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작 광고가 이 세상을 위해 뭘 할 수 있는데?”라고 내게 묻는다면, 광고인으로서 대답하기 당혹스러워진다. 대답하기 난감해하는 광고인들을 위해 매년 칸 광고제가 이에 대한 7박 8일간의 길고 화려한 대답을 내놓는다. 우리가 선정한 그랑프리 수상작을 보라며.

매년 6월 셋째 주, 프랑스 칸에서는 칸 광고제가 열린다. 상징은 사자. 정식 명칭은 ‘Cannes Lions International Festival of Creativity’. 90개국 이상에서 4만 점이 넘는 작품이 출품되는 이 세계적인 광고제는 라디오, 옥외, 프로모션, 모바일 등 약 20개 부문을 정해 부문별로 그랑프리와 금, 은, 동 사자상을 수여한다. 하지만 20개의 카테고리만으로는 부족했던 모양인지 2015년, 칸 광고제는 새로운 부문 하나를 신설한다. 이름하여 글래스(Glass) 부문. 성에 대한 편견이나 고정관념을 개선하고 양성평등에 기여한 캠페인을 시상하기 위해서란다. 글래스는 예상했다시피 ‘유리천장’의 그 글래스(Glass). 콕 집어 젠더 이슈만을 위해 신설된 상이라……. 그간 매체 유형과 기술을 기준으로 카테고리를 나눈 것과는 확연히 다른 행보다. 세상을 변화시키겠다는 칸 광고제의 의지가 엿보인다고나 할까.

그리하여 올해로 글래스 부문 3년 차. 과연 광고는 그동안 이 세상을 얼마나 변화시켰을까. 유리천장을 깰 수 있었을까, 아니면 하다못해 작은 균열이라도 만들었을까? 3년간의 칸 광고제 ‘글래스’ 부문 그랑프리 수상작들을 보며 그 대답을 찾아보자.

  

2015년 글래스 부문 그랑프리 수상작, 인도 P&G의 ‘피클을 만져라(Touch the Pickle)’ 캠페인

생리. 고작 두 글자일 뿐인데 글자로 쓰니 참으로 낯설다. 얼마나 긴 세월 우리는 생리를 생리라 부르지 못하고 살았던가. 아버지를 아버지라 부르지 못했던 홍길동의 심정이 이랬을까. 학창시절, 우리는 마약상처럼 은밀하고 긴급하게 책상 밑으로 생리대를 주고받았다. 생리대 광고에서조차 생리를 ‘그날’ 혹은 ‘마법’이라 불렀다. 아마 인도도 우리나라와 별반 다르지 않았던 모양이다.

‘피클을 만져라(Touch the Pickle)’ TV 광고

2014년, P&G의 생리대 브랜드 위스퍼는 1000명이 넘는 인도 여성을 대상으로 설문조사를 시행한다. 그리고 50%가 넘는 인도 여성들이 생리에 관한 금기에 영향을 받고 있다는 충격적인 결과와 마주한다. 그 금기 때문에 생리 중에는 (식물이 죽을까 봐) 화분에 물을 주는 것도, (피클을 망칠까 봐) 피클 통을 만지는 것도 할 수 없었다는 것이다. 실로 엄청난 ‘마법’이 아닐 수 없다. 피클 통을 만지는 것만으로도 피클을 망칠 수 있다니. 어쨌든 금기라는 게 입 밖으로 내놓고 나면 우습고 초라해지는 법. 위스퍼는 ‘피클을 만져라(Touch the Pickle)’라는 캠페인을 통해 금기에 도전하기 시작한다. TV 광고와 인쇄광고는 물론, SNS상에 여성들이 자신이 겪은 생리 중 금기에 대한 이야기를 나눌 수 있는 장을 마련하고, 이에 관한 만화책까지 만든다. 덕분에 인도의 여성들은 온•오프라인에서 자신이 겪은 생리에 관한 금기를 꺼내놓기 시작한다. 그리고 마침내, 그 금기들은 인도 여성들을 가로막고 있던 그 긴 세월이 무색하게 초라해졌고, 웃음거리가 돼버렸으며 이내 사라져버렸다.

