젊고 유망한 배우에게 너무 이르고 허망한 죽음이었다. 피겨스케이팅 선수였던 부모님을 따라 러시아에서 미국으로 건너온 안톤 옐친이, 아역 시절부터 드라마와 영화를 종횡무진 누비다가 2009년 ‘스타트렉’ 리부트 시리즈에 참여하며 대중에게 막 사랑을 받기 시작했던 참이었다. 장난기 머금은 귀여운 인상 뒤로 비상한 두뇌와 용기를 겸비한 항해사 역할로 이 시리즈의 감초를 담당했던 그는, 2016년 <스타트렉: 비욘드> 개봉을 앞두고 자택에서 발생한 차 사고로 안타깝게 사망했다. 공교롭게도 지미 헨드릭스나 커트 코베인이 떠났던 것과 같은 27세의 나이. 안톤 옐친의 유작 <포르토>를 포함해 그가 남기고 간 영화 속 캐릭터를 유형별로 살펴본다.

<스타트렉: 비욘드> 포스터

 

1. 어린 용사
<터미네이터: 미래전쟁의 시작>(2009) /<오드 토머스>(2013) / ‘스타트렉 시리즈’(2009~2016)

안톤 옐친이 <스타트렉>에서 맡은 역할 ‘파벨 체코프’는 배역에 대한 설명부터 ‘귀여운 10대 항해사’로 되어 있다. 곱슬머리, 선한 인상에 장착된 깊고 맑은 눈빛이 그를 어린 나이에도 우주 평화를 위해 싸우는 귀엽고 강인한 용사로 만들었나 보다. <오드 토머스>에서는 죽은 사람을 보거나 미래 불행한 사건을 예지하는 등 신비로운 능력을 지닌 주인공 ‘오드 토머스’로 나온다. 어리고 서툴지만 마을의 사고와 재앙을 막으려고 고군분투하는 모습에서 근래 톰 홀랜드가 맡고 있는 ‘피터 파커’에 과거 토비 맥과이어의 ‘피터 파커’를 살짝 가미한 듯한 인상이 떠오르기도 한다.

<오드 토머스> 30초 예고편

한국 기준으로 <스타 트렉 더 비기닝>(2009) 으로부터 13일 후 개봉한 <터미네이터: 미래전쟁의 시작>에서도, 안톤 옐친은 훗날 인간 저항군 리더 존 코너의 아버지가 되는 젊은 ‘카이 리스’ 역을 맡았다. 독자적으로 각종 트랩을 만들어서 터미네이터에 맞서 싸우는 등 용감하고 기지 넘치는 모습을 연기해 <스타트렉>과 또 다른 사뭇 진지하고 거친 매력을 발산한다.

<터미네이터: 미래전쟁의 시작> 스틸컷

 

2. 정의로운 자
<프라이트 나이트>(2011) / <다잉 오브 라이트>(2014) /
<그린 룸>(2015)

안톤 옐친은, 천재적 두뇌를 가진 파벨 체코프나 인류 역사에 남을 위인 카일 리스, 신비한 능력을 지닌 오드 토머스와 달리 별다른 힘과 지력 없는 평범한 인물일 때에도 늘 정의감 넘치는 캐릭터를 연기한다. <그린 룸>에서는 초라한 공연장을 전전하는 무명 펑크록 밴드의 멤버로 등장한다. 그는 우연히 살인 현장을 직접 목격하고 신고하려다 사건을 은폐하려는 네오 나치들에 의해 공연장 백스테이지 그린 룸에 갇혀 이에 맞서게 된다. <다잉 오브 라이트>에서는 권고사직을 하게 된 베테랑 CIA 요원 ‘레이크’(니콜라스 케이지)를 돕는 부하직원 ‘밀트’ 역을 맡는다.

<그린 룸> 공식 트레일러
‘엑스맨’ 시리즈에서 정의하고 인자한 자비에 교수로 나왔던 패트릭 스튜어트의 악역 연기를 감상할 수 있다

물론 어리고 귀여워 보이는 외모 탓에 소심하고 용렬한 모습도 함께 가지고 있다. <프라이트 나이트>에서 분한 ‘찰리’는 멋진 여자친구와 사귀지만 교내 왕따인 ‘에드’와 단짝이었던 과거가 들통이 날까 봐 전전긍긍한다. 어느 날 에드가 학교 친구들이 하나둘씩 없어진다며 함께 찾아보자고 하지만 이를 무시했다가 에드마저 실종된 후에야 뒤늦게 용기를 내는 식이다.

<프라이트 나이트> 스틸컷

 

3. 믿음직한 청년
<뉴욕 아이 러브 유>(2008) / <오직 사랑하는 이들만이 살아남는다>(2013)

안톤 옐친은 때때로 우주를 지키고 대단한 정의를 수호하는 것까지는 아니어도, 정겹고 믿음직한 이웃 역할마저 소화한다. ‘뉴욕’과 ‘사랑’을 주제로 엮은 옴니버스 영화 <뉴욕 아이 러브 유>의 7분짜리 에피소드에 등장하는데, 고등학교 졸업 무도회를 앞두고 두 달 사귄 여자친구(블레이크 라이블리)에게 차여버린 고교생 역이다. 얼마나 괜찮은 청년을 연기하는지, 영화 속 동네 약국 아저씨가 딸의 사진을 보여주며 못된 전 여자친구 대신 자신의 딸을 무도회 파트너로 데려가라고 등을 떠밀기까지 한다.

