초창기의 재즈는 악기 연주, 특히 색소폰, 트럼펫 같은 관악기가 중심적인 역할을 했으며, 노래는 부수적인 역할에 머물렀다. 목소리는 여러 악기 중 하나로 인식했고, 대부분의 가수들은 악기와 비슷한 소리를 내려고 노력했다. 루이 암스트롱의 트럼펫 연주 후 부르는 노래가 그의 트럼펫 소리와 흡사하듯이 말이다. 마이크가 발달하지 않은 초창기 재즈에서는 자연스레 보컬보다는 악기 연주자들이 스타로 군림했다.

그러나 대공황과 2차 세계대전의 격랑에 휩쓸리면서 사람들은 달콤한 음악을 찾았고, 재즈 연주곡에 가사를 붙여 노래를 부르기 시작했다. 가수들은 자신이 소속된 스윙밴드에서 탈퇴하여 자신의 밴드를 꾸린 독자적인 솔로 스타로 부상하였다. 1942년 프랭크 시나트라가 첫 테이프를 끊었고, 뒤이어 3명의 디바가 연이어 등장하면서 재즈 보컬 시대가 열린 것이다.

 

빌리 홀리데이

1940년대 배경의 로맨스 영화에서 배경음악으로 나오는 끈적한 분위기의 재즈 보컬은 대부분 빌리 홀리데이(Billie Holiday, 1915~1959)의 목소리다. 다른 가수들보다 부족한 성량에도 짧은 프레이징과 강약을 조절하는 독특한 창법을 구사하여 대공황기의 미국 재즈클럽에서 최고의 인기를 누렸다. 이전의 여성 보컬은 대부분 교회 성가대 가수 같은 스타일이었다고 하니, 그의 등장은 당시로써 센세이션이었다.

Billie Holiday ‘I Love You Porgy’ Live

그러나 그의 삶은 불우했고 평생 마약과 술에서 벗어나지 못했다. 매춘부 엄마 밑에서 교육을 제대로 받지 못하는 어린 시절을 보내고, 10대부터 클럽에서 노래하면서 서서히 이름을 알리기 시작한 빌리 홀리데이. 그의 노래를 우연히 들은 음반업 관계자는 “마치 재즈 천재가 즉흥적으로 연주하듯 노래하는 소녀는 처음 보았다”고 놀라워했다. 빌리 홀리데이는 성공한 이후에도 마약 과용으로 인한 체포와 소송, 그리고 연인의 폭력으로 구설수가 끊이지 않다가 44세라는 이른 나이에 간경화로 생을 마감한다

그가 경험한 굴절된 사랑은 노래에도 깊이 묻어 나온다. “I’m a fool to want you. (당신을 원하는 내가 바보.)”, “My man don’t love me. (내 남자는 나를 사랑하지 않아.)” 심지어 “Sometimes he beats me. (가끔 그는 나를 때려요.)”라는 가사로 자신의 마음을 나타내곤 했다. 불우한 삶을 살았지만, 빌리 홀리데이는 미국 대중음악을 통틀어 가장 영향력이 큰 가수로 지금까지 남아있다.

Billie Holiday ‘I'm Fool To Want You’

  

엘라 피츠제럴드 

맑은 목소리, 정확한 발음, 세 옥타브를 넘나드는 가창력, 생애 13번(사후 포함 14번)의 그래미를 수상한 엘라 피츠제럴드(Ella Fitzgerald, 1917~1996)는 가장 완벽한 재즈 가수로 칭송된다. 독실한 기독교 가정에서 자라 교회에서 노래와 피아노를 배운 그의 보컬엔 가스펠의 영향이 진하게 묻어 나온다. 15세에 교통사고로 어머니를 잃었지만, 불우한 환경을 이겨내며 클럽에서 노래를 시작하였다. 노래할 때와는 달리 극도로 수줍은 성격의 그는 성격이 정반대인 프로듀서 노먼 그랜츠(Norman Granz)와 만나면서 가수 인생의 꽃이 피기 시작했다.

