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라카미 하루키(むらかみはるき, 1949~)

<1Q84>로부터는 7년, <색채가 없는 다자키 쓰쿠루와 그가 순례를 떠난 해>로부터는 4년이 흘러 <기사단장 죽이기>가 출간되었다. 일본에서는 서점이 문을 열기도 전에 독자들로 인해 긴 행렬이 만들어지고 한국에서도 예약판매 1위를 기록했다. 어느 출판사의 카피라이팅을 빌리면 2017년은 ‘하루키의 이야기가 폭발한 해’이다.

<기사단장 죽이기>의 주인공은 초상화가다. 6년간 함께한 아내에게 이혼을 통보받고 미대 동기인 아마다 마사히코의 도움으로 그의 아버지 아마다 도모히코의 산꼭대기 집에서 머물게 된다. 그리고 그곳에서 예기치 않은 사람들을 만나고 당연하게도, 예기치 않은 사건들에 휩싸이게 된다. 여타 하루키의 소설이 그렇듯 사건은 때로는 일상의 영역에서 비일상의 영역으로 흘러간다. 그리고 긴 3인칭 시점의 글쓰기에서 다시 1인칭 시점으로 돌아온다. 또한 보통 사용하던 ‘보쿠’(남자가 자신을 칭할 때 사용하는 말)에서 ‘와타시’(남녀 모두가 자신을 지칭할 때 사용할 수 있는 말)로 바뀐다. 주인공의 이름은 끝까지 나오지 않는다.

많은 사람들이 하루키 월드에 매혹된다. 부드러운 문체, 생동한 묘사, 개인을 소중하게 생각하는 가치관, 꿈을 걷는 듯한 섹스, 재즈와 클래식. 하루키의 매력을 말하자면 여러 가지가 있겠지만 그중에서도 나는 하루키 월드의 작은 인물들에 매력을 느끼곤 한다. 때때로 그들은 무심코 지나가다가 다시 고개를 돌리게 만드는 풍경처럼 우리를 사로잡는다. 비록 그들에게 이름도, 국적도, 나이도 없을지라도.

※소설 <기사단장 죽이기>에 대한 다량의 스포일러가 포함돼 있습니다.

 

곰의 습격을 받아 죽은 일흔세 살 노인

주인공 ‘나’가 아내 유즈에게 이혼을 통보받은 후 친구에게 거저나 다름없는 가격에 산 빨간색 푸조를 몰고 정처 없이 드라이브를 떠난다. CD플레이어로 셰릴 크로를 듣기도 하고 이무지치 합주단이 연주한 멘델스존 8중주곡, 밀트 잭슨의 블루스 솔로를 듣다가 밀린 빨래가 끝나기를 기다릴 겸 근처 이발소에서 머리를 자르고 수염을 깎는다. 그리고 그곳의 텔레비전에서 나오는 NHK 뉴스에서 노인의 죽음을 듣는다.

그나마 유일하게 관심이 간 것은 훗카이도 산속에서 혼자 버섯을 캐던 일흔세 살 노인이 곰의 공격을 받아 사망했다는 뉴스였다. 겨울잠에서 깨어난 곰은 배고픔에 포악해진 상태라 매우 위험하다고 아나운서가 전했다. 나는 종종 텐트에서 자고 마음 내키면 혼자 숲속을 산책하곤 했으므로 곰의 공격을 받은 것이 나였대도 이상할 게 없었다. 곰은 어쩌다보니 나를 피해서 어쩌다보니 그 노인을 덮친 것이다. 그러나 어쩐 일인지 죽은 노인을 동정하는 마음은 일지 않았다. 노인이 겪었을 고통과 공포와 충격을 헤아리기도 불가능했다. 뭐랄까, 노인보다 오히려 곰에게 공감했을 정도다. 아니, 공감 같은 건 아니다. 차라리 공모 의식에 가까울지도 모른다. - 문학동네 <기사단장 죽이기> 1권 45p ~ 46p

무라카미 하루키는 과거 도쿄에서 재즈 클럽 ‘피터 캣’을 운영했을 정도로 재즈에 조예가 깊다. Via parisreview

 

친밀함을 거부하는 20대 유부녀

‘나’가 그림교실의 강사로 일하면서 처음 잔 여자. 이십 대 후반의 유부녀로 사립 고등학교 선생인 남편은 그녀에게 손찌검을 한다. 물론 얼굴은 건드리지 않는다. 그래서 그녀의 몸에는 멍이나 상처로 가득했다. 그녀는 상처를 보이는 것을 무척 싫어해서 옷을 벗고 섹스를 할 때는 언제나 불을 전부 껐다.

