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들어서 알게 되었다. 현재 이십 대 중후반 또는 삼십 대 초중반의 사람들 중에 의외로 피아노 학원에 다니면서 어린 시절 처음 순정만화를 접하게 된 경우가 많았다는 것을. 정확한 통계를 내본 것은 아니니 백 퍼센트 단정할 수는 없지만, 나의 경우에 그랬고, 이야기를 나누다 보니 주변에도 그런 친구들이 제법 있었다. 미용실에 가면 기다리는 동안 패션잡지를 볼 수 있는 것처럼, 어린아이들이 지루하지 말라고 만화잡지를 사놓은 피아노 선생님들의 배려가 있어서였다. 그 덕분에 나는 ‘ 밍크', ‘윙크', ‘파티', ‘이슈', ‘ 쥬티', ‘ 오후' 등 지금 와서 되돌아봐도 가슴이 두근거리는 만화잡지의 세계를 알게 되었고, 어린 시절부터 적은 용돈을 쪼개가며 만화책을 한 권 두 권 사 모으는 한국 순정만화의 팬이 되어버리고 말았다.

그래서 그런지, 제법 시간이 흘렀지만 아직도 머릿속에서 지워지지가 않는 사건이 있다. 2016년 청강만화역사박물관에서 열린 <여성 만화의 세계 – 소녀, 어른이 되다> 기획전시에서 어째서인지 1990년대 순정만화에 대한 소개가 고스란히 삭제가 되었던 것. 전시만 보면 1980년대 이후의1990년대에는 순정만화가 존재하지도 않고, 2000년대로 훌쩍 넘어와 웹툰의 시대가 열린 것 마냥 오해할 수 있는 소지가 다분한 기획이었다. 물론, 어른이 된 지금 시점에서 되돌아보면 대체용어가 마땅치 않아서 사용하고 있는 ‘순정만화’라는 용어 자체가 애초에 다분히 여성혐오적인 시각을 담고 있는 멸칭이기도 하다는 생각이 들기도 한다. ‘여자들이나 보는’ ‘반짝거리는 보석 눈에 꽃 배경이나 흩날리는’ ‘진지한 내용이 없고 남녀가 만나는 연애물밖에 없는’ 의미로 순정만화를 단정 짓는 외부의 시각을 알게 되었으니 말이다.

하지만 내가 아끼는 한국 순정만화 속 여성 캐릭터들의 모습은 오히려 대체로 자신의 주관이 뚜렷하고, 남녀관계 외에 자신의 삶에도 집중하며 살아가고, 가부장제 등 기존의 사회 제도와 관념에 의해 억압받는 여성으로서 스스로에 대해 고민하는, 입체적인 모습들이 많았다. 때문에 페미니즘 이슈가 전 세계적으로 다시금 중요해진 2017년 현재, 1990년대 순정만화 몇 편을 되돌아보고 우리가 미처 알지 못하던 어린 시절 이미 배웠던 페미니즘적 시각에 대해 짚어보고자 한다.

 

이진경 <피플>(1995)

피플 시리즈(C-Town People series)는 캘리포니아의 C-Town이라는 가상도시를 배경으로, 작가가 만든 ‘ femi+energy+generation’의 합성어인 ‘페너제이션(fenerzation)’적인 여성 캐릭터들이 살아가는 모습을 보여주는 작품이다. 1994년부터 ‘윙크'에 부정기적으로 연재되다가 2004년 단행본 형태로 묶이면서 한시적으로 마무리가 된 상태이다. C-Town이란 도시가 여성 사업가들에 의한 과일주스 산업으로 재탄생하면서 전국의 여성 근로자들이 몰려왔다는 발단부터, 조각가인 ‘애니’와 교통경찰로 일하는 ‘맥스’라는 두 여성 주인공들이 무차별로 여성들을 폭행하고 다니던 남성 경찰 ‘녹스’를 복싱 경기에서 한 방 먹이고 서로 연대하게 되는 중요한 에피소드, 애니의 대학 동창이 다이어트 때문에 자살하게 된 이야기 등 가볍고 무거운 다양한 소재들을 통하여 여성들의 삶에 존재하는 여러 단면을 보여주며, 신문기사와 사진을 오려 붙이는 등의 기법을 통한 회화적인 감각 역시 돋보인다.

