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2차 세계대전 이후 1950년대부터 만화의 신이라 불리는 데즈카 오사무 등 만화가들이 등장하고, 그와 함께 만화잡지가 등장하면서 일본의 만화시장은 급속도로 성장하게 된다. 최초에는 크게 소년만화와 소녀만화로 양분화되어, 각자 고유의 테마에 한정되었으며, 만화는 아이들이나 보는 것이라는 인식이 팽배했지만, 지난 70년의 시간 동안 시대의 변화와 함께 만화 역시 다양한 주제를 다루는 거대한 시각대중매체로 발전했다.

그중에서도 2018년 1월 현재 한국만화박물관에서 진행되고 있는 <일본소녀만화의 세계: 소녀들의 욕망을 비추는 거울> 전시 내용을 토대로, 한국의 ‘순정만화’에도 영향을 준 일본 소녀만화의 역사를 간략히 살펴보며, 여성 만화가들의 주체적인 활동 양상과 페미니즘적인 시각이 반영된 다양한 작품들을 살펴보고자 한다. (필자의 지난 기사 <90년대 순정만화 속의 페미니즘>과 함께 읽어보아도 좋을 것이다.)

<일본소녀만화의 세계: 소녀들의 욕망을 비추는 거울> 전시 포스터

 

1세대: 현대소녀만화의 여명기

전시는 일본 소녀만화의 대표작가 12명을 선정해, 소녀만화의 발전을 크게 3세대로 구분해 소개한다. 1세대 ‘현대소녀만화의 여명기’에서는 1950년경 최초의 소녀만화가 여성 작가들이 아닌 남성 작가들의 손에서 탄생했다는 점이 눈에 띈다. 예컨대 우리에게는 <은하철도 999>와 같은 소년만화가로 잘 알려진 마츠모토 레이지 역시 소녀만화가로 데뷔를 했었다. 그리고, 그 이후 데즈카 오사무를 필두로 한 만화가들의 창작 공동주택이었던 ‘도키와장’에 거주하며 작업을 시작했고, 그중 최초이자 유일했던 여성만화가 미즈노 히데코의 활동 등을 통해 본격적으로 여성 소녀만화가들이 등장하기 시작한다.

이 시기의 작품들은 전후 일본의 가난한 사회에서 살아가는 독자들에게 희망을 주기 위해 만화의 주인공으로 등장하는 소녀가 고난을 극복하고 행복을 쟁취하는 식의 스토리가 많으며, 이 당시 활동하던 작가들이 2010년대까지 활동을 하며 소녀만화뿐만이 아니라, 성인여성들을 위한 만화까지 창작을 이어간다는 점이 흥미롭다. 예컨대 1957년에 데뷔한 마키 미야코는 데뷔 당시에는 소녀만화에 어울리는 화풍으로 인기를 얻다가, 후에 <애교점>이라는 단편을 통해 19세기 실존했던 여성 우키요에 화가의 인생을 모티브로 남성 중심적 상업예술계에서 분투하는 여성 예술가들의 모습을 사실적인 화풍의 작품으로 그려낸다. 한편, 이러한 스토리는 남성 만화가들의 활약에 비해 사회적으로 제약이 많았던 1세대 소녀만화가들의 활동 모습과 자연스럽게 겹쳐 보이기도 한다.

하기오 모토 <11인이 있다!>

 

2세대: 소녀만화의 발달기

1세대 소녀만화가들의 성공으로 수많은 여성 만화가들이 활약할 수 있는 토대가 마련되어, 1970년대에는 ‘꽃의 24년조’라는 여성만화가들의 창작 집단이 등장하게 된다. 그들은 오오이즈미 살롱이라는 아파트에서 공동생활을 하며 서로의 창작 과정에 협력하면서 성장해갔다. 구성원에 대해서는 여러 의견이 분분하지만, 가장 핵심적인 작가들로는 다케미야 게이코와 하기오 모토가 꼽힌다. 그중 다케미야 게이코는 당시 소녀만화에서 다루지 않았던 SF와 판타지 작품을 그리기 시작했으며, <바람과 나무의 시>를 통해 소년들끼리의 동성애를 다룬 작품을 최초로 선보이며 센세이션을 일으켜, 현재까지도 이어지는 보이즈 러브 장르의 시발점을 만들어냈다.

또한, 전시회에 비치된 단행본으로 만나볼 수 있는 하기오 모토의 중편 <11인이 있다!> 역시 SF 작품으로, 우주 대학에 입학하기 위한 최종 테스트 과정에서 10인 1조여야 할 수험생들이 11인으로 구성된 돌발 상황을 통해 극적인 스토리를 전개한다. 등장인물들의 다층적인 심리가 묘사되며, 작품 속에서 ‘프롤’이란 인물은 성별이 채 결정되지 않은 양성체인 상태로 등장하여, 하기오 모토의 작품에서 여러 차례 다뤄지는 젠더의 양분화에 대한 고찰 역시도 이끌어낸다.

