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제(overall flowers)>

헨리 다거(Henry Joseph Darger, Jr., 1892~1973)는 미국 일리노이 주 시카고에서 태어나 그곳에서 평생을 보냈다. 병원 잡역부로 일하면서 퇴근 후에는 작은 방에서 자신을 위한 그림을 그리고 글을 썼다. 향수를 자극하는 동화 풍의 그림들은 얼핏 보아도 뇌리에 남는다. 화려한 화면은 들여다볼수록 기괴하고 두려움을 자극하지만, 어딘가 폭발적인 에너지가 느껴진다.

그의 사망 직전 발견된 양과 크기 면에서 압도적인 글과 그림은 지극히 독창적인 방식으로 작가 평생에 걸쳐 제작되었다. 정식으로 미술을 배운 적이 없기 때문에 사용되었을 사진과 그림의 콜라주(Collage), 잡지의 일러스트레이션, 사진, 만화 등에 먹지를 대고 베껴 옮긴 트레이싱(Tracing)은 그가 주로 사용한 기법이다. 화려하고 서정적인 느낌을 주는 수채물감 채색, 자연물과 초자연적 반인반수들이 자아내는 환상적인 분위기, 일부 등장인물들의 모호한 성별, 소아성애와 사디즘의 흔적 등은 헨리 다거의 작품을 특징짓는 중요한 요소들이다. 

반인반수 생물인 ‘블레긴(Blegin, ‘Blengigomenean’의 줄임말)’들이 곳곳에서 다양한 모습으로 등장한다

작가가 거의 평생을 들여 만들어 낸 <비현실의 왕국에서(In the Realms of the Unreal)>라는 작품은 가상의 행성을 배경으로 한 전쟁 서사시를 중심으로 한다. 총 15,145페이지나 되는 방대한 서사시의 주인공은 ‘비비안 걸스’. 7명의 비비안 가(家) 소녀들이 선(善)의 역할에서 남성 어른들로 상징되는 악과 맞서 싸운다. 전형적인 교훈적 선악 구도에 가톨릭 색채와 선정적인 폭력이 주를 이루는 이야기와 삽화로 만들어졌다. 비비안 걸스는 아름답고 연약해 보이는 어린이들이지만, 선한 가치와 신의 의지를 대변하는 정예 부대로서 전투 용사의 기량을 갖추었다. 작가는 이 이야기에 두 개의 결말을 만들어주었으니, 작가가 이 세계를 오랜 시간 창조하면서 강조하려 한 것이 이야기의 완결성만은 아닐 것이다. 비현실의 왕국에서 어린이들은 노골적이고 상세하게 그려지는 잔인한 폭력의 희생양이자, 천사처럼 완전무결하고 사랑스러운 존재로 묘사된다. 이들은 폭력에 노출되고, 행복하게 놀고, 감금되고, 탈출하고, 자유를 되찾는다. 다거는 이 과정을 상세하고 몰입적으로 묘사하면서 카타르시스를 얻는 것처럼 보인다. 더불어 어린이들, 등장하는 남성상들, 어린이들의 보호자를 자처하면서 종군기자처럼 어린이들의 고통을 상세하게 전하는 식의 개입은, 작가의 개인사에 비춰 그 자신의 분열된 캐릭터로 보는 것이 일반적 해석이다. 

<무제(Image of strangled child in sky)>, 부분

20세기 초부터 인쇄물에 등장하는 어린이들의 모습을 트레이싱했기 때문에 현재의 시선으로서는 더욱 독특한 작풍으로 느껴지는 그림은 프로페셔널의 노련함과 교육의 흔적이 없는 아마추어적인 자유로움으로 가득하다. 반면 헨리 다거의 그림에 영향을 받은 이들은 예술 교육 경험이 있는 이들이 다수였다. 우선 일상성과 자기 고백, 연약하고 하찮은 것들 따위 현대 예술의 주제와, 문화적 레퍼런스의 활용 등 다거의 표현 양식 및 서사시 형식 사이의 공명을 상상하기가 어렵지 않다. 2001년 아메리칸 포크아트 미술관(American Folk Art Museum)에서 열린 전시 <다거리즘: 동시대 예술가들과 헨리 다거(Dargerism: Contemporary Artists and Henry Darger)>는 말 그대로 다거의 영향을 받은 11명의 현대미술가들을 한 자리에 모은 전시였다. 헨리 다거에 대한 관심이 특히 뜨거웠던 2000년대 초반 이후에도 만화와 일러스트레이션, 미술 분야에는 그에게 영향을 받았다거나 좋아하는 작가로 꼽는 이들이 여전히 많다. 미술뿐 아니라 다른 예술 영역에도 영향을 미쳤다. 어린 다코타 패닝(Dakota Fanning)이 나레이션을 맡아 화제가 된 전기 영화 <비현실의 왕국에서(In The Realms Of The Unreal)>(2004) 처럼 그에 관한 영화들이 만들어졌고, 수프얀 스티븐스(Sufjan Stevens)와 나탈리 머천트(Natalie Merchant) 같은 음악가들은 그에게서 영감을 받은 노래를 만들었다.