그녀는 섹스에 거의 흥미가 없었다. 성기가 늘 충분히 젖지 않아서 삽입하려 하면 통증을 호소했다. 천천히 공들여 애무하고 젤을 써도 효과가 없었다. 통증은 격렬하고 좀처럼 가라앉지 않았다. 때때로 큰 소리를 지를 정도였다. 그런데도 그녀는 나와 섹스를 하고 싶어했다. 적어도 싫어하지는 않았다. 왜 그랬을까? 어쩌면 그녀는 고통을 원했는지도 모른다. 아니면 쾌감이 없기를 원했는지도 모른다. 사람은 자신의 인생에 실로 별의별 것을 다 원하는 법이니까. 그러나 그녀가 원하지 않는 것도 있었다. 친밀함이었다. - 문학동네 <기사단장 죽이기> 1권 19p ~ 20p

 

멘시키에게 신세를 진 조경업자

사십 대 중반에 작지만 다부진 체격의 남자. 구릿빛 얼굴에 희미한 수염 자국이 보인다. 전형적인 현장에서 일하는 사람의 모습이다. 일전에 멘시키에게 신세를 진 적이 있다. 어쩌면 사업적인 부분에서 그에게 도움을 받았을지도 모른다. 멘시키의 부탁으로 종소리가 울리는 사당 앞 구덩이를 파헤치는 작업을 돕는다. 시종일관 그의 표정에서 멘시키에 대한 경의를 느낄 수 있다.

“그나저나 여기 좀 묘하군요.” 감독은 말했다. “뭐라고 표현하긴 힘든데, 이 구덩이는 어딘가 수수께끼 같은 분위기가 있어요. 대체 누가 무엇을 위해 이런 걸 만들었을까요. 그 옛날에 이만한 돌을 산 위로 날라와 쌓으려면 상당한 공력이 필요했을 겁니다.” - 문학동네 <기사단장 죽이기> 1권 281p

 

패밀리레스토랑에서 만난 젊은 여자

하루키 소설에는 주인공의 의사를 무시하고 갑작스레 다가오는 여자가 한 명쯤은 있다. 시내를 벗어난 국도변 패밀리레스토랑에서 ‘나’가 문고판 책을 읽으며 새우카레와 하우스샐러드를 먹고 있을 때 그녀는 느닷없이 맞은편에 앉았다. 그녀가 주문한 치즈케이크와 커피를 ‘나’가 계산했지만 고맙다는 말은 전혀 하지 않는다. 어떤 남자에게 쫓기고 있기 때문에 지인인 척 연기를 해달라고 한다. 그리고 함께 모텔로 가서 ‘나’에게 가학적인 섹스를 요구한다.

“날 때려줘.” 한창 몸을 섞고 있을 때 여자가 말했다. 여자의 손톱은 내 등에 단단히 박혀 있었다. 땀 냄새가 짙게 풍겼다. 나는 시키는 대로 여자의 얼굴을 손바닥으로 때렸다.

“그렇게 말고, 괜찮으니까 진지하게 제대로 때려.” 여자가 세차게 고개를 저으며 말했다. “더, 더, 힘을 줘서, 과감하게 때려. 자국이 남아도 상관없어. 코피가 날 정도로 세게.”

