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떤 배우의 팬이 된다는 것이 그렇다. 좋아하기 전에는 그 배우를 보아도 무심코 지나친다. 그러다가 그가 나에게로 와 꽃이 되고 이름이 되는 순간, ‘그때 그 배우가 내 배우였다고?’ 하며 되짚어 보게 되는 것이다. 좋아하게 된 배우의 필모그래피를 찬찬히 정주행하는 것이야말로 이제 막 팬이 된 사람들의 특권. 최근에 배우 이상희, 구교환, 한예리, 엄태구, 서예지를 좋아하기 시작한 당신이라면, 그래서 이 배우들의 작품을 찾아보는 재미에 푹 빠진 당신이라면 여기 그들의 단막극이 있다. 놓치지 말자.

 

1. <드라마 스페셜 ‘아득히 먼 춤’> 구교환, 이상희

KBS2ㅣ2016ㅣ연출 임세준ㅣ극본 이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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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득히 먼 춤> 스틸컷

“아무도 없는 숲에서 나무가 쓰러지면 소리가 날까?”
“아니요. 아무 소리도 안 나요. 듣는 사람이 없을 테니까.”
“나는 난다고 생각해. 언젠가는 닿을 거라고 생각해. 누군가는 들어줄 거라고 생각해.”

- <아득히 먼 춤> 중에서

<아득히 먼 춤>이라는 단막극을 꼭 보았으면 좋겠다고 설득하기 위해선 사실, 긴 글은 필요 없다. <연애담>의 이상희와 <꿈의 제인>의 구교환이 함께 나오는 작품이라는 설명만으로 충분할 테니까.
어느 날 연출가 ‘신파랑’(구교환)이 죽는다. 유서조차 남기지 않은 자살. 그와 콤비였던 극본가 ‘최현’(이상희)은 연극을 준비하는 내내 무책임했던 그에게, 그리고 도저히 이해할 수 없는 그의 죽음에 화가 난다. 그리고 최현은 파랑의 유작 <로봇의 죽음>을 자신의 졸업작품으로 다시 올리게 되면서 파랑이 고집했던, 이해 안 가는 결말을 바꾸겠다고 다짐한다. 이 작품은 현의 현재, 파랑이 죽기 전의 과거, 파랑의 유작인 <로봇의 죽음>이라는 세 가지 이야기가 번갈아 진행된다.
사실 <아득히 먼 춤>에 구교환이 등장하는 장면이 많지는 않다. 하지만 현의 회상 장면만으로도 구교환은 무책임하고 능글맞지만 결코 미워할 수 없는, 한때 우리 모두가 겪어봤을 어떤 선배의 얼굴을 생생히 재현해낸다. 죽은 선배 역할을 하면서도 이토록 살아 숨 쉬는 캐릭터를 완성할 수 있다니! 이상희는 또 어떤가. 무표정에도 표정이 있다는 것을, 대사가 없을 때도 그 속에 대사가 있다는 것을 그를 통해 다시 확인할 수 있다. 이상희를 두고 ‘무표정에 가까운 깊은 표정’이라 했던 영화평론가 이동진의 평은 역시 괜한 소리가 아니었던 거다.

<아득히 먼 춤>

 

2. <드라마 스페셜 ‘연우의 여름’> 한예리

KBS2ㅣ2013ㅣ연출 이나정ㅣ극본 유보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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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우의 여름> 스틸컷

“동화 같으면 왜 안 돼? 사는 게 비루한데 꿈꾸는 것까지 거지 같으라고?”

- <연우의 여름> 중에서

이것 하나만은 분명하다. 배우 한예리를 모를 수는 있어도, 알고도 좋아하지 않는다는 건 불가능하다는 것. <연우의 여름> 속 ‘연우’(한예리) 역시 사랑하지 않기란 쉽지 않다. 소개팅 첫 만남에서부터 ‘연우’에게 홀딱 빠져버린 극 중 ‘윤환’(한주완)이 그랬듯이 말이다.
<연우의 여름>은 앞으로 한예리를 만나게 될 여러 감독에게 배우 한예리를 100% 활용하는 법을 알려주는 작품이다. (실제로 이 작품은 한예리의 공중파 데뷔작이자 첫 주연작이었다.) 사랑에 빠진 연우가 발톱에 서툴게 매니큐어를 칠하는 장면 속 그의 섬세한 ‘발 연기’를 보면, 드라마 <청춘시대>에서 빠진 손톱만으로 시청자의 마음을 무너뜨리던 한예리의 손 연기가 떠오른다. 그의 가장 큰 장점이 바로 이러한 ‘몸 연기’라는 것을, <연우의 여름>이 몇 년 앞서 알려준 셈이다. 한예리는 목소리마저 탁월하다. “목소리가 정말 좋아요”라는 윤환의 칭찬은 아마 윤환만의 생각이 아닐 것이다. <연우의 여름>에선 그 좋은 목소리로 멋진 노래까지 부른다. 심지어 이 노래를 만든 사람은 작품의 음악 감독을 맡은 정바비. 마지막 장면에서 연우가 부르는 ‘제 이름은요’라는 노래의 첫 소절을 듣는 순간, 이 노래가 한동안 우리의 플레이리스트를 떠나지 않을 것임을 예감할 수 있다.

