등산을 할 때도, 음악을 들을 때도, 하물며 책 한 권을 읽을 때도 도구와 환경부터 챙기는 사람들이 있다. 등산복과 산악 장비는 마치 엄홍길 대장을 연상시키고, 헤드폰이나 스피커의 품질은 전문 스튜디오에 결코 뒤지지 않는다. 특별히 준비한 독서 램프와 테이블은 그 자체로 경탄을 자아내곤 한다. 설사 에베레스트를 등반하지 않더라도, 혹은 자신만의 음원을 출시하지 않더라도, 그리고 책을 통해 전문 작가의 길로 나아가지 않더라도 좋다. 간절한 마음과 투철한 준비 자세는 그 자체로서 큰 즐거움이며, 이후의 활동을 위해 꼭 필요한 몸풀기 과정이 되어줄 것이다.

맥주를 제대로 즐기는 데 필요한 준비는 상대적으로 단출한 편인데, 나에게 맞는 좋은 맥주를 골라 적당한 온도로 냉장하고, 알맞은 잔을 적절한 방법으로 준비하기만 하면 된다. 더불어 예쁜 코스터와 근사한 병따개, 그리고 기분에 맞는 음악은 바람직한 알파가 되어줄 것이다.

 

 

1. 맛있는 맥주를 위한 쉽고 빠른 선택 – 전용 잔에 마시자!

서로 다른 다양한 형태의 맥주잔들이 존재하는 이유는 무엇일까? 그리고 그 가운데 내가 마시려는 맥주에 가장 잘 어울리는 잔을 찾는 묘책은 무엇일까? 결론부터 이야기하자면, 맥주 제조사에서 제공하는 전용 잔을 활용하는 것이 최적의 방법이다. 네덜란드 맥주 하이네켄(Heineken)은 하이네켄 전용 잔에, 독일 맥주 파울라너(Paulaner)는 파울라너 전용 잔에, 그리고 아일랜드 맥주 기네스(Guinness)는 기네스 전용 잔에 마시는 것이 쉽고도 훌륭한 선택이 될 것이다.

맥주 전용 잔들

전용 잔을 선택하면 크게 두 가지 장점을 얻게 된다. 우선 제조사가 그들이 내놓는 맥주의 맛을 충실히 표현할 수 있는 잔을 직접 만들었기 때문에 최적의 결과를 얻을 가능성이 커진다. 더불어 지금 내가 마시고 있는 맥주의 로고가 찬연히 아로새겨진 잔을 바라보는 것은 시각적 즐거움을 주는 동시에 왠지 모를 푸근함을 느끼게 해준다.

굳이 해당 제조사의 특정 맥주를 마시지 않더라도 전용 잔은 그 용도가 쏠쏠한 편인데, 앞서 예로 든 하이네켄 잔의 경우 벡스(Beck’s)나 칼스버그(Carlsberg) 같은 필스너(pilsner) 계열의 맥주에 두루 활용할 수 있고, 파울라너 잔은 바이엔슈테판(Weihenstaphan)이나 에딩거(Erdinger) 등의 밀맥주에 매우 잘 어울린다. 기네스 전용 잔은 스타우트(stout)나 포터(porter) 계열의 흑맥주에 활용하면 되겠다고 짐작하고 있는 당신의 재빠른 눈치에 박수를!

다양한 맥주잔 종류. 왼쪽 위부터 시계 방향으로 머그, 파인트, 튤립, 셸리스


머그(mug), 파인트(pint), 셸리스(chalice) 그리고 튤립(tulip) 등 맥주잔의 종류는 무척 다양하지만, 전용 잔이 제시하고 있는 방향성을 참고한다면 손쉽게 알맞은 잔을 고를 수 있을 것이다.

스니프터 via ‘House of Malt’ 


참고로 꼬냑(cognac)이나 위스키(whiskey) 시음에 주로 활용되는 스니프터(snifter)를 이용하면 맥주 자체의 깊고 풍부한 맛과 향을 보다 잘 느낄 수 있으니 기회가 된다면 한 번쯤 시도해보는 것도 좋을 것이다.

 

 

2. 훌륭한 장인은 도구부터 챙긴다 - 맥주잔의 관리와 준비

맥주와 어울리는 잔 선택 방법 


자신이 마시려는 맥주와 어울리는 적당한 잔을 골랐다면 이제 잔의 관리와 준비를 알아볼 차례다. 요리할 때 사용하는 조리기구와 마찬가지로 맥주잔에도 청결이 그 무엇보다 중요한데, 각종 이물질과 물때 등은 맥주의 맛과 멋 모두에 좋지 않은 영향을 주기 때문이다. 먼저 맥주의 거품이 제대로 만들어지지 않기 때문에 맥주 고유의 풍미를 오래 유지하기 어렵게 된다. 또한 더러운 잔에 맥주를 따라 마시다 보면 처음에는 보이지 않던 얼룩들이 눈에 띄기 시작하는데, 이는 결코 유쾌한 경험이라 할 수 없을 것이다. 맥주를 차갑게 즐기기 위해 잔을 냉동실에 넣어두는 경우가 더러 있는데, 맥주잔에 성에가 끼게 되면 지나치게 많은 거품이 발생할 우려가 있으므로 오히려 상온에 보관하는 것이 바람직하다.

 

 

3. 천사도 디테일에 깃든다 - 비어 패디 후쿠오카(Beer Paddy Fukuoka)

사진 안호균


비어 패디는 후쿠오카의 중심이라 할 수 있는 텐진(Tenjin)을 조금 벗어난 조용한 동네 모퉁이에 자리한 작은 가게이다. 대략 10명가량의 손님이 카운터석을 채우고 나면 더 이상 앉을 자리가 없을 정도로 아담한 맥주집이다. 하지만 규모가 작다고 얕보는 것은 금물. 이곳은 10종류 이상의 크래프트 맥주를 언제나 신선한 상태로 제공할 뿐만 아니라, 각기 다른 맥주 종류에 어울리는 잔을 별도로 제작해 사용하고 있다.

제조사 측에서 홍보나 마케팅 목적을 위해 대개 무료로 제공하는 전용 잔을 마다하고 가게의 로고를 입힌 잔을 별도로 제작한 데에는 나름 분명한 이유가 있다. 우선 자신들의 이름을 걸고 최상의 맥주를 제공하겠다는 굳건한 신념이 있고, 나아가 잔의 선택이 맥주 맛에 실체적 영향을 미친다는 확실한 믿음이 있기 때문이다.

비어 패디 후쿠오카 주인 부부
사진 안호균


계절마다 가게 문을 닫고 유럽과 미주 등지로 맥주 순례를 떠나는, 맥주에 대한 남다른 애정을 지닌 다정한 부부가 함께 운영하는 비어 패디에서 최상의 맥주가 최적의 맥주잔을 만났을 때 벌어지는 멋진 순간을 경험해보는 것은 어떨까?

주소 후쿠오카시 추오구 타카사고 1-22-2
영업시간 5:30~01:00 (일요일 휴무)
전화 +81 (0)92-523-5023

 

메인 이미지 출처 ‘himmel hund’ 

 

Writer

번역과 잡다한 글쓰기를 취미이자 밥벌이로 삼고 있다. 맥주 입문서 <맥주 맛도 모르면서> 출간 후, 맥주판 언저리를 맴돌며 강연과 원고 작업을 진행 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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