나는 여자를 때리고 싶은 마음이 없었다. 내게는 원래 그런 폭력적인 성향이 없다. 전혀라고 해도 좋을 만큼 없다. 하지만 여자는 진지하게 구타당하기를 원했다. 여자가 필요로 하는 것은 진짜 고통이었다. - 문학동네 <기사단장 죽이기> 1권 493p

 

삼라만상 모르는 게 없는 외삼촌

젊은 독신으로 유전자 연구를 하고 있다. 키가 크고 과묵한 편이며 세상일에 조금은 초연한 구석이 있지만 뒤끝 없는 깔끔한 성격이다. 열렬한 독서가이며 어디서든 책을 읽을 수 있다. 갖가지 꽃과 벌레의 이름을 알고 풍혈과 바람구멍을 구별할 줄 안다. 등산을 무척 좋아해서 직장도 일부러 야마나시에 구했다. ‘나’와 누이동생 고미는 어린 시절 외삼촌의 집에 놀러 간 적이 있는데 그때 외삼촌은 그들을 데리고 후지산의 풍혈을 보여주었다.

어느 날, 내친김에 조금 멀리 나아가 후지산의 풍혈까지 가보았다. 후지산 주위의 많은 풍혈 중에서도 꽤 규모가 큰 곳이었다. 삼촌은 그 풍혈에 대해서도 많은 것을 알려주었다. 현무암 동굴이라 메아리가 거의 울리지 않는다는 것. 여름에도 기온이 올라가지 않아 옛날 사람들은 겨우내 잘라낸 얼음을 동굴 속에 보존했다는 것. 일반적으로 사람이 들고 날 수 있는 크기의 구멍을 ‘풍혈’, 들고 날 수 없는 작은 구멍을 ‘바람구멍’으로 구별한다는 것. 정말이지 뭐든 모르는 게 없는 사람이었다. - 문학동네 <기사단장 죽이기> 1권 412p

골짜기 맞은편 호화로운 저택에 사는 신사 멘시키는 <위대한 개츠비>의 개츠비를 닮았다

 

멘시키 집의 바텐더와 요리사

멘시키는 ‘나’와의 저녁 식사를 위해 하야카와 항구 쪽에 옛날부터 단골로 가는 프렌치 레스토랑의 바텐더와 요리사를 직접 자신의 집으로 초빙했다. 놀랄 만큼 핸섬하고 동작이 우아한 바텐더가 북극지방처럼 차가운 맛의 발랄라이카를 내오고 삼십 대 중반에 키가 크고 뺨에서 턱까지 짧은 수염을 기른 셰프가 바다거북 수프와 사슴고기 스테이크를 만든다.

발랄라이카는 보드카와 쿠앵트로와 레몬주스를 3분의 1씩 섞어서 만드는 칵테일이다. 과정은 심플하지만 북극지방처럼 쨍하게 차갑지 않으면 맛이 제대로 나지 않는다. 어설픈 솜씨로는 미지근하고 밍밍해지기 일쑤다. 그러나 그 발랄라이카는 놀라울 정도로 맛있었다. 거의 완벽에 가깝게 예리한 맛이 났다.
“맛있는 칵테일이네요.” 나는 감탄해서 말했다.
“솜씨가 좋은 사람이거든요.” 멘시키가 선선히 말했다. - 문학동네 <기사단장 죽이기> 1권 429p

셰프가 부엌을 나와 식당에 얼굴을 내밀었다. 조리사용 흰옷을 입은 키 큰 남자였다. 나이는 삼십 대 중반 정도, 뺨에서 턱까지 짧고 검은 수염이 덮고 있었다. 그가 나를 향해 정중히 인사했다.
“훌륭한 요리였습니다.” 나는 말했다. “이렇게 맛있는 요리는 거의 처음이에요.”
솔직한 감상이었다. 이렇게 세련된 코스를 짜는 요리사가 오다와라의 어항 근처에서 잘 알려지지도 않은 작은 프렌치 레스토랑을 운영한다는 사실이 아직 잘 믿어지지 않았다.
“감사합니다.” 그가 상냥하게 말했다. “멘시키 씨께 늘 신세 지고 있습니다.”
그리고 가볍게 고개를 숙인 후 부엌으로 물러났다. - 문학동네 <기사단장 죽이기> 1권 446p

 

유즈의 아버지 

‘나’의 부인이었던 유즈의 아버지는 일류 은행 지점장이었다. 유즈의 오빠인 아들도 역시 은행원으로 아버지와 같은 은행에서 근무했다. 유즈의 아버지는 ‘나’에게 우호적이지 않았다. 미래가 불투명한 초상화가는 엘리트인 그의 성에 차지 않기 때문이다. ‘나’ 또한 그것을 알고 있었고 무슨 말을 들어도 참으려고 노력했지만 그의 설교를 듣고 있다 보니 생리적인 혐오감이 치밀어 올랐다.