<연우의 여름> 속 연우가 부르는 ‘제 이름은요’


그뿐 만이 아니다. 영화 <더 테이블> 속 김혜옥과 한예리의 가짜 모녀 케미가 너무 짧아 아쉬웠던 사람이라면 <연우의 여름>에서 두 사람이 보여주는 진짜 모녀 케미를 놓쳐서는 안 된다. 도란도란 서로를 위로하는 모습은 아쉬움을 씻어주기에 충분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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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혜옥과 한예리

<연우의 여름> 보기ㅣ엔스토어

 

3. <드라마 스페셜 ‘청춘, 18세의 바다’> 엄태구

KBS2ㅣ2014ㅣ연출 김진우ㅣ극본 유보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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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춘, 18세의 바다> 스틸컷

“맞는 거 지긋지긋하지? 그게 왜 난가 싶지? 네가 왜 먹잇감이 된 줄 아냐? 나쁜 놈들은 본능적으로 약한 놈을 알아본다.”

- <청춘, 18세의 바다> 중에서

영화에서 엄태구라는 배우를 보고도 그를 잊어버리는 것이 가능할까. 스크린을 뚫어버릴 듯한 눈빛과 상대를 무력하게 만드는 목소리를 경험하고도 말이다. 그가 유독 센 악역을 많이 맡은 건 그가 가진 무시할 수 없는 무시무시함 때문일 것이다. 하지만 과연 그것뿐일까. 그에게는 나쁜 놈이 될 수밖에 없었던 사연이 서려 있다. 무서우면서도 안쓰러운, 왜 저러나 싶으면서도 오죽하면 저러겠나 싶은 사연들. 두려움과 동정심이라는 반대되는 감정의 공존, 과연 그게 가능할까 싶지만 엄태구니까 가능하다.
형 때문에 엄마가 돌아가셨다고 생각하는 ‘석주’(서영주)는 복싱을 그만두고 생선 다듬는 일을 하며 살아가는 형 ‘석현’(김흥수)이 경멸스럽다. 그런 석주 앞에 형의 친구 ‘종범’(엄태구)이 나타난다. 회를 사주고, 여러 가지 일을 해결해주는 종범의 모습은 흡사 악마 같아 보인다. 다가가기 두렵지만 거부할 수 없는 악마. 하지만 이야기가 진행될수록 종범에게서 연민을 느끼게 된다. 그가 행하는 잔인한 폭력 속 아픔을 발견하기 때문이다. 엄태구를 통해 표현되는 상반된 감정의 공존은 극을 더욱 풍부하게 만들어준다. 다시 한 번 말하지만 엄태구이기에 가능한 일이다.

<청춘, 18세의 바다>

 

4. <드라마 페스티벌 ‘가봉’> 서예지

MBCㅣ2014ㅣ연출 장준호ㅣ극본 문수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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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봉> 스틸컷

“넌 이 나이에 일한다는 게 어떤 건 줄이나 알아? 엄마, 아빤 열심히 안 산 것 같아?”

- <가봉> 중에서

맞다, 올해 드라마 <구해줘>에서 소름 돋는 방언 연기를 선보였던 그 서예지가. 시트콤 <감자별>에서 고경표와 현실 남매 싸움을 보여주던 그 서예지가 맞다. 청순한 분위기를 가졌으면서도 그는 늘 그렇게 스테레오 타입을 뛰어넘는다. <가봉>에서도 마찬가지, 무려 시대를 뛰어넘는다. 이번엔 1970년대 소공동에서 미싱보조로 일하는 스물한 살의 ‘경희’(서예지)다.

<가봉> 예고편


아련한 첫사랑 이야기를 좋아하는 사람들에게 <가봉>은 추천할 만한 작품이다. 엄마의 첫사랑이 궁금해지는 작품이랄까? 덤으로 우리 엄마의 스물한 살 때 모습인 듯한 서예지도 만날 수 있다. 사람들이 뭔가를 추억할 때 으레 하는, 딱 그만큼 미화된 모습의 첫사랑인 동시에 땅에 단단히 발 붙이고 선 현실 속 첫사랑. 서예지가 아니면 누가 연기할 수 있단 말인가.

<가봉> 보기ㅣMBC

 

이제 또 다른 단막극들이 찾아보고 싶어질 시간이다. 좋아하는 배우가 나온 단막극을 찾아보다가 단막극의 세계에 발을 들이게 되고, 그러다 그 안에서 새로운 배우를 발견해 팬이 되고 또, 그 배우가 나온 작품들을 찾아보고… 우리는 그렇게 이 외로운 연말을, 크리스마스를 충분히 즐겁게 보낼 수 있다. 이것이야말로 단막극의 선순환이 아닐까.

 

 

 

Writer

광고회사 카피라이터. 카피 쓴다는 핑계로 각종 드라마, 영화, 책에 마음을, 시간을 더 쓰는 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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