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느 비평가에 따르면, 우리는 이제 예술에 대해 ‘무엇이 예술인가?’가 아니라 ‘언제 예술인가?’라고 물어야 한다. 정확히 올해로부터 100년 전, 뉴욕의 한 전시회에 남성용 소변기 하나가 등장했다. 작가가 직접 제작한 것도 아니었다. 굳이 공을 들인 부분이라면 해당 제품의 제조업자 이름인 ‘R.mutt’라는 서명을 적어 넣은 것뿐. 소변기는 큐레이터에 의해 전시장 한구석으로 치워져 버렸고 결국엔 아예 사라져 이제 그 실물은 볼 수 없게 되었다(오늘날 우리가 보는 R.mutt의 소변기는 모두 뒤샹이 1964년에 재현한 레플리카다). 이 이야기가 많은 사람이 세잔의 사과와 더불어 모더니즘 미술사의 첫 작품(作品)이라고 부르는 <샘>의 프롤로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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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arcel Duchamp, <Fountain>(1917)

 

 

뒤샹, 모더니즘

100년이 지난 지금도 우리는 여전히 <샘>의 그늘에서 벗어나지 못한 채 마르셀 뒤샹(Henri Robert Marcel Duchamp, 1887~1968) 방식으로 사고한다. 무엇이 모더니즘인지, 또한 그 모더니즘이 대체 무엇으로부터 모던해지려고 한 것인지 전부 설명할 수는 없다. 캔버스에 ‘재현’이라는 숙제로부터의 자유를 준 것, 작가가 물감과 타블로(tableau)에 집착하지 않게 만든 것이라고 조심스레 짐작은 할 수 있을지 모른다. 이를 설명하는 것이 글 밖의 영역이라는 사실 하나는 분명하다. 그러나 적어도 뒤샹의 작품 연대를 좇는 과정에서 모더니즘이 깨부수려던(modernize), 재현 시대의 산물 중 주요한 것을 마주할 수 있다. 또, 뒤샹의 작품을 보면서 구시대의 적장들이 하릴없이 깨져나가는 걸 목격하는 즐거움도 누릴 수 있다. 그 결과 최종적으로 그가 현대 미술사에 몇 안 되는 먼치킨(Munchkin)임을 깨닫게 된다.

Marcel Duchamp, <Anemic Cinema>(1926)

 

 

Painting is Washed Up!

1912년 파리의 항공박람회, 뒤샹은 정밀하게 제작된 비행기의 프로펠러를 보게 된다. 그리고 옆에 있던 친구 브랑쿠시에게 이렇게 말한다.

“Painting is washed up!(회화는 망했어!)”

머지않아 ‘Painting’ 자리에 ‘Artist’를 넣어야 할지도 모른다는 불안은 그즈음 모든 작가가 안고 있었을 것이다. 그리고 1년 뒤 뒤샹은 작은 스툴에 자전거 바퀴 하나를 거꾸로 박은 작품 하나를, 그로부터 4년 뒤에는 소변기 하나를 들고 나타났다. 뒤샹이 현대미술 작업 프로세스를 새로이 정리해버린 것이다.

발견 → 선택 → 탄생
혹은
선택 → 발견 → 탄생

그는 이미 만들어진(ready-made) 기성품을 하나의 픽셀 삼아 그림을 그려나가기 시작했다. 바퀴나 스툴, 회전하는 원판 등 가구에서부터 모나리자 같은 명화까지, 그는 기성품을 원료 삼아 자신만의 미술을 구현했다. 그로부터 오브제(objet)가 탄생했다. 뒤샹은 <샘>이라는 작품을 세상에 내놓은 지 6년이 지날 무렵 돌연 프로 체스 선수로 전향한다(원래 그는 체스를 매우 잘 뒀다). 그가 체스게임을 두고 남긴 말이 인상적인데, 이에 따르면 ‘전향’이라는 표현은 적확하지 않을지도 모르겠다.

“Objectively, a game of chess looks very much like a pen-and-ink drawing, with the difference, however, that the chess player paints with black-and-white forms already prepared instead of inventing forms as does the artist. (사실 체스 게임은 펜 드로잉과 매우 비슷합니다. 조금 다른 점이라면 예술가가 형태를 창조하는 것과 달리 체스 기사는 이미 준비된 흑백의 형태로 그림을 그린다는 정도죠.)” 

‘Marcel Duchamp on Chess’, 체스에 관한 뒤샹의 단상을 엿볼 수 있다

 

 

뒤샹의 흔적

레디메이드, 오브제, 플럭서스(Fluxus), 개념미술, 해프닝, 페미니즘, 초현실주의……. 현대미술에서 충격적이었던 사건마다 그 뿌리에서 뒤샹의 흔적을 발견하게 된다. 혹자는 ‘현대미술 속 뿌리’라 일컬으며 클래식 혹은 클리셰 같은 권위를 주는 것에 동의하지 못할 수도 있겠다. 그러나 나는 뒤샹이라는 존재의 가치를 영국의 소설가 새뮤얼 버틀러가 던진 말로써 이해하고자 한다.

