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보나 흐미엘레프스카. 우리는 입술 사이로 여린 바람이 새어 나오는 이 이름에 가장 먼저 시선을 사로잡히고, 그다음으로는 그녀의 작품에 사로잡힌다. 꿈속의 풍경을 조각조각 이어붙인 것 같은 이미지에 반해 한 장 한 장 넘기다 보면, 그 속에 철학적인 사유가 숨어있음을 알아차리게 된다. 저 멀리 폴란드에서 흐미엘레프스카가 차분하고도 힘 있게 전해오는 이야기들에 귀 기울여 보자.

<안녕 유럽>
유럽의 국가를 상세하게 설명한 이 작품은 국가별 특징을 잡아낸 콜라주 기법이 돋보인다
<작은 발견>
골동품점에서 발견한 실패를 이용해 이미지를 표현했다
흐미엘레프스카가 일러스트를 맡은 황선미 작가의 <인어의 노래>
<주머니 속에 뭐가 있을까?>
손수 바느질한 파란 선은 토끼의 귀가 되었다가 여름날의 카약과 겨울을 기다리는 한 쌍의 스키가 되기도 하고, 무엇이 들어있을지 모를 선물상자의 리본이 되기도 한다

  

폴란드 출신의 그림책 작가 이보나 흐미엘레프스카. 이 길고 어려운 이름이 다소 낯설지라도, 그녀의 일러스트를 몇 편 보고 난 후엔 생각이 바뀔지도 모른다. 그녀는 <생각하는 ㄱㄴㄷ> 등의 그림책을 펴내고, 황선미 동화작가의 일러스트를 맡는 등 한국에서도 활발하게 활동하는 작가다. 어디선가 오려낸 듯한 사진이나 알록달록한 천 조각을 서로 이어붙이기도 하고, 펜 대신 실과 바늘로 이미지를 표현하는 독특한 기법과 작품세계에 녹아 있는 상상력까지. 한 편 두 편 작품을 접하다 보면 어디까지 뻗어 나갈지, 어떤 새로운 모양을 만들어낼지 쉽게 짐작할 수 없는 종이 위의 물감이 떠오른다. 사실 흐미엘레프스카는 대학에서 미술을 공부한 후 회화와 일러스트레이션, 무대 디자인 등 다양한 분야에서 활동해왔다. 특유의 아이디어는 이렇게 다채로운 경험에서 피어났는지도 모른다.

 

<생각>

<생각> 이미지 출처 '2004 이보나 흐미엘레프스카 특별전'
<생각>
<생각>
추상적이라는 것은 동시에 규정되지 않았다는 뜻이 아닐까 생각하게 만든다


흐미엘레프스카는 이렇게 만들어낸 이미지로 추상적인 개념에 형체를 부여한다. 누구나 생각해볼 수 있지만 막상 표현해내기는 쉽지 않은 것들. 조금만 깊이 생각해볼라치면 머릿속에서 뿌연 안개처럼 흩어져버리기 일쑤인 것들. 그것이 흐미엘레프스카가 주로 다루는 소재다. 아이처럼 말랑말랑한 상상력은 이러한 소재와 한 몸처럼 어우러진다.

‘생각이란 무엇일까?’

그림책 <생각>은 이러한 질문에서 출발한 작품이다. 바닥이 보이지 않을 만큼 깊고 투명한 유리그릇. 서로 마주보고 있어 그 속의 물체가 끝없이 늘어나는 거울. 아무에게도 들키지 않게 비밀을 깊숙이 감춰둔 상자, 혹은 영화처럼 장면이 계속해서 바뀌는 화면. 이 작품을 통해 그녀는 아무것도 아니지만 동시에 모든 것이 될 수 있는 가능성에 대해 이야기한다.

 

<두 사람>

<두 사람> via 'Maki w Giverny'
<두 사람> via 'Maki w Giverny'
두 존재가 맞물리는 이 그림들은 관계란 혼자서는 만들어나갈 수 없다는 것을 생각하게 한다 via 'Open Kid


그림책 <두 사람> 역시 비슷한 듯 다른 매력을 보여주는 작품이다. 이 작품은 사람과 사람이 만나 이루어가는 관계에 대해 고찰한다. 관계는 종종 녹슬거나 한쪽이 사라지기도 한다는 점에서 열쇠와 자물쇠 같기도, 따로 보면 각자 다른 풍경을 보여주지만 한눈에 보면 더 넓은 풍경을 보여준다는 점에서 두 개의 창문 같기도 하다. 때로는 앞뒤로 엮여 있어 하나의 이야기가 온전한 책 한 권으로 존재할 수 있게 하는 표지 같기도, 번번이 엇갈리는 낮과 밤 같기도 하다. 이렇듯 흐미엘레프스카의 작품에는 신비로운 은유가 곳곳에 녹아 있다.

