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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면… 먹을래요?”
영화 <봄날은 간다> 中

영화 <봄날은 간다>에서 ‘상우’(유지태)가 라면을 먹고 가는, ‘은수’(이영애)의 집에는 다소 뜬금없이 리처드 해밀턴의 작품이 걸려 있다. 사실 리처드 해밀턴의 작품 세계를 소개하는 글의 첫 줄로 위의 저 문장은 적절하지 않을 수도 있다. 그러나 우리는 적절하지 않은 것을 하는 것이 팝아트의 성질 중 하나라는 사실을 영국의 ‘그것(pop)’으로부터 배울 필요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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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Richard Hamilton, <Swingeing London 67>(1968~1969)


위 그림은 리처드 해밀턴의 <Swingeing London 67> 이다. 작품엔 다분히 매력적인(?) 순간이 포착되어 있다. 사진에는 60년대 영국 스윙잉(Swinging) 시대의 아이콘이었던 믹 재거(Mick Jagger, 우)와 해밀턴의 친구이기도 한 미술상 로버트 프레이저(Robert Fraser, 좌)가 불법 약물 소지죄로 경찰차에 실린 장면이 담겨 있다. 차가 사진기자들 사이를 지날 때 차창 밖에서 플래시가 터지고, 믹 재거는 그 순간 눈을 가리기 위해 손을 들어올린다. 수갑이 채워진 바람에 로버트 프레이저의 손도 함께 올라가게 되었는데, 이 사진은 바로 그 재미있는 순간을 포착한 것이다.
해밀턴의 ‘스윙잉 연작’은 바로 그 찰나가 재생산된 형태의 이미지‘들’이다. 그는 특정 사건이 매체를 통해 대중에게 전달되는 과정에서 그것이 변주, 왜곡, 혹은 재생산되는 모습을 시각적으로 제시하기 위해, ‘사진’이었던 최초의 이미지를 하드 에칭, 애쿼틴트(동판화), 엥보싱, 레트로 필름 콜라주 등의 다양한 기법으로 표현했다. 나는 그의 작품에서 레이어를 본다. 그리고 이 레이어라는 개념을 기준으로 리처드 해밀턴과 가장 상반된 지점에 선 인물로 항상 앤디 워홀을 생각해 왔다. 조금 극단적으로 표현하자면 기존에 널리 알려진 미국적 팝아트에 대한 개념을 바탕으로 브리티시 팝아트를 이해하려는 것은 완벽하게 무의미할 수 있다는 것을 말해보고자 한다.

 

브리티시 팝아트

팝(Popular)의 본질은 대중의 호응이다. 이는 소수의 몇몇 사람에게 어필하는 것이 아닌 대중으로부터의 인기를 겨냥한 작품이라면, 아이맥, 자유의 여신상, 국부론, 권리장전, 혹은 공산당선언과 파리의 에펠탑까지도 당신이 그것을 팝아트의 산물이라고 불러도 좋다는 것을 의미한다. 팝아트는 소수의 사람이 귀족적 태도로 지식, 권력, 생활양식 등 모든 것을 전유하고자 하는 노블레스 특유의 꼰대 정서에 대한 반감에서 시작한 장르다. 또한, 팝아트는 성조기, 츄파춥스, 에스콰이어, 캠벨 수프, 브라운 토스트기, US달러와 같은 대중적 아이콘들을 캔버스 안으로 침투시킴으로써 ‘특정인들의 취향’만이 프레임에 고이지 않도록 하는 기능을 수행한다. 더불어 사람들이 그들을 추종하게 하려고 프레임 속에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의미하기도 한다.

