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내외를 불문하고 약진하는 여성영화감독들의 이름이 눈에 띈다. 사실상 이제 막 활동을 시작한 감독들보다 (여전히 잡음이 많은) 패러다임의 변혁 속에 마침내 조명된 시네아스트들이 훨씬 많을 것이다. 사사로운 여성영화감독의 리스트에 꼽아 두었던 사람을 밝히고자 꺼낸 말이었지만 마음을 고쳐먹었다. 새로운 물결에 잡음을 더하지 않기 위해서라도, 감독 앞에 붙은 ‘여성’이라는 수식은 구태여 필요치 않아 보인다. 헝가리의 주목할 만한 감독 일디코 엔예디와 그의 신작 <우리는 같은 꿈을 꾼다>에 대한 이야기를 시작한다.

<우리는 같은 꿈을 꾼다> 트레일러

 

<우리는 같은 꿈을 꾼다> 스틸컷

일디코 엔예디는 1989년 <나의 20세기>로 칸영화제 황금카메라상을 받고 그해 뉴욕타임스 선정 최고의 영화 10편에 오르기도 하는 등 큰 주목을 받았다. 이후 <마법사 시몬>(1999)을 발표한 지 무려 18년 만에 <우리는 같은 꿈을 꾼다>로 돌아와 베를린 영화제 황금곰상 및 시드니영화제 작품상을 거머쥐었다. 엔예디 감독이 이렇게 오랜 공백을 가지게 된 데는 제작비 투자를 받지 못해 연출이 좌절됐던 안타까운 배경이 있다. 그는 전작들에서 영적 믿음으로부터 기인한 관계와 소통이라는 화두를 환상적 메커니즘의 방식으로 보여주었다. 다시 <우리는 같은 꿈을 꾼다>에서 그는 어떤 이야기를 꺼내 놓았을까.

<나의 20세기>(1989) 스틸컷
일디코 엔예디 감독
<마법사 시몬>(1999) 포스터
* 보는 시각에 따라 <우리는 같은 꿈을 꾼다>의 스포일러일 수 있는 내용이 있습니다.

 

 

결여가 꾸는 꿈

영화는 암수 사슴 한 쌍이 하얀 설경을 거니는 아름다운 장면으로 시작한다. ‘마리아’(알렉상드라 보르벨리)는 소 도축장에 대리로 파견된 품질검사원이다. 하지만 그녀의 뻣뻣하고 비사교적인 태도에 기존의 직원들은 거부감을 갖는다. 공장의 재무이사 ‘엔드레’(게자 모르산이) 역시 그녀에게 다가가보지만 그녀의 딱딱한 태도와 말투에 당혹감을 느낀다. 이후 사내 교미 가루 도난사건이 불거지자 범인을 찾기 위한 목적으로 모든 직원들은 연례 정신위생검사를 앞당겨 받게 된다. 이 상담 과정에서 마리아와 엔드레는 매일 밤 서로 동일한 꿈을 꾸고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된다. 두 사람이 꾸는 꿈은 그들 스스로가 사슴이 되어 눈밭을 거니는 꿈이다.

마리아가 관계에 서툴고 유아적 자아에 머문 이유는 그녀의 비정상적으로 발달한 기억 때문일 수 있다. 망각의 동물인 인간은 크고 작은 불편한 기억을 잊어버리기도 하기 때문에 그런대로 살아갈 수 있는지 모른다. 그렇기에 마리아의 비상한 능력은 달리 말해 엄청난 불운이다. 왼쪽 팔이 불구인 엔드레가 육체의 결핍을 가졌다면 마리아는 정신적으로 결핍을 앓고 있는 셈이다. 그러나 그들의 결핍은 해소의 대상이 아니다. 엔드레는 너무 많은 관계와 경험들로 피폐해졌고 마리아는 처음 느낀 감정이 좌절되자 모든 것을 놓아버린다.

 

가능한 영혼들

도입부에서 영화는 도축장의 소를 독특하게 담아내는데, 소의 시점 쇼트로 우리 바깥의 도살업자를 바라본 뒤 태양을 응시하는 장면이다. 이어서 나이든 직원이, 다시 엔드레가 마찬가지로 태양 빛을 응시한다. 반면 새로 출근한 마리아는 어색한 몸짓으로 콘크리트 기둥 옆에 서서 응달에 발끝을 밀어 넣는다.