2004년 작 영화 <비현실의 왕국에서> 포스터

이렇듯 지금은 많은 이들의 사랑을 받고 있지만, 자신이 미술가라는 자각을 갖지 않고 극히 자족적인 글과 그림을 생산해낸 탓에 그가 주목할 만한 ‘미술가’라는 인식은 후대 사람들에 의해 발견되고 만들어진 것이다. 헨리 다거는 ’아르 브뤼(Art Brut)’ 혹은 ‘아웃사이더 아트(Outsider Art)’의 스테레오 타입으로 알려졌다.* 이 용어들이 일컫듯 사회적 소외계층이자 정신병력을 가진 작가의 자폐적 성향과 강박적이고 망상적인 창작 방식, 극단적이고 독창적인 표현은 대표적 특징이다. 그가 노년에 집필한 5,000여 페이지에 달하는 자서전 <나의 역사(The History of My Life)>에 담은 유년기는 여동생과 어머니의 상실, 가톨릭 계열 학교와 아동 양육 기관에서의 생활, 정신병 진단으로 인해 들어가게 된 수용소에서의 억압적 경험 등이 고스란히 담겨있다. 자족적인 목적으로 제작한 서사인 만큼, 성인으로서의 객관적인 평가와 성숙한 뉘앙스보다 허구와 과장으로 뒤덮여 있다는 것이 이 자서전에 관한 다수의 평가이지만, <나의 역사>는 마찬가지로 복잡다기한 그의 작품 세계를 이해하는 중요한 열쇠가 되었다. 유년기에 형성된 어린이들과 남성성에 대한 분노와 갈망이라는 양가적 심리, 이후에도 끊임없이 현실과 충돌했던 경험에 관한 기술 등은 그의 작품을 해석하는 길잡이다. 여기에 더해 죽음을 앞둔 독신의 작가가 자신이 살던 원룸을 비우게 되면서, 집주인이 그의 방을 가득 채운 작품들의 예술적 가치를 알아보고 이를 발굴, 공개했다는 드라마틱한 사연은 ‘아웃사이더 아티스트’의 전형적인 이미지를 완성했다. 

재현한 작가의 방

그러나 여느 ‘아웃사이더 아티스트’들과는 달리 다거의 작품은 특히 미술관으로부터 큰 호응을 받았다. 2000년, 뉴욕의 모마(MoMA) P.S. 1 갤러리에서 열린 기획전 <전쟁의 참상(Disasters of War)>에는 18세기 스페인 화가 고야(Francisco de Goya y Lucientes, 1746~1828), 고야의 연작에서 영감을 받은 채프먼 형제(Jake(1966~) and Dinos(1962~) Chapman)의 시리즈 작품과 함께 전시되기도 한다. 2001년 아메리칸 포크아트 뮤지엄은 헨리 다거 연구소(Henry Darger Study Center)를 설립하고, 영구 소장한 헨리 다거 컬렉션으로 몇 차례 기획전을 열었다. 이를 필두로 미국 곳곳의 미술관이 그의 작업을 두루 소개한다. 헨리 다거의 작품을 영구 소장한 미술관에는 현대미술관(Museum of Modern Art, MoMA)도 포함한다. 

<무제(Hands of fire)>

아무리 알려진 작가나 몇백 년 전 위인이라 하더라도, 아주 사적인 일기나 서간문 따위를 읽을 때 마주치게 되는 당혹감을 생각해보면 그의 그림은 몰래 훔쳐봐야만 할 것 같은 기분이 들지 모르겠다. 헨리 다거가 지금의 현실을 알게 된다면 어떻게 말할지 궁금하지만, 언제까지나 미스터리로 남을밖에. 대신 그가 생전에 남긴 메모를 덧붙인다. 

 “금광의 모든 금으로도, 온 세상의 은으로도 이 그림들을 나에게서 살 수 없으리. 이들을 훔치거나 훼손하는 이들에게 복수, 잔혹한 복수가 있을지어라.”

 

* ‘아웃사이더 아트(Outsider Art)’는 예술가 장 뒤뷔페(Jean-Philippe-Arthur Dubuffet, 1901~1985)가 창안한 개념인 ‘아르 브뤼(Art Brut)’를 영역(Roger Cardinal, 1972)한 단어다. 애초 정신 질환을 앓는 환자들의 창작 작품을 조사하던 장 뒤뷔페가 이들의 작품을 지칭한 말로, 이후 정식적인 미술교육을 받지 않은 이들이 제도 바깥에서 스스로 창작하는 일을 총칭하게 되었다. 이 개념이 고안된 역사가 지시하듯 ‘광기의 미술’이라는 뉘앙스 속에서, 스스로의 세계가 확고하고 자폐적인 경향을 띠는 제도권 바깥의 사적인 예술작품과 예술가들을 이르는 말로 자리 잡았다. 하지만 ‘아웃사이더’ 혹은 ‘거칠고 기괴한(brut)’처럼 병증과 사회적 고립 같은 부정적인 고정관념을 반영하는 용어에 대한 반성이 있었고, ‘독학 예술/예술가(Self-taught Art/Artist)’라는 대안적 용어에 해서는 구분되는 특성들이 희미해진다는 문제가 지적되었다. 또 제도권 미술과 비제도권-아마추어 미술이 현대의 미술관에서 뒤섞이게 되면서, 그사이 구분의 문제가 항상 존재한다. 그래서 이런 용어들을 지역이나 개인의 일상적 특징을 강조하는 ’버내큘러(Vernacular)’로 대체하는 경향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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