Richard Hamilton, <Self Portrait (cover of Living Art)>(1963)


물론 우리가 달달한 사탕, 예쁘고 멋진 연예인, 세련된 디자인의 애플 디바이스를 좋아하지 않을 이유는 없다. 그러나 우리는 더 많은 것을 본다. 중동 몇몇 나라에서 열악한 현실 아래 놓인 여성의 인권, 소수자와 인종에 대한 차별, 혹은 제 기능을 하지 못하고 고장 나버린 저널리즘이나 불합리하게 식민 지배를 당하는 어느 국가에 대해서도 우리는 주목한다. 듣기 좋은 노래, 먹음직스러운 음식, 그리고 아름다운 셀레브리티는 당연히 인기(Popular) 있기 마련이다. 그러나 그렇게 환원적으로 정제된 팩토리(Factory)식 팝아트만으로는 리처드 해밀턴의 전부를 이해하는 데 한계가 있다. 이는 우리가 재미있는 것만 보거나 맛있는 것만 먹지 않는 것과 비슷한 맥락이다.

 

팝아트가 주는 묘한 긴장감 

"Flowery allure is an irrelevant anachronism in the context of cultural ideas in our period. It takes perversity and a touch of irony to make it tolerable."

(이 시대에 꽃의 매력을 그리는 것은 시대착오적인 것이다. 그것을 꽤 그럴싸하게 만들기 위해선 작가적 외고집과 아이러니가 필요하다.)

2017년, 한국에서 있었던 전시의 일곱 가지 테마 중 하나인 꽃 연작에 대해 해밀턴이 한 말이다. 시대착오적인 사람이 되지 않을 방법은 간단하다. 시대착오적인 것을 그리지 않으면 된다. 디즈니 캐릭터나 보그, 에스콰이어 잡지에 나오는 세련된 패션 아이템, 핀업 모델 등의 이미지를 가지고 작업하면 된다.

Richard Hamilton, <Flower-Piece 1>(1994)


그러나 그는 꽃을 그렸다. 꽃 주변으로는 다른 결을 가진 아이템을 배치했고 그것이 ‘메멘토모리’ 같은 로마 시대의 전근대적 정서를 풍기길 기대했다. 그리고 그는 배치할 아이템으로 안드렉스 두루마리 휴지나 사람의 변 등을 택했다. 리처드 해밀턴은 정공법 속에서 길을 보는 사람이다. 나는 삶에서 정공법으로 사는 이들을 들여다보는 작업이 무척 중요하다고 생각한다. 팝아트는 추상이 캔버스 안으로 들어선 이래, 구상의 회화로 적극적으로 회귀한, 아니 기존의 구상 이상으로 그것을 머금은, 가장 시각적이며 그래서 가장 즉각적인 미술 양식이다. 우리가 책상에 펼쳐 놓은 채 수평적인 구도로 소비하는 디즈니 만화(Andy Warhol), 혹은 일러스트(Roy Lichtenstein)와 같은 평판(flatbed)작품을 벽에 건다는 사실이, 혹은 지하철 플랫폼에나 그려질 법한 낙서(Keith Haring)를 찬미하듯 거실에 전시한다는 사실 또한 묘한 긴장감을 가지게 한다. 즉 팝아트는 여러 측면에서 미술사에 등장했던 양식 중 가장 섹시한 장르일 수 있다.

 

섹시한 것만이 팝아트는 아니다

그러나 섹시한 것만이 팝아트는 아니다. 혹은 “Working for a mass audience doesn't mean that it's pop art.” (대중을 위한 작업이 꼭 팝아트를 의미하는 것은 아니다.)
자신이 기꺼이 팩토리 속 하나의 전사(轉寫) 기계로 전락해버리길 바랐던 한 아티스트의 방식을 부정하고 싶진 않다. 그러나 개인적으로는 그 방식으로 인해 현대 미술이 품고 있던 마지막 치트키가 너무도 유아적인 방식으로 휘발되어버렸다는 생각은 쉬이 떨치지 않는다.
“20달러짜리 작품을 사서 걸어둘 예정이라면 그냥 20달러를 벽에 걸어두라.” 혹은 “내가 실크 스크린을 이용하는 이유는 바로 기계가 되고 싶기 때문이다.”라는 것과 같은 태도가 예술이라 불리지 못할 이유가 없다. 모든 걸 부정하고 대화하지 않으려는 물신화(物神化)적인 태도는 다분히 퇴폐적이기까지 하다. 그러나 기계의 섹시함은 그저 획일성에서 나오는 것이 아니다. 기계는 청구하지 않는다. 대가를 바라지 않고도 오류를 범하지 않는다는 점에서 활자 그대로 ‘기계적인 매력’이 나오는 것이다. 필요에 따라 선택적으로 기계의 그늘에 숨어 있다가 달러를 회수할 때만 인간 혹은 아티스트의 탈을 쓰고 불쑥 나타나는 것과는 사뭇 다르다.