Ella Fitzerald ‘Mack the Knife’ Live (1960)

 빌리 홀리데이 사망 후 엘라 피츠제럴드는 최고 재즈가수의 자리를 차지한다. 특히 노먼 그랜츠 소유의 레이블 Verve에서 1956년부터 1964년까지 출반한 8장의 <Songbook> 시리즈는, 작곡가 별로 재즈 스탠더드를 집대성한 명반으로 인정받는다. Verve는 8장 모두 고급세트로 재발매하였는데 1995년 ‘그래미어워드’ 최우수 역사적 레코딩상을 받았다. 8장 중 가장 먼저 나온 앨범 <The Cole Porter Songbook>을 들어보자.

<Ella Fitzgerald Sings the Cole Porter Songbook>에 수록한 'All Through the Night'

그를 말할 때 빠트릴 수 없는 것이 스캣 싱잉(Scat Singing)이다. 무의미한 음절을 가사 대신 부르는 스캣은, 그가 디지 길레스피 밴드에서 노래할 때 비밥 트렌드에 맞추기 위해 개발한 것이다. 그의 스캣은 평론가로부터 루이 암스트롱 이후 가장 창의적인 스타일로 각광받았다. (스캣은 루이 암스트롱이 라이브 도중 가사가 적힌 악보를 떨어트렸을 때, 불가피하게 착안해낸 것으로 알려진다.)

엘라 피츠제럴드 'One Note Samba'(1969)

  

사라 본

가창력에 관한 한 사라 본(Sarah Vaughan, 1924~1990)을 능가하는 가수는 없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저명한 평론가 스콧 야노우는 그를 “20세기를 통틀어 가장 놀라운(wonderous) 목소리”라고 평가했으며, 네 옥타브를 넘나드는 가창력은 오페라 가수 레온타인 프라이스(Leontyne Price)와 비교되곤 한다. 우리나라에서는 영화 <접속>에 나온 ‘A Lover’s Concerto’로 익숙한 목소리가 되었다. 영화와 노래를 감상하자.

영화 <접속> OST 'A Lover's Concerto'

  그는 1943년 할렘의 아마추어 대회에서 우승하면서 어느 날 갑자기 스타로 부상한다. 얼 하인즈 밴드와 빌리 엑스타인 밴드에 고용되어 순회연주를 하거나 엘라 피츠제럴드의 오프닝 공연으로 이름을 알렸고, 곧이어 각종 상을 휩쓸기 시작했다. 일부 평론가들은 “지나치게 멋 부리는(Over-stylized)” 창법이라고 깎아내리기도 했지만, 소프라노에서 여성 바리톤까지 넘나드는 넓은 음역과 길게 이어지는 비브라토는 독보적이었다. 그가 자신이 최초로 녹음했던 사실을 자랑스러워하는 명곡 ‘Tenderly’를 들어보자.

Sarah Vaughan 'Tenderly'

 사라 본은 3명의 남편이 저지른 방탕한 생활과 연이은 이혼 소송으로 재정적 어려움을 겪었으나, 1980년대까지 여전히 음반을 내고 왕성하게 활동했다. 공연에서 보여주는 특유의 입담과 관객과의 활발한 교감 또한 여전했다. 1985년에는 할렘의 아폴로극장 개관 50주년 공연에서 그의 데뷔를 이끌어준 빌리 엑스타인(Billy Eckstine)과 같이 공연해 화제가 되기도 했다.

사라 본과 빌리 엑스타인

사람들은 그를 재즈 싱어라 불렀지만, 정작 사라 본 자신은 재즈 장르에 국한되는 것을 달가워하지 않았다고 한다. 재즈, 블루스 외 모든 장르를 소화하는 가수로 불리길 원했던 이 뛰어난 디바는 1990년 폐암 선고를 받고 약물치료를 하던 중 생을 마감한다.

3명의 디바와 이들이 전성기를 누린 시절을 제대로 느껴보고 싶다면, 2013년 BBC에서 제작한 1시간짜리 다큐멘터리 ‘Queen of Jazz: the Joy and Pain of Jazz Divas’ 시청을 권한다. 영문 자막으로 볼 수 있다.

BBC 다큐 <Queen of Jazz: the Joy and Pain of Jazz Diva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