관록의 연기파 배우 제레미 아이언스의 주연작 <리스본행 야간열차>는 한 남자의 우연한 여행을 통해 일상과 혁명이라는 화두를 던지는 영화다. 미리 알고 보면 더 유익한 <리스본행 야간열차>의 몇 가지 키워드를 소개한다.
<리스본행 야간열차>
Night Train to Lisbon | 2013 | 감독 빌 어거스트 | 출연 제레미 아이언스, 멜라니 로랑, 잭 휴스턴, 마티나 게덱
동명 소설을 바탕으로, 덴마크 출신의 감독 빌 어거스트가 연출했다. 어거스트 감독은 <정복자 펠레>(1987)와 1992년 <최선의 의도>(1992)로 황금종려상을 두 차례 수상했으며 <레미제라블>(1998), <굿바이 만델라>(2007) 등 역사적으로 중요한 사건들을 여러 차례 영화로 제작했다. <리스본행 야간열차>에서도 1974년 리스본에서 일어난 ‘카네이션 혁명’ 전후의 이야기가 액자식 구성으로 펼쳐진다.
베른에서 오랜 시간 고전문헌학을 강의하며 새로울 게 없는 일상을 살아온 ‘그레고리우스’(제레미 아이언스)는 어느 날, 우연한 계기로 달랑 책 한 권을 들고 리스본으로 향하게 된다. 거기에서 만난 안경사 ‘마리아나’(마티나 게덱)의 도움으로 책 속의 주인공들을 만나기 시작하면서 영화는 본격적으로 1973년의 리스본으로 시선을 옮긴다. <나우 유 씨 미: 마술사기단>(2013), <바스터즈: 거친 녀석들>(2009) 등 작품을 통해 왕성한 연기를 펼치고 있는 배우 멜라니 로랑과 <킬 유어 달링>(2013)에서 비트 세대의 작가 ‘잭 케루악’ 역을 맡았던 잭 휴스턴이 각각 ‘스테파니아’와 ‘아마데우’로 분해 극에 무게감을 싣는다.
파스칼 메르시어의 원작 소설
소설의 원작자 파스칼 메르시어(Pascal Mercier)는 스위스 베른 출생으로 철학, 고전문헌학 등을 전공하고 베를린자유대학에서 언어철학을 강의하고 있다. 학교에서 고전문헌학을 가르치는 주인공 그레고리우스와 닮은 모습이다. 그의 폭넓은 인문학적 바탕이 소설 속 문장에 고스란히 배어있다. 영화에서 그레고리우스의 내레이션으로도 들을 수 있는 문장들이다.
영화는 책의 내용을 생략하거나, 새로운 내용을 추가하기도 했다. 예를 들면 그레고리우스와 안경사 마리아나의 관계는 책에는 없던 것이고, 아마데우의 삶에서 주변 인물들의 이야기는 영화에서 많이 생략됐다. 또한 소설에서는 그레고리우스의 내적 변화를 다루는 것에 비중을 더 두었지만, 영화는 아마데우의 삶에 초점을 맞추고 있다.
혁명이 없는 베른과 붉은 카네이션의 리스본
리스본은 포르투갈의 수도다. 포르투갈은 15세기 식민지 확장으로 황금기를 누린 이후 여러 번 부침을 겪는다. 20세기에는 살라자르 독재정권을 견디다 못해, 1974년 카네이션 혁명을 통해 민주화를 이뤄낸다. 당시 청년 장교들은 무혈의 혁명을 이뤄냈고, 이때 시민들이 붉은 카네이션으로 그들을 지지했다. 그레고리우스는 혁명군에 가담했던 의사 아마데우의 책을 통해 혁명의 삶을 들여다본다.
포르투갈 역시 삶의 질이나 인간개발지수, 의료수준 등에서 높게 평가받지만, 스위스는 언제나 정치, 경제, 사회가 모두 안정된 나라로 꼽힌다. 올해 ‘가장 살기 좋은 도시(머서 휴먼 리소스)’ 상위 10곳 중 세 곳이 스위스의 도시가 차지했다. 영화 속에서 과거 혁명군이었던 ‘주앙’(톰 커트니)은 그레고리우스에게 이렇게 묻는다. “스위스에는 혁명이 전혀 없었지?”
믿을 수 없이 사소하고 극적인 순간들
여러모로 대조되는 배경을 넘나들지만, 영화는 따라가기 어렵지 않다. 영화의 발단이 되는 자살 기도 장면이나 ‘혁명’이라는 강렬한 소재를 가지고도 자극적이지 않으며 구성이 복잡하거나, 너무 심오하게 느껴지지 않도록 절절히 조율했다. 평이하다고 느껴질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명대사들과 함께, 그레고리우스가 사람들을 만나고 대화하는 장면을 곱씹어보면 여러 은유와 연결고리가 숨어있음을 알 수 있다. 덧붙여 그레고리우스가 일하는 베른의 학교 동료 ‘카기’(한스페테르 뮬러)와의 통화 장면을 놓치지 않기 바란다. 시종 잔잔한 배경음악과 심각한 대화로 자못 진지한 분위기에서, 아무것도 모르는 카기 선생님과 할 말만 하고 끊는 그레고리우스의 대화가 재미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