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미지 출처- 일본 소품숍 'Pass The Baton' 홈페이지

언어는 존재의 집이라 했던가. 그렇다면 그릇은 음식의 집이다. 언어를 떼놓고 인간을 논하기 어렵듯, 음식을 그릇에 담지 않는 것은 어색하다. 음료는 그릇이 없으면 ‘엎질러진 물’ 신세가 된다. 또 단어 ‘dish’가 그릇뿐 아니라 음식도 뜻하듯, 그릇은 음식의 일부다. 몇 년 사이 그릇을 도구가 아닌, 그 자체로 아끼는 사람들이 늘었다. 이른바 ‘그릇덕후’다.

이미지 출처- 빈티지숍 '6m2'

그릇 애호가들은 예전부터 있었다. 하지만 그릇은 세트가 기본 수십만 원인 데다 차려 먹을 여유, 보관할 공간도 필요해 주로 중상류층 주부들의 취미였다. 반면 요즘의 그릇덕후는 오히려 ‘가성비’ 때문에 떠오른 취향이다. 저렴한 음식도 예쁜 그릇에 담으면 손님이든 스스로든 대접하는 느낌이 나고, 먹지 않더라도 멋진 그릇들을 바라보면 기분이 좋아지기 때문이다. 물론 ‘그릇된 그릇질’이란 표현처럼 여전히 많은 그릇이 비싸지만, 입소문 난 <다이소> 식기처럼 가성비 좋은 제품도 많아졌다. 예쁜 그릇 소개는 널렸다. 여기서는 그릇의 아름다움들을 싹 핥아보려 한다.

 

그릇의 공간과 물성


1. 그릇의 공간

영화 <더 테이블> 스틸컷

‘그릇’을 가만히 말해보면 발음 [으]가 두드러진다. 조형적으로도 ‘ㄱ’, ‘ㄹ’을 포함해 가로획 ‘ㅡ’이 유난히 많다. 그릇은 모음 ‘ㅡ’가 여러 자음을 얹어내는 것처럼 기능적으로도 음식을 담는 역할, 공간이 핵심이다. 덕분에 그릇이라는 단어가 ‘접시’보다 널리 쓰이는 것일지 모른다. 그릇이 인격이나 도량을 나타내는 의미로도, ‘그릇되다’라는 동음이의어로 쓰이는 것처럼 말이다.

그릇의 공간은 대부분 오목하게, 조금 물러나 다른 대상을 ‘받쳐’준다. 물러난 모양새에 따라 컵이 되기도, 밥그릇이 되기도 한다. 우러난 찻잎의 수색과 그 위에 어른거리는 나뭇잎 그림자, 뭉개지는 수증기를 하나의 풍경으로 연출하기도 한다. 대화한 시간만큼 벽면에 엔젤링(맥주잔에 남는 거품 띠)이 생긴다. 남은 커피를 마저 기울이면 얼굴 하나가 잔 바닥에 나타난다. 이처럼 그릇의 공간에서는 많은 일이 일어난다. 그래서 주전자 공간을 쓰다듬었을 때, 지니가 나타났던 것일지도 모른다.

 

2. 그릇의 물성

이미지 출처- 일본 소품숍 'angers' 홈페이지

우리나라는 서구권보다 그릇을 나누는 용어가 적다. 컵(cup), 텀블러(tumbler), 머그잔(mug), 볼(bowl), 소서(saucer), 저그(jug)처럼 그릇 관련 외래어들이 많은 이유다. 대신 질그릇, 사기그릇, 유기, 백자, 청자처럼 그릇의 물성에 집중한 단어가 많다. 물성은 그릇의 중요한 변수다. 빚은 재료나 두께 및 모양에 따라 보온 시간, 수색, 음색, 윤기, 볕이 잔을 통과한 그림자까지 달라지기 때문이다.

두꺼운 머그잔은 라떼의 따듯함을 오래 지속시킨다. 종잇장처럼 얇은 우스하리(うすはり)잔은 입술에서부터 맥주의 청량감을 통째로 느끼게 한다. 묵직한 호리병은 사케 맛에 대한 신뢰감을 준다. 무엇보다, 물성은 그릇의 음성들을 다양하게 만든다. 손끝에 그릇이 닿거나 유리잔에 얼음이 부딪히는 소리, 원목 테이블에 사발 바닥굽이 놓이는 소리, 그리고 설거지로 그릇에 물이 흐르는 소리와 마른 천으로 닦아내는 마찰음, 그릇과 그릇끼리 포개질 때의 울림까지. ASMR 전문 유튜버들이 ‘glass tapping(잔 두드리기)’을 꼭 방송 소재로 삼는 이유다.

그릇 관련 ASMR 영상

 

그릇의 정서

영화 <색, 계> 스틸컷

그릇덕후들은 음식을 좋은 재료로 정성껏 요리하고, 아끼는 사람을 대접하거나 소중한 한 끼를 차리다 보니 이왕이면 예쁘게 담아내려는 마음이 그릇까지 번졌다고 말한다. 이처럼 그릇에는 우리들의 욕망, 감정까지 번져 있곤 한다. 영화 <색, 계>(2007)에서 이대장(양조위)을 유혹할 계략을 꾸미는 식탁 위 식기들이 그 예다. 순백의 식탁보 위, 하얀 바탕에 장미 그림의 찻잔이 온통 놓여 있어 마치 붉은 마음이 흐드러진 모양새다.

영화 <아가씨> 스틸컷

이외에도 깨진 접시는 어긋난 관계를 뜻하는 관용적 표현으로 쓰인다. 그릇을 거칠게 탁, 놓는 것은 화난 마음을 뜻하고, 쌓인 설거짓거리나 깨끗이 닦이지 않은 쟁반은 산만한 심경을 나타낸다. 광주리에 밥을 먹고 표주박으로 물을 마신다는 뜻의 사자성어 단사표음(簞食瓢飮)이나, 영화 <아가씨>의 저택 속 섬세한 문양의 그릇들처럼 처지와 신분을 드러내기도 한다.

 

<여우와 두루미>, 하필 그릇을 다룬 이유

이솝 우화 <여우와 두루미>는 상대방의 특징에 맞게 배려하라는 교훈을 담고 있다. 사실 여우와 두루미의 가장 큰 차이는 식성이다. 그럼에도 이야기 소재가 그릇인 것은 ‘담음새’를 강조하려는 의도 때문일 것이다. 극단적인 사례지만 원효대사도 그릇, 그러니까 해골바가지에서 깨달음을 얻지 않았던가.

그릇이 차면 넘친다고 했다. 달은 둥글면 이지러진다 했다. 모두 성하면 쇠하는 삶을 담아낸 표현이다. 그래서 둥근 지구에 담긴 우리 삶도 담음새에 따라 달라진다 하면, 그릇된 생각일까.

 

Writer

지리멸렬하게 써 왔고, 쓰고 싶습니다. 특히 지리멸렬한 이미지들에 대해 쓰고 싶습니다. 사진이나 미술 비평처럼 각 잡고 찍어낸 것이 아닌, 그 각이 잘라낸 이미지들에 대해. 어릴 적 앨범에 붙이기 전 오려냈던 현상 필름 자투리, 인스타그램 사진 편집 프레임이 잘라내는 변두리들과 같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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