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7년 9월 월터 베커(Walter Becker)의 갑작스런 사망으로 스틸리 댄(Steely Dan)은 이제 도널드 페이건(Donald Fagen) 혼자 남게 되었다. 당대 최고의 세션 뮤지션들을 고용하여 완성도 높은 연주와 기발하고 냉소적인 가사로 조합된 스튜디오 앨범을 연이어 발표하며 격조 있는 음악으로 자타가 공인하던 밴드였다. 이들은 순회공연을 기피하고 스튜디오 앨범 9장만 발표하여 4천만 장의 판매고를 올린 레전드였다. 1980년에 밴드를 해체하고 10여 년 간 공식 활동을 중단하기도 했으나, 최근에는 공연 활동도 활발히 하던 차라 팬들을 더욱 안타깝게 했다.

2001년 록앤롤 명예의 전당 헌정식 공연

스틸리 댄은 대중적인 밴드라기보다는 프로젝트 그룹의 투톱이자 작곡 콤비에 가까웠다. 앨범 작업 때는 최고 실력의 뮤지션들과 함께 레코딩 스튜디오에 파묻혀 완벽에 가까운 음악들을 뽑아냈다. 하지만 대중과 친숙해지기 위한 순회공연이나 미디어에의 노출은 활발하지 않았다. 이들에 대해 많이 알려지지 않은 사실들을 간추려 보았다.

 

두 사람은 어떻게 만나게 되었나?

두 사람이 뉴욕의 예술학교 바드 칼리지(Bard College)를 다니던 1967년, 카페 앞을 지나던 페이건은 카페 안에서 들려온 기타 소리를 들었다. 보통 솜씨가 아니라 생각한 페이건은 카페로 들어가 기타를 치던 베커에게 말을 건네고 이내 친해졌다. 음악 취향이 서로 비슷하다는 것을 알고 난 후부터 함께 밤을 꼬박 새우며 곡을 만들기 시작했고, 트리오를 구성해 연주도 함께했다. 당시 트리오에서 드럼을 맡았던 인물이 코미디 연기로 스타가 된 체비 체이스(Chevy Chase)였다.

5백만 장을 판매한 앨범 <Aja>(1977)의 ‘Deacon Blues’. 이 앨범에 이름을 올린 뮤지션만 무려 40여 명일 정도로 음악적인 완결성을 추구했다

 

이들의 음악 장르는?

평론가들은 스틸리 댄의 음악을 재즈 록(Jazz Rock)으로 부른다. 재즈에 뿌리를 두고 R&B와 대중적인 록을 섞었다는 것이다. 이들이 재즈에 뿌리를 두었다는 사실은, 두 사람이 초창기 체비 체이스와 함께한 밴드 이름이 ‘Don Fagen Jazz Trio’라는 데서도 알 수 있다. 전성기에는 재즈 멜로디에 관악기 편성과 여성 코러스를 가미해 재즈 취향의 어번 컨템포러리 음악을 추구했지만, 딱히 한 장르로 규정하기는 어렵다.

영화 <FM>(1978)의 타이틀송. 영화는 대실패로 끝났으나 이들이 만든 곡은 그래미를 수상했다

 

무명 밴드에서 성공의 길로

대학 졸업 후 두 사람은 한동안 출연료 백 달러의 무명 밴드 생활을 지속했으며, 그마저도 출연료가 반으로 깎이는 경우도 종종 있었다. 하지만 이들의 작곡은 서서히 인정받기 시작하며 대스타 바브라 스트라이샌드(Barbara Streisand)에게 곡을 주기도 했다. 그러다 ABC 레코드의 신참 프로듀서 게리 카츠(Gary Katz)의 작곡가로 고용되었고, 두 사람의 작곡이 ABC레코드의 다른 아티스트와 잘 맞지 않자 카츠의 권유로 직접 밴드를 구성한다.