그리고 2015년, ‘피클을 만져라(Touch the Pickle)’ 캠페인은 칸 광고제 글래스 부문의 첫 그랑프리 수상작으로 선정되는 영광까지 안게 된다. ‘혁신적이며 파괴적인 방식으로 여성 모두에게 영향을 미치는 출품작’이라는 평과 함께 심사위원들의 만장일치의 지지를 받았다. 하지만 더 큰 영광은 이제 피클 통을 당당히 만질 수 있게 된 인도의 여성들에게, 어쩌면 생리 중인 여성을 피한다고 오해받던 인도의 피클에게 돌릴 수도 있지 않을까.

‘피클을 만져라(Touch the Pickle)’ 캠페인 설명

 

 

2016년 글래스 부문 그랑프리 수상작, 인도 유니레버 Brooke Bond Red Label의 ‘식스팩 밴드(Six Pack Band)’ 캠페인

다시 인도다. 인도가 2년 연속 글래스 부문의 그랑프리를 수상했다는 건 마냥 축하받을 일은 아닌 것 같다. 여전히 젠더 이슈와 관련해 인식을 전환할 여지가 크다는 의미로 돌려 생각할 수 있다. 인도는 글래스 부문의 수상을 노리는 광고인들에게 참으로 무한한 가능성이 열려있는 나라가 아닐 수 없다.

시작은 인도 유니레버의 ‘콘텐츠 데이(Content day)’였다. 크리에이터들과 프로듀서들이 참가하여 유니레버의 각종 브랜드에 녹여낼 자신의 아이디어를 프리젠테이션하던 날, ‘Y Films’는 트랜스젠더로 음악 밴드를 결성하자는 아이디어를 내놓는다. 유니레버 광고팀은 이 아이디어를 듣고 의자에서 떨어질 뻔했다고 회상한다. 하지만 그들은 의자에서는 떨어져도 이 용감한 프리젠터는 떨어뜨리지 않았고, 이내 인도 최초의 트랜스젠더 밴드를 만들기 시작한다. 이 프로젝트는 인도 유니레버의 대표적인 차(Tea) 브랜드인 레드 라벨(Red Rabel) 광고 캠페인이 된다.

인도에서 트랜스젠더는 대략 190만 명 정도로 추산되지만 그간 어디에도 없는 존재였다. 보이지 않는 존재. 심지어 가족에게도 받아들여질 수 없는 존재. 그렇기에 트랜스젠더 밴드를 만드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었다. 6개월이란 시간을 어디에나 있지만 어디서도 볼 수 없는 트랜스젠더를 찾는 데 보냈다. 간신히 찾아낸 이들이 오디션을 볼 때면 건물에 들어서기도 전에 트랜스젠더라는 이유로 관리인으로부터 쫓겨나기 일쑤였다.

식스팩 밴드의 ‘Hum Hain Happy’ MV

하지만 모든 성공담의 마무리가 늘 그렇듯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해낸다. 퍼렐 윌리엄스 ’Happy’의 커버이자 식스팩 밴드의 첫 곡이었던 ‘Hum Hain Happy’는 유튜브에 업로드된 지 몇 개월 만에 8백만 뷰를 기록한다. 뒤이어 나온 ‘Sab Rab De Bande’나 인도의 유명배우 Hrithik Roshan이 피쳐링한 ’Ae Raju’ 또한 연이어 히트를 친다. 인도의 음악방송에 소개되고, 유명 음악 시상식에 출연하면서 식스팩 밴드 멤버들은 자신의 존재가 그곳에 있음을 당당히 보여준다. 마침내, 2016년 인도 땅이 아닌 곳에서도 그들의 존재를 인정받는다. 칸 광고제 글래스 부문 그랑프리를 수상하면서다. 캠페인을 진행했던 유니레버의 레드 라벨 또한 ‘사람을 함께하게 한다(Bringing people together)’는 브랜드 이미지를 더욱 공고히 하게 된 건 물론이다.