“결혼하는 거야 본인 자유지만 오래가진 않을 걸세. 뭐, 기껏해야 사오 년이겠지.” 그것이 그날 헤어지며 유즈의 아버지가 내게 마지막으로 한 말이었다. - 문학동네 <기사단장 죽이기> 1권 481p

이 말은 ‘나’에게 일종의 저주처럼 따라다녔다. 그리고 6년째 주인공은 이혼을 통보받게 된다. 몇 년 더 버텼을 뿐이다.

 

진하고 묵직한 커피를 만드는 노인

‘나’가 그림교실에 가기 위해 차를 몰고 달리다가 종종 들리는 커피숍의 주인.

주차장에 차를 세우고 수업 시작까지 시간이 좀 남아서 여느 때처럼 커피숍에 들어가 커피를 마셨다. 스타벅스처럼 밝고 기능적인 가게가 아니라 초로의 주인 혼자 오래전부터 꾸려온 골목길 커피숍이다. 진하고 새카만 커피를 묵직한 잔에 내준다. 오래된 스피커에서 오래된 재즈가 흐른다. 빌리 홀리데이나 클리퍼드 브라운 같은. - 문학동네 <기사단장 죽이기> 2권 242p ~ 243p

 

무라카미 하루키. Via dailybeast

 

피아노를 연주하기 위해 태어난 아마다 쓰구히코

화가 아마다 도모히코의 남동생. 도쿄 음악학교를 다니고 피아노에 재능이 있다. 특기는 쇼팽과 드뷔시로, 장래가 촉망받았으나 서류상의 실수로 징병 되어 난징 전투에 투입된다. 평생을 피아노만 치던 섬세한 감수성의 그에게 총칼로 사람들을 벤다는 것은 생각해본 적도, 할 수도 없는 일이었지만 당시 군국주의 사회에서 그것은 용납할 수 없는 일이었다. 아마다 쓰구히코는 자신의 나약함을 없애기 위해 강제로 수차례 포로들을 베어 죽이라는 명령을 받아야만 했다. 제대 후 본가 다락방에서 날카롭게 갈린 면도칼로 손목을 그어 자살한다.

“어쨌든 삼촌은 상관인 장교가 내준 군도로 포로의 목을 베어야 했어. 육군사관학교를 갓 졸업한 젊은 소위였어. 물론 삼촌은 원하지 않았지. 그러나 상관의 명령을 거역하는 건 엄청난 일이야. 단순한 제재 정도로 넘어가지 않아. 제국 육군에서 상관의 명령은 곧 천황 폐하의 명령이었으니까. 삼촌은 떨리는 손으로 어찌어찌 검을 휘두르긴 했지만, 원래 힘이 좋은 편도 아니고 더욱이 대량 생산된 싸구려 군도잖아. 인간의 목이 그렇게 간단히 잘릴 리 없지. 제대로 숨통을 끊지도 못하고, 주위는 피바다가 되고, 포로는 고통에 뒹굴고, 실로 비참한 광경이 펼쳐지고 말았어.” - 문학동네 <기사단장 죽이기> 2권 109p

 

수리부엉이

한밤중 ‘나’가 잠들어 있을 때 천장에서 소리가 나곤 했다. 그 소리를 따라가 보니 지붕 밑으로 이어지는 문을 발견한다. 문을 열고 들어가자 그곳에 수리부엉이가 있었다. 낮에는 이곳에서 잠을 자고 밤에는 사냥을 나선다. 수리부엉이는 길조로 복을 가져다준다고 한다.

새가 겁을 먹지 않도록 나는 회중전등을 끄고 조금 떨어진 곳에서 가만히 관찰했다. 수리부엉이를 가까이서 보기는 처음이었다. 새라기보다 날개 달린 고양이 같았다. 아름다운 생물이다. - 문학동네 <기사단장 죽이기> 1권 104p

Writer

만화를 그리고 소설을 쓴다. 때때로 움직임 작업을 한다. 그 다음에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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