거짓말쟁이 남편, 버림받은 아내, 그리고 돌아선 아들. 천만 영국인의 사랑을 받은 BBC One의 <닥터 포스터>는 적나라한 언어와 감정이 쉼 없이 쏟아지는 복수극이 맞다. 하지만, 얼굴에 점 하나 안 찍고 치밀한 복수를 실행한 주인공 ‘젬마’의 길 끝엔 복수의 통쾌함을 넘는 불투명한 관계의 본질이 있다. 그리고, 우리의 힘으로는 결코 변화시킬 수 없는 내밀한 자아도 숨어있다.

<닥터 포스터> 시즌1 공식 예고편

 

머리카락 한 올

인정받는 의사로, 애정 넘치는 남편과 귀여운 아들과 함께 더 바랄 것 없는 삶을 살고 있던 젬마의 인생을 통째로 흔든 건 남편의 스카프에 붙어있던 머리카락 한 올이었다. 의심이 사실로 확인되자 젬마는 남편 ‘사이먼’에게 고백할 시간을 준다. 절대 그런 일 없다는 뻔뻔한 사이먼의 표정이 복수극의 서막을 알린다.

사이먼은 원래 그런 사람이었다. 단지, 젬마를 만나고 사랑에 빠져 한 여자와 평생 행복할 수 있다는 착각에 빠졌던 것뿐이었다. 젬마의 안에서도 과거 사이먼을 만나기 전, 사고로 부모님을 잃고 치열하게 생존했던 과거의 자아가 되살아난다. 그리하여 두 사람 모두 전에 없던 눈빛과 말투, 의지와 욕망을 서로에게 분출하기 시작한다.

왼쪽부터 작가 마이크 바틀렛, ‘젬마’ 역의 슈란느 존스, ‘사이먼’ 역의 버티 카벨, ‘톰’ 역의 톰 타일러

 

작가 마이크 바틀렛의 영감, 메데이아

작가 마이크 바틀렛(Mike Bartlett)은 2500년 전 그리스 로마 신화 속 복수의 마법사, 메데이아에서 영감을 받아 <닥터 포스터>를 집필했다. 4, 6부작으로 편성되는 기존의 텔레비전 포맷에서 벗어나 고전극의 형태인 5부작을 선택한 것도 기원전 431년의 이야기의 영향이다. 메데이아는 남편 이아손의 새로운 신부 글라우케와 그녀의 아버지, 그리고 자신과 이아손 사이에서 태어난 아이들까지 살해한 복수의 마녀로, 인생을 이용당한 안타까운 여성으로 줄곧 표현돼 왔다. 심리학자인 아버지의 영향으로, 사람의 행동과 그 행동을 뒷받침하는 이유에 대해 늘 생각해왔다는 마이크 바틀렛. 그래서일까. 그에게 젬마는 그저 ‘미친’ 여자가 아니라 가장 신뢰했던 사람에게 배신을 당해 분노에 휩싸인 ‘합리적인’ 인간이었다.

<닥터 포스터> 시즌2 공식 예고편

 

복수와 맞바꾼 것

남편과 남편에 관련한 모든 사람을 파괴해버린 메데이아처럼, 젬마는 멈추지 않고 질주하는 복수의 화신이 된다. 가진 모든 것을 잃은 사이먼과 모든 걸 걸고 받은 상처를 되갚은 젬마에게는 아들 ‘톰’이라는 공통된 삶의 가치가 남았다. 한 인간의 인격과 삶의 방향을 정하는 결정적 시기라고 해도 과언이 아닌 10대의 많은 시간 동안 아버지의 외도, 부모의 이혼 그리고 가정폭력에 노출되어온 톰은 첫 번째 시즌에서 두 번째 시즌으로 넘어가는 내내 불안과 공포, 좌절과 불행을 마주한다.

배신에는 그에 상응한 대가가 따르고, 거짓말은 더 큰 상실감을 남긴다는 인생의 교훈을 주고받는 동안, 아들 톰은 한 걸음 젬마와 사이먼에게서 멀어져 갔다. <닥터 포스터>는 흥미진진한 복수의 과정을 지켜보는 재미가 컸던 만큼, 아들이 떠난 자리에 외로이 남은 젬마의 모습처럼 깊은 공허를 남긴다. 복수는 결국 두 사람에게서 가장 소중한 것을 빼앗았다.

<닥터 포스터>는 ‘복수’라는 틀 안에서 인간관계에 대한 본질을 이야기한다. 텔레비전 시리즈를 만든 극작가의 작품이다 보니 ‘극’의 요소가 눈에 띄는데, 본래 ‘극'이라는 것이 '정도가 지나치다’라는 사전적 의미를 지니고, 우리는 시청자로서 ‘정도가 지나친’ 상황에 부닥친 등장인물의 선택을 통해 삶을 되돌아볼 기회를 얻는다. 잘 만든 연극 한 편을 보고 집으로 돌아가는 길, 차창 너머로 바삐 걸어가는 사람들의 얼굴에 나 자신을 투영해보듯이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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