 전시 중이다.

 

몬티엔 분마(Montien Boonma) – 태국

몬티엔 분마, <The Pleasure of Being, Crying, Dying and Eating>


몬티엔 분마는 전통적 재료와 산업 자재를 조합한 설치 작품으로 유명한 태국 작가. 불교에서 깊은 영향을 받았고 삶의 기쁨과 슬픔, 죽음, 상실에 관해 탐구한 작품이 많다. 싱가포르 내셔널 갤러리에서는 개관 당시 그의 1993년 작품 <The Pleasure of Being, Crying, Dying and Eating>(1993, 2015)를 재설치해 선보이고 있다. 세라믹 그릇과 나무 테이블을 이용한 거대한 설치 작품이 전시실에 들어서는 순간 시선을 압도한다. 가장 마지막 전시실인 갤러리 5층에 자리하지만 그냥 지나치지 말고 꼭 감상해야 할 주요 작품 중 하나다.

 

라티프 모히딘(Latiff Mohidin) – 말레이시아

라티프 모히딘, <Aku>
라티프 모히딘, <Pagodas II, Pago Pago Series>


최근 몇 년간 세계 곳곳에서 회고전을 개최하고 있는 말레이시아의 거장이다. 20대 때부터 베를린, 파리, 뉴욕 등에서 활동했으며 서양의 큐비즘을 아시아에서 구현한 작가로 평가 받는다. 내셔널 갤러리 싱가포르에는 말레이시아의 자연과 환경을 기하학적으로 묘사한 ‘Pago Pago’ 시리즈와 인도네시아의 시인 하이릴 안와르(Chairil Anwar)의 초상화 <Aku>(1958) 등 그의 여러 작품을 만날 수 있다. 모두 시각적 재미를 누릴 수 있는 작품들이다.

 

탕 다 우(Tang Da Wu) – 싱가포르

탕 다 우, <Tiger's Whip>


탕 다 우는 드로잉, 회화, 조각, 설치와 퍼포먼스 등 다양한 매체로 활동하며 2007년 베니스 비엔날레에서 싱가포르 대표 작가 4명 중 한 명으로 소개된 바 있다. 그는 1988년 싱가포르 최초의 예술 공동체 ‘The Artists Village’를 설립했고 동시대 예술가들의 활동을 장려하고 젊은 예술가들에게 영감을 불어넣으며 그들이 세계 무대에서 활동할 수 있도록 지원했다. 작품을 통해 환경 파괴와 동물 착취, 사회 문제에도 적극적인 표현을 했는데 내셔널 갤러리 싱가포르 2층에서 관람객들의 시선을 끄는 설치 작품 <Tiger's Whip>(1991)이 바로 그런 작업 중 하나다.

 

이미지 출처 내셔널 갤러리 싱가포르 홈페이지 
메인 이미지 출처 ‘Families for Life’ 

 

 

Writer

잡지사 <노블레스>에서 피처 에디터로 일했다. 사람과 문화예술, 그리고 여행지에 대한 글을 쓴다. 지은 책으로는 에세이 <마음이 어렵습니다>, <회사 그만두고 어떻게 보내셨어요?>, 여행서 <Tripful 런던>, <셀렉트 in 런던>이 있다.
안미영 네이버포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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