식스팩 밴드 캠페인 설명 

그렇다면 이 성공담의 엔딩은 2017년 칸 광고제 시상식에 초청받아 세계 광고인들을 상대로 공연하는 식스팩 밴드의 모습이 아닐까? 클리셰 같지만 이보다 감동적인 해피엔딩이 또 어디 있나.

2017년 칸 광고제 시상식의 식스팩 밴드 축하 무대

 

 

2017년 글래스 부문 그랑프리 수상작, SSGA의 ‘겁 없는 소녀상(Fearless Girl)’ 캠페인

2017년에 들어서면서 세계에는 조금 다른 일들이 벌어지기 시작한다. 이번엔 인도가 아니다. 무려 미국 뉴욕에서 벌어진 캠페인이다. 전년 대비 글래스 부문 출품작은 31%나 늘었고, ‘겁 없는 소녀상(Fearless Girl)’ 캠페인은 글래스 부문을 포함한 4개 부문에서 그랑프리를 수상하는 등 총 18개의 상을 휩쓸었다. 글래스 부문이 신설된 지 3년 만에 벌어진 일이다. 젠더 이슈가 2017년 칸 광고제의 중심에 선 것이다. 캠페인 이름 그대로 정말로 겁 없는, 아니 거침없는 수상이다.

겁 없는 소녀상

캠페인은 심플하다. 세계 여성의 날을 맞이하여 뉴욕 월 스트리트의 상징인 ‘돌진하는 황소(Charging Bull) 동상’ 앞에 130㎝ 정도로 작은 키의 소녀상을 세운 것이다. 상징에 상징으로 맞서는 전략이라고 할까. 이 소녀상은 미국 금융계의 남성중심적인 문화의 개선을 촉구하기 위해 글로벌 투자회사 SSGA(State Street Global Advisors)가 기획한 것이다. 혹시나 소녀상을 보고도 메시지를 이해 못 한 사람이 있을까 친절하게 “여성 리더십이 가지는 힘을 알아라. 그녀가 변화를 만들 것이다. (Know the power of women in leadership, She makes a difference)”라는 문구를 새긴 명판까지 갖춰 놓았다.

이 소녀상은 이내 월 스트리트의 새로운 명물로 떠올랐고, 미국의 청원사이트에는 소녀상의 영구 보존을 청원하는 사람들의 서명이 3만 개 넘게 모였다. 이에 한 달만 세우기로 했던 계획이 바뀌어 2018년 2월까지 황소상 앞에서 소녀상을 만날 수 있다고 하니, 3개월 안에 뉴욕을 방문할 계획이 있는 사람이라면 이 소녀상과 함께 사진을 찍는 기쁨을 누려볼 수도 있을 듯하다.

한 가지 씁쓸한 사실은, 여성리더십을 강조하며 이 캠페인을 기획한 SSGA에는 정작 여성 임원이 전체 임원 11명 중 3명 밖에 없다는 것. 말과 행동을 일치시키며 살기란 쉽지 않은 일이다.

겁 없는 소녀상 캠페인 설명

3년간의 칸 광고제 글래스 부문 그랑프리 수상작을 정리하다 보니 자연스럽게 궁금해진다. 내년 글래스 부문 그랑프리의 영광은 어떤 캠페인이 가져갈까. 혹시 우리나라에서? 설마 내가? 뭔가 아이디어를 내볼 수 있지 않을까 하는 기대감에 인터넷 기사를 읽고 댓글을 살피다가 우리나라의 아직 해결되지 못한 수많은 젠더 이슈들의 현 모습을 마주한다. 인도만큼이나 무한한 우리나라의 수상 가능성을 엿보며 이내 씁쓸해진다.

 

 

Writer

광고회사 카피라이터. 카피 쓴다는 핑계로 각종 드라마, 영화, 책에 마음을, 시간을 더 쓰는 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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