새로 채용된 직원 산도르를 면담하는 장면에서 엔드레는 흥미로운 말을 던진다. “여기(도축장)에서 가공되는 소에게 연민을 품지 못한다면 버티기 힘들 것”이라는 이상한 조언. 상식적으로 산 짐승을 도륙해 가공상태의 육류로 만들어내는 것이 목적인 공장에서 일하기에는, 죽어 나가는 소에게 연민을 갖지 않는 편이 훨씬 쉬울 것이다. 그런데 재무이사인 엔드레가 던져 놓은 이 의아한 역설은 도대체 뭔가. 영화의 원제 <On body and soul>이 말하듯 <우리는 같은 꿈을 꾼다>가 구축하고 있는 꿈과 현실의 공간은 곧바로 영혼과 육체라는 관념으로 직결된다. 앞선 소의 시점 쇼트로 인해 관객들은 소의 영적 층위를 간접 체험했다. 그 결과, 바로 이어지는 무감한 소의 살육 신은 한층 더 당혹스럽게 다가온다. 그렇다면 엔드레가 산도르에게 건넨 충고는 영혼에 대한 인식이 담긴 엔예디 감독의 이원론적 세계관을 드러내는 전언은 아닐까. 엔드레와 마리아가 공유하는 꿈속에서 그들이 동물이 되어있는 현상은 매일같이 동물을 마주하는 직업적 필연, 나아가 몸과 영혼의 존재에 대한 가능성과 무관하지 않을 것이다.

 

가능한 육체

영화에서 현실세계와의 교차 지점에 제공되는 사슴의 세계는 감독의 환상적 주제가 두드러진 영역이다. 하늘을 찌를 기세로 곧게 뻗은 나무들 사이로 하얀 눈이 빼곡히 덮인 설경이다. 수사슴과 암사슴은 서로를 바라보다가 시냇물을 마시기도 하고 눈을 헤집어 씹을 풀을 찾기도 한다. 이 사슴 한 쌍이 곧 작중 두 인물과 다름 아니듯, 서로를 바라보는 클로즈업 쇼트에선 우리가 인식한 영화 속 현실이 혹시 사슴이 꾸는 꿈은 아닌가 싶은 착각까지 든다. 번잡한 현실과는 달리 고요한 자연과 동물의 생리적 리듬대로 흐르는 이곳은 어떤 이성의 개입도 없는 초월적인 세계처럼 보인다.

일디코 엔예디는 영적으로 이어진 두 인물의 이상동몽이라는 기이한 설정으로 다시 한 번 영혼의 가능한 세계에 방점을 두고 있다. 그러나 영혼과 육체를 상위와 하위의 개념, 혹은 선행과 후행의 논의 지점에 놓으려는 건 아닌 것 같다. 오히려 전작들로 표현해 냈던 영혼의 자리에 ‘육체’까지 데려와 놓았다는 느낌이다. 앞서 태양을 바라봤던 나이든 직원은 극의 후반부에서 마리아에게 이렇게 말한다. “다들 몸짓의 영향을 과소평가하지요.” 게다가 영화는 마침내 두 사람의 섹스가 이루어질 때 결말로 향한다. 이렇게 몸과 영혼, 현실세계와 사슴의 세계, 다시 마리아와 엔드레는 모종의 연결고리로 이어져 있다. 종국에 이르러서는, 정신의 교감과 몸의 대화 끝에 이들을 잇던 꿈은 더 이상 필요치 않게 된다.

꿈을 다룬 영화들은 종종 그 자체로 매혹적이다. 시각인 동시에 체험의 매체인 영화에서 ‘꿈’은 현실과 환상을 매개하며 제3의 차원으로 가는 문을 열어준다. 차안(此岸)의 자리에 피안(彼岸)을 데려온 <우리는 같은 꿈을 꾼다>의 신비로운 세계에는 쉽게 이질적인 감흥이 들지 않는다. 일디코 엔예디 감독이 일상성 가운데서도 영민하게 포착한 감각들, 빛과 화면이 빚어낸 온도 차가 ‘같은 꿈을 꾸는 우리’를 가능하게 만드는 것은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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Writer

예측 불가능하고 아이러니한 세상을 닮은 영화를 사랑한다. 우연이 이끄는 대로 지금에 도착한 필자가 납득하는 유일한 진리는 '영영 모를 삶'이라는 것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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