2014년 런던 테이트 모던에서 진행된 해밀턴 회고전에 관한 소개 영상

 
‘그래서… 도대체 뭘 보면 되는 건데?’
나는 이 글을 읽는 모두가 위 같은 질문을 품고 리처드 해밀턴에게 도착하길 바란다. 두께는 곧 돈이다. 두께는 축적(Accumulation)을 요구하고 그것은 시간과 공간을 할애할 때만 비로소 가능하다. 다시 말해 그것은 양산(量産)에 대한 안티테제다. <도대체 무엇이 오늘날의 가정을 그토록 색다르고 흥미롭게 만드는가?>를 그릴 당시만 해도 리처드 해밀턴은 대량 소비 사회에 내재해 있던 풍족함과 그것으로부터 뿜어져 나오는 구성원들의 당당함을 작품에 차용했다.

Richard Hamilton, <Just what is it that makes today's homes so different, so appealing?>(1956)

 

인간으로부터 탄생한 팝아트

그러나 미디어는 팝 아티스트들의 짐작보다 더 강력하게 영국의 젊은이들을 쥐고 흔들었다. 그들은 마약과 성적 방임주의, 그리고 향락적인 것에 지나치게 골몰했고 해밀턴은 그러한 시류를 자신의 예술에 섞어 쓸 정도로 비윤리적인 사람은 아니었다. 기계가 아닌 사람에겐 다른 의미의 팝아트가 필요했다. 그 후 그의 작품들에는 모종의 처연함이 느껴지게 되는데 그런 의미에서 <스윙잉 런던>이라는 작품은 또 다른 시작을 시사한다고 봐도 좋다.
그는 예술이 사람들을 계몽해야 한다거나 작품이 윤리적 책임을 지녀야 한다고 믿는 도덕주의자는 결코 아니다. 다만 그는 정치적, 사회적 이슈일지언정 그것을 외면하지 않는 예술을 했다. 그리고 그 결과로 그의 작품에 심리적, 물리적 레이어가 생겨났다. 그 레이어라는 것은 무언가로부터 거리를 두거나 벽을 치는 작가의 방어기제일 수도 있고 자신이 생각하고 있다는 것을 표현하기 위한 장치일 수도 있다. 그러나 분명한 건 사진을 오려 붙이고 자신의 작품을 다시 인화한 뒤 그 위에 다시 붓칠하며 메탈로 캔버스 프레임을 짜는 등의 행위들이 우리로 하여금 그의 작품에서 인성(人性)을 느끼게 한다는 점이다.

Richard Hamilton, <Dining Room>(1994~1995)


며칠 전 평범한 사진을 팝아트처럼 만들어주는 앱을 봤다. 어쩌면 우리는 삶의 대부분 시간 동안은 팝아트의 이미지를 앱의 필터 효과 같은 느낌으로 기억할 테지만 살다 보면 문득 기계가 아닌 인간으로부터 탄생한 팝아트가 보고 싶은 날도 있을 것이다. 보고 있다가 운이 좋으면 깨닫게 될지도 모른다. <봄날의 간다>의 은수의 집에 해밀턴의 그림이 걸려있던 건 꼭 우연 때문만은 아니라는 사실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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Writer

언어만으로 꽃과 대화하던 시절,
그 시절의 언어를 되찾을 방법으로 미술을 본다.
Flower Vowels라는 영상팀에서 글을 쓰고 영상을 만든다.
Flower Vowel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