미우치 스즈에 <유리가면>

그밖에 한국에서도 무척 인기를 끌었던 미우치 스즈에의 <유리가면>은 남성과의 연애에 대한 스토리가 다수였던 당시 소녀만화의 흐름과 달리 주인공 ‘마야’가 배우가 되기 위해 노력하며 성장해가는 모습과 동성 사이에서 벌어지는 라이벌 관계, 사제 관계 등을 주된 스토리로 다뤘다. 또한 요시다 아키미의 <바나나 피쉬>는 하드보일드한 소년들이 등장하는 영화적인 줄거리로 소녀만화의 새로운 지평을 연 작품이라는 평가를 얻고 있다.

요시나가 후미 <서양골동양과자점>

 

3세대: 소녀만화의 새로운 방향성

3세대 ‘소녀만화의 새로운 방향성’에서는 1980년대 이후 나타난 ‘코믹마켓’을 통해 아마추어 동인지* 활동을 하며 데뷔한 1990년대 작가들에 대해 다룬다. 이 시기에 나타난 작가들의 작품에서는 이전 세대보다 더욱 뚜렷하게 독자적인 개성을 가진 주인공들이 등장하는 것이 특징이며, 오카노 레이코의 <음양사>, 이마 이치고의 <백귀야행> 등 일본의 신화나 전설 등을 재해석한 작품들이 나타난다.

*동인지(同人誌)- 취미, 경향 따위가 같은 사람들끼리 모여 기획·집필·편집·발행하는 잡지 혹은 도서출판물.



이 시기의 작가들 중에서도 요시나가 후미는 아마추어 동인지 활동 당시부터 보이즈 러브 장르를 통해 성소수자들의 삶의 모습을 그리면서 작품활동을 시작한다. 어린 시절 겪은 납치로 인해서 트라우마가 있으면서도 스스로의 어두운 면을 주변 사람들에게 드러내지 않으려 노력하는 주인공 '타치바나'가 등장하는 <서양골동양과자점>, 미묘하면서도 복잡한 어머니와 딸의 관계를 돌아보게 만드는 <사랑해야 하는 딸들>, 가상의 전염병으로 인해 남성 인구가 급격히 줄어들어 남녀의 사회적 역할이 뒤바뀐 에도시대를 배경으로 한 시대극을 통해 현실에서의 젠더 역할에 대해서 생각하게 만드는 <오오쿠> 등 때로는 좌절하거나 고통스럽고, 눈에 보이는 대단한 성취도 없지만, 자신의 삶을 묵묵하게 살아나가는 다양한 사람들의 이야기를 계속해서 그려나간다.

이처럼 다채로운 주제를 다루고 있는 일본 소녀만화에 대해 소개하고자, 캘리포니아 대학교에서 만화의 미학과 아동 심리를 연구하고 있는 도쿠 마사미 교수가 본 전시를 기획하였다. 2005년부터 10년 넘게 북미와 아시아 지역에서 50회 이상 순회 전시가 진행되었으며, 한국에서의 전시 이후에는 남미 지역으로 넘어갈 예정이다. 기회가 된다면 ‘일본 소녀만화의 장르적 우수성과 변화하는 일본 여성의 역할을 보여주고자 했다’는 전시 기획 의도를 참고하여, 이 전시를 관람해볼 것을 추천한다.

 

<일본 소녀만화의 세계 : 소녀들의 욕망을 비추는 거울>

일시 2017.11.15~2018.2.25(매주 월요일, 구정 전날과 당일 휴관)
시간 10:00~18:00(입장마감 17:00)
요금 무료(박물관 내 상설전시는 5,000원)
문의 032-310-3090
주소 한국만화박물관(경기도 부천시 원미구 길주로 1)
홈페이지 http://www.komacon.kr/comicsmuseum

 


포스터 및 작품이미지- 한국만화박물관 제공

사진 유유 eueu

 

Writer

서울에서 살아가는 생활인이자, 하고 싶은 이야기들을 노래로 지어 부르고, 여기가 아닌 어딘가 다른 낯선 세상을 바라보며 사진을 찍는 작업자. 다른 사람들의 작업을 보고, 듣고, 이야기하는 것을 좋아한다. '유유'는 한자로 있을 '유'를 두 번 써서 '존재하기에 존재한다'는 뜻으로 멋대로 사용 중. 2018년 9월부터 그동안 병행 해오던 밴드 '유레루나' 활동을 중단하고, 솔로 작업에 더 집중하여 지속적인 결과물들을 쌓아나가고자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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