‘Peg’ 녹음 당시의 메이킹 영상. 두 사람은 최선의 음악을 만들기 내기 위해 세심한 공을 들이는 것으로 유명했다. 덕분에 이들과 함께 한 음향 엔지니어 로저 니콜스(Roger Nichols)은 6개의 그래미를 수상했다

 

이들은 왜 공연을 기피하였나?

초기에는 여섯 명의 멤버로 구성되었으나 하나 둘 밴드를 떠나며 원조 2명만 남게 된다. 리드 보컬을 맡은 페이건이 무대 공포증으로 프론트에 나서길 싫어했고, 두 사람 모두 순회공연을 싫어하여 레코딩 스튜디오에서 더 많은 시간을 보냈다. 또 다른 보컬리스트 데이비드 파머(David Palmer)가 들러리 역할을 견디지 못하였고, 스튜디오에서 별다른 역할을 하지 못하던 다른 멤버들도 차례로 떠나게 된 것이다. 하지만 정작 스튜디오 앨범의 완성도가 높아서 순회공연 없이도 앨범 판매에는 별 지장이 없자, 갈수록 공연을 기피하는 스튜디오 밴드가 되었다.

성공의 포문을 연 싱글 ‘Do It Again’. 페이건이 리드 보컬이지만, 데이비드 파머가 전면에서 립싱크를 하는 드문 장면이다

 

밴드를 해체하게 된 고난의 시기

앨범 <Gaucho>(1981)를 준비하던 3년간 이들에게 여러 악재가 한꺼번에 닥친다. 고된 작업 끝에 완성된 원본 한 곡이 엔지니어의 실수로 지워져 버렸고, 베커의 여자 친구가 그의 아파트에서 마약 과용으로 숨지면서 그의 가족에게 거액의 소송을 당한 데다 머릿속이 복잡한 베커가 교통사고를 당하면서 한동안 걷지를 못했다. 더군다나 재즈 피아니스트 키스 자렛(Keith Jarrett)이 저작권 침해로 그들을 고소하기도 했다(후일 베커는 자렛의 곡에서 영향을 받았다고 인정했다).

‘고난의 앨범’ <Gaucho>에 수록한 ‘Hey Nineteen’은 팝 차트 10위에 올랐다

 

재결합과 함께 다시 공연에 나서다

고난의 시기를 거친 두 사람은 더 이상 같이 하지 않기로 하고 밴드를 공식 해체했다. 베커는 하와이 마우이로 이주하여 농장 생활을 하면서 자신을 괴롭히던 마약을 완전히 끊었다. 페이건은 솔로 활동을 계속하지만, 평단의 호평에도 불구하고 음반 판매는 신통치 않았다. 그러다 각자의 솔로 앨범을 서로 프로듀싱 해주면서 그토록 기피하던 공연 투어에 다시 나서기 시작했다. 다시 뭉친 두 사람이 20년 만에 낸 앨범 <Two Against Nature>(2000)는 4개의 그래미를 수상했다.

활동을 재개한 스틸리 댄은 90년대 중반 공연투어에 나서기 위해 3명의 여성 코러스, 4명의 관악기를 포함한 투어 밴드를 결성했다

다시 활동을 재개한 두 사람은 예전과는 달리 활발하게 공연 일정을 소화했다. 올해에도 빡빡한 공연 스케줄을 함께 채워 나갔지만, 2017년 5월 27일 코네티컷주 그리니치에서의 공연은 안타깝게도 베커의 마지막 공연이 되었다. 그 후 홀로 나머지 공연 스케줄을 소화하던 페이건은 9월 3일 베커의 사망 소식을 전했다. 사인은 바로 알려지지 않았으나 최근 미망인이 롤링스톤지에 보낸 메일에서 식도암이 갑자기 재발되었다고 밝혔다.

베커의 사망 후 페이건이 남긴 헌정사

50년에 걸친 두 사람의 콜라보가 이렇게 끝나며 밴드 스틸리 댄은 영원한 전설로 남게 됐다. 하지만 베커 미망인과 페이건이 스틸리 댄의 유산을 놓고 벌이는 법정 투쟁은 한동안 계속될 것으로 보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