 

<여자아이의 왕국>

<여자아이의 왕국> via 'Kopiec Kreta'
특유의 서늘한 분위기가 작품과 잘 어우러진다 via 'Kopiec Kreta'
고전동화의 인물들을 차용한 것도 인상적이다. via '더 책'


<여자아이의 왕국>은 이러한 은유가 가장 돋보이는 작품이다. 여성으로서 겪게 되는 성장 과정을 다루고 있는 이 작품은 처음부터 끝까지 은유로 이루어져 있다. 아무렇게나 떨어지는 폭포, 폭발하는 화산, 높은 탑과 그 주변을 서성이는 매서운 용……. 신체적·감정적 변화를 고전동화 속 인물들과 연결시켜 이야기를 풀어내는 방식, 오래된 레이스와 실크 천을 사용한 콜라주 기법도 흥미롭지만 용을 길들이고 탑에서 내려오는 방법을 찾아내는 등 왕국을 다스리는 법을 배워가는 주인공의 긍정적인 변화가 제일 인상적이다. 여성으로서의 삶을 평생 벗어날 수 없는 족쇄가 아니라 자신만이 다스릴 수 있는 하나의 왕국이라고 표현한 것에서, 흐미엘레프스카가 새로 피어나는 어린 여성들에게 어떠한 시각을 보여주고 싶어 했는지 알 수 있다.

 

<네 개의 그릇>

<네 개의 그릇> via 'WILA BUKI'
그릇 네 개는 때로는 각각 고유한 존재로, 때로는 서로 합쳐져 새로운 하나의 존재로 재탄생하기도 한다 via 'WILA BUKI'


이렇듯 흐미엘레프스카의 가치관은 그녀의 작품이 빛날 수 있는 가장 큰 이유이기도 하다.<네 개의 그릇>에서는 그녀가 작가로서 가지고 있는 책임감을 엿볼 수 있다. 제목처럼 그릇 네 개가 등장하는 이 작품은 팔랑팔랑 돌아가는 바람개비, 소나기를 막아주는 우산, 새벽 내내 작가의 책상을 밝혀주는 스탠드 등 끊임없이 변신하는 그릇을 따라가며 진행된다. 이 화려한 변신에 넋을 놓고 페이지를 넘기다 보면 다음과 같은 문장을 마주하게 된다.

“책 안에서는 무엇이든지 상상할 수 있어요. 보통 그릇 네 개도요. 이 책과 네 그릇이 사실을 바꿀 수는 없다고 해도, 곰곰이 생각해 볼 수 있게 만들 수는 있어요.”

여기서 우리는 그녀가 어떤 마음가짐을 지닌 작가인지 어렴풋하게나마 짐작해볼 수 있다. 이야기를 하나의 생명체로 여기는 그녀가 어떤 이야기를 세상에 풀어놓을 것인지, 그 이야기가 어떤 역할을 해낼지 깊이 고민하는 모습이 눈앞에 그려지는 듯하다.

나뭇결을 일러스트의 일부로 활용한 <비움>
<작은 발견>

 

읽을 때마다 이해와 해석의 깊이가 달라지는 것. 그것이 우리가 고전이라고 부르는 작품들의 가장 큰 특징이다. 이보나 흐미엘레프스카의 작품을 반복해 읽을 때마다 드는 생각이기도 하다. 은유와 수수께끼와 철학적인 사유가 가득한 그녀의 그림책은 독자의 마음속에 무언가를 심어준다는 점에서 한 편의 아름다운 시(詩)와도 닮았다. 훗날 흐미엘레프스카의 그림책들도 고전으로 자리 잡지 않을까, 조심스레 예상해본다.

 

 

Writer

언어를 뛰어넘어, 이야기에는 세상을 변화시키고 삶을 풍요롭게 만드는 힘이 있다고 믿는다.마음속에 새로운 씨앗을 심어주고, 새로운 세계로의 통로가 되어주니까. 그래서 그림책에서부터 민담, 괴담, 문학, 영화까지 다양한 형태의 이야기들을 수집하고 있다. 이렇게 모은 이야기를 사람들에게 소개하는 중. 앞으로 직접 이야기를 만들기도 하며 더 풍성하고 가치 있는 세계를 만들어나가기를 꿈꾸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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