“닭은 달걀이 더 많은 달걀을 만들기 위해 빚어낸 기계일지도 모른다.”

기술이 발전하면서 소비자는 즐거웠지만 창작자는 줄곧 두려워했다. 정밀하게 무쇠 부품들을 ‘찍어’내는 대량생산 라인과 풍경을 ‘찍어’내는 카메라라는 물체에서부터 최근 딥 러닝을 통해 풍경화를 ‘찍어’내는 회화 머신에 이르기까지(더욱 잔인한 사실은 이 AI들이 ‘찍어’내는 것처럼 보이지 않으려 아티스트의 고뇌를 모사한다는 점이다.) 창작자는 형용할 수 없는 압박에 쫓겨 왔다. 뒤샹은 이렇게 작가들이 안고 있던 모종의 거세공포로부터 그들을 자유롭게 만든 셈이다.

미술의 관점을 바꾸었다는 표현만으로 그를 해석하는 것은 부족하다. 뒤샹은 마치 매우 계산적인 디오니소스 신과 같다. 그는 인간을 긍정하기 위한 축제를 열었고 축제는 매번 상상 이상이었다. 그래서 이 축제에는 포멀한 양복을 입고 어울리기가 쉽지 않았고, 배제된 점잖은 신사들은 점점 흥겨워지는 축제를 질투해 급기야 이를 경찰에 신고했다. 그러나 뒤샹은 치밀했다. 완벽한 논리 덕분에 경찰은 그것을 말릴 명분을 찾지 못했다.

Piero Manzoni, <Artist's Shit>(1961)
Ed Kienholz, <The Non War Memorial>(1970) ‘Concept Tableaux’ 중 일부 via ‘LA LOUVER’ 

 

그의 논리 아래에서 피에로 만초니는 깡통 캔 속에 자신의 변을 넣었고, 존 케이지와 백남준은 피아노를 부수는 기행을 보였다. 에드 키엔홀츠는 작품이 아닌 작품의 개념이 기록된 종이를 전시했다. 뒤샹이 ‘예술을 더이상 하지 않겠다’는 개념으로 예술을 한 것처럼 그 역시 전시장에 작품이 아닌 작품의 개념을 걸어두고 그것을 팔았다. 현재 국립현대미술관에서 전시 중인 영국의 팝아티스트 리처드 해밀턴은 아예 뒤샹의 작품을 그대로 재현해 1966년 테이트모던에서 전시했다. 뒤샹은 이 전시의 개막식에 홀연히 나타나 해밀턴의 작품에 자신의 사인을 남기고 사라졌다. 이 모든 엉망진창 같아 보이는 행위 하나하나가 뒤샹 이후의 미술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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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an Ray, <Marcel Duchamp as Rrose Sélavy>(1920), 뒤샹은 ‘Rrose Sélavy’라는 이름으로 자신 안에 여성적 자아를 구별해 두었다

 

 

죽는 것은 언제나 타인들

뒤샹을 영화 <매트릭스> 속 캐릭터에 비유하자면 아티스트의 손과 정신에 자유를 준 네오(Neo)이거나 새 미술판의 문법을 직조한 아키텍트와 같다. 뉴욕 MoMA에서 열린 전시 <Dada, Surrealism and their Heritage>(다다, 초현실주의와 그 유산 展)에서 뒤샹은 전시장에서 가장 좋은 자리를 얻게 된다. 전시는 3월부터 3개월 동안 이뤄졌고, 그 3개월 뒤 뒤샹은 우리에게 하나의 큰 숙제와 같은 묘비명을 남기고 영면한다. 그 해가 1968년이다. 전 세계는 다시 한번 그의 영향력을 확인하게 된다.

“D’ailleurs, c’est toujours les autres qui meurent. (게다가 죽는 것은 언제나 타인이다.)”

뒤샹은 모든 걸 잘했다. 그림도 잘 그렸고, 계몽, 연기, 심지어는 체스 우승도 여러 번 했다. 그를 잠시라도 만났던 여인들은 뒤샹의 스타일과 언변에 감탄했다. 모든 방면에 뛰어났던 뒤샹이지만, 도리어 그래서 아무것도 소유하지 않았다. 가정, 직함, 작품, 심지어 하나의 취향까지도 갖지 않으려 부단히 노력했다. 우리가 모두 결국 죽어야 하는 사람이라면 인생에서 그의 묘비명보다 밀도 있는 문장을 만날 기회는 흔치 않을 것이다.

 

 

메인 이미지 출처 ‘the art blog’ 

 

Writer

언어만으로 꽃과 대화하던 시절,
그 시절의 언어를 되찾을 방법으로 미술을 본다.
Flower Vowels라는 영상팀에서 글을 쓰고 영상을 만든다.
Flower Vowel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