<뉴욕 아이 러브 유> 스틸컷
동네 어르신이 좋아할 법한 저 번듯하고 맑은 미소를 보라

<오직 사랑하는 이들만이 살아남는다>에서는 자신을 음악가로 위장하고 숨어 지내는 뱀파이어 ‘아담’(톰 히들스턴)의 은밀한 물건 공급책 ‘이안’ 역을 맡는다. 수백 년을 산 아담은 인간을 좀비로 부르며 혐오하지만 이안 만큼은 믿을 만한 친구라고 여긴다. 이안 역의 안톤 옐친은 아담이 뱀파이어인 것을 모르면서도 의심스러운 것투성이인 그의 비밀을 지켜주려 애쓰고 있는 그대로 받아들인다.

영화 <오직 사랑하는 이들만이 살아남는다> 예고편

 

4. 성장해가는 사춘기 학생
찰리 바틀렛(2007) / 비버(2011)

파벨 체코프의 천재 이미지는 어쩌면 <찰리 바틀렛> 때부터일지도 모른다. 이 영화에서 안톤 옐친은 명문 사립학교에서 쫓겨났지만, 전학 간 자유분방한 공립고등학교에서 자신의 센스와 두뇌를 살린 ‘학교 비공식 카운셀러 겸 약사’라는 전무후무한 비즈니스로 학교 최고의 킹카로 거듭나는 ‘찰리 바틀렛’ 역을 맡는다. 학교의 괴짜 교장 ‘가드너’(로버트 다우니 주니어)와의 갈등을 겪으며 내면적 성숙도 이루는 역할이다.

영화 <찰리 바틀렛> 예고편

<비버>에서는 우울증과 무기력감에 빠진 아버지 ‘월터’(멜 깁슨)와 그런 남편 탓에 워커홀릭이 되어버린 어머니 ‘메레디스’(조디 포스터) 사이에서 갈등하고 성장해가는 큰아들 포터 역할을 맡는다. 졸업생 대표 ‘노라’(제니퍼 로렌스)의 연설문 작성을 도울 만큼 똑똑하지만 무기력한 아버지의 모습과 닮은 자신이 너무 싫기도 한 포터지만, 아버지의 성장과 서로의 상처를 보듬는 가족 및 주변 인물의 도움으로 성장하게 된다.

<비버> 스틸컷

 

5. 사랑에 빠진 순애보
<라이크 크레이지>(2011) / <5 To 7>(2014) /
<포르토>(2016)

동시에 안톤 옐친은 사랑밖에 모르는 순애보를 연기하기도 했다. <라이크 크레이지>에서 안톤 옐친이 연기한 ‘제이콥’은 대학에서 만난 영국인 ‘애나’와 장거리 연애, 이민 문제 등 크고 작은 역경 속에서도 둘의 사랑을 지키기 위해 애쓴다.

<라이크 크레이지> 스틸컷

<5 To 7>에서는 매일 출판사의 거절 편지를 받으며 지쳐가는 뉴욕의 작가 지망생 ‘브라이언’으로 나온다. 그는 연애에 관심도 없는 활자 중독자였지만 어느 날 길에서 우연히 만난 프랑스 출신 ‘아리엘’에게 빠지게 되고, 이미 결혼까지 한 그녀와 오후 5시와 7시 사이 비밀스러운 연애를 하게 된다. 올해 초 개봉한 <포르토>에서도 그는 프랑스 여성 ‘마티’와 빠져드는 미국 남자 ‘제이크’를 연기한다. 대신 배경이 미국이 아니라 포르투갈의 아름다운 도시 ‘포르토’다.

<포르토> 메인 예고편

돌이켜 보면 안톤 옐친이 연기했던 캐릭터 중 악역은 거의 찾아보기 힘들다. 그의 배역들은 때로 괴로워하고 갈등하기도 하지만 그렇기에 더욱 인간미 넘치고 많은 사람이 공감할 수 있는 선한 역이 되기도 한다.
어려 보이는 외모 탓에 세상을 떠날 때까지 영화 속에선 항상 순수한 소년과 청년에 머물렀던 안톤 옐친. 중년과 노년의 모습을 연기하는 그를 영원히 볼 수 없다는 사실이 슬프면서도, 우리 모두의 청춘을 그려낸 듯 귀엽고 강인한 캐릭터들을 바라보며 위로를 받는다.

<5 To 7> 스틸컷

 

메인 이미지 출처 Los Angeles Times 

 

Writer

차분한 즐거움을 좇는다. 그래서 보고 들은 것과 일상에 대한 좋은 생각, 좋아하는 마음을 글로 옮긴다. 학부 시절 네이버 파워블로그에 선정된 후 쓰기를 이어와 현재 한국대중음악상 선정위원으로 활동 중이다. 웹진 <음악취향Y>, 잡지 <재즈피플>, 신문 <아주경제> 등에 글을 기고한다. 누구나 늘 즐겁기를 바란다. 너무 들뜨지 않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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