 

권교정 <메르헨, 백설공주의 계모에 관한>(1997)

이른바 ‘킹교(King Gyo)’로 통할만큼 단단한 마니아 층을 갖고 있는 권교정 작가는 <헬무트>, <청년 데트의 모험>과 같은 판타지 장르의 작품들로 유명하지만, 덤덤한 그림체와 캐릭터들의 내면세계가 실제로 와닿는 듯한 섬세한 심리묘사 때문인지 어쩐지 현실적인 느낌이 드는 작품들이 많다. 그 중 <메르헨, 백설공주의 계모에 관한> 단편은 백설공주와 계모에 대한 전복적인 시선을 발견할 수 있는 작품이다. 작가노트에 언급한 내용처럼, 이 책은 자신보다 예쁜 딸을 질투해 그녀를 죽이려고 마법의 독사과까지 먹이는 계모 캐릭터의 설정에 불쾌감을 느껴 새로이 써 내려간 이야기이다. 이 단편에서 백설공주는 신분이 낮은 남자와 사랑에 빠지며, 만화 속 계모이자 주인공인 ‘리디아’의 도움으로 몰래 성 밖으로 나가 자신이 사랑하는 남자와 결혼하는 용감한 모습을 보여준다. 한편, 리디아는 자신이 백설공주를 내쫓은 나쁜 마녀라는 소문을 일부러 퍼뜨려 백설공주가 성으로 다시 돌아올 수 있게 도와준다. 각자 불완전한 인물들이지만 서로 이해하고 연대하는 여성들의 관계에 대한 사려 깊은 묘사가 흥미롭다.

 

유시진 <쿨핫>(1998)

<쿨핫>은 전작인 <마니>에서부터 가부장 제도의 모순에 대해 지적해 오던 유시진 작가가 조금 더 노골적으로 남성과 여성에 대한 양분화된 시각들에 대하여 반박하는 듯한 캐릭터들을 만들어 낸 작품이다. 연재가 중단되기 전까지 총 6권이 나오는 동안 작품 안에서 주요 캐릭터들의 시점이 계속 바뀌며 이야기가 진행되는데, 여러 화자들이 등장하는 형태의 전개가 독특하다. 1권의 ‘루다’는 여성임에도 무척 남성적으로 생긴 외모 때문에 여러 오해들을 겪고, 2권의 ‘동경’은 여성 편력이 심한 영화감독 아버지에게 증오를 표출한다. 그런 두 사람이 서로에 대해 편견과 호기심을 가지다가 차츰 친구가 되어가는 과정을 그리는 묘사가 흥미롭다. 특히 작품 속에서 두드러지는 외모와 유명인인 아버지 때문에 학교 안에서 눈에 띄는 캐릭터로 그려지는 동경이 남학생의 강제적인 스킨십에 손을 깨물어버리고 “어디서 그 잘난 힘을 휘둘러! 여자애들은 힘으로 하면 고분고분해진다고 네 아버지가 가르쳐 주던?” 하고 소리치는 장면은 특히 인상깊다. 각종 데이트폭력을 로맨스로 미화하여 잘못된 성 관념을 주입시키는 주류 매체들에 직접적으로 반박할만한 명장면으로 기억된다.

이토록 만화에서 배운 것들이 많건만, "만화가 무슨 쓸모가 있냐"고 홀대하던 부모님과 선생님들에게 지금 와서 응수할 기회가 없는 것이 유감이다. 또한, 이토록 훌륭한 작품들이 대부분 절판 또는 연재중단된 상황에 대해서도 개탄하지 않을 수 없다. 아직도 중고서점이나 만화방 같은 곳에서 위의 작품들을 구해볼 수는 있다만, 최근 이진경 작가의 <사춘기>가 재출간 및 완결을 목표로 재작업을 시작하게 된 것과 유사한 사례가 더 많아졌으면 좋겠다. 이미 출판업이 사양산업이 되어버리고, 스마트폰을 통해서 손쉽게 무료로 볼 수 있는 웹툰이 만화시장을 점령한 시점에서 꿈같은 바람이라는 건 알고 있지만, 90년대 순정만화 속 그녀들의 목소리가 현재까지도 유효하다는 사실을 다시금 생각하게 되는 요즘에는 조금 더 간절한 마음으로 바라게 되는 것을 어쩔 수가 없다.

 

사진 유유 eueu

 

Writer

서울에서 살아가는 생활인이자, 하고 싶은 이야기들을 노래로 지어 부르고, 여기가 아닌 어딘가 다른 낯선 세상을 바라보며 사진을 찍는 작업자. 다른 사람들의 작업을 보고, 듣고, 이야기하는 것을 좋아한다. '유유'는 한자로 있을 '유'를 두 번 써서 '존재하기에 존재한다'는 뜻으로 멋대로 사용 중. 2018년 9월부터 그동안 병행 해오던 밴드 '유레루나' 활동을 중단하고, 솔로 작업에 더 집중하여 지속적인 결과물들을 쌓아나가고자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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