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날처럼 해외로 떠나는 여행이 보편화하기 이전에는 여권에 찍힌 도장의 종류와 개수를 보며 뿌듯해하거나 부러워하는 경우가 더러 있었다. 내 여권에 은하수처럼 아로새겨지는 이름들이 하나둘 늘어날수록 마치 남들이 이루지 못한 과업을 이뤄낸 듯 묘한 희열을 느꼈고, 친구의 여권에 뚜렷하게 찍힌 이민국 도장들은 알 수 없는 도전 의식을 불러일으키곤 했다. 하지만 이제 누가 어디를 얼마나 많이 다녀왔는가는 더 이상 우리의 관심사가 아니다. 그저 내가 가고 싶은 곳에 바람처럼 구름처럼 사뿐하게 다녀오면 그뿐, 도장의 개수와 종류 따위 우리의 마음을 잡아끌지 못한다. 스탬프 놀이는 이제 아이들의 몫으로 남겨둬도 될 때가 온 것이다.

오랫동안 동경해왔던 아티스트의 공연을 찾아 떠나는 사람도 있고, 세계 최고 수준의 축구 경기인 엘클라시코(El Classico)를 보기 위해 스페인행 비행기에 오르는 사람도 있다. 그렇다면 좀 더 맛있는 맥주를 보다 근사하게 마시고자 짐을 꾸리는 모습 또한 그리 낯설지 않은 시대가 온 것이다. 자, 이제 온몸으로 부딪혀 느끼는 맥주의 세계로 떠나보자!

 

1. 에스프레소보다 진한 검은 유혹, 기네스 스토어하우스(The Guinness Storehouse Dublin)

기네스 스토어하우스 홍보 영상

18세기 중반 아일랜드 더블린에서 탄생한 기네스는 현재 전 세계에서 가장 유명한 스타우트들 가운데 하나다. 안 마셔본 사람은 있을지언정 모르는 사람은 없는 맥주가 바로 기네스. 기네스 생맥주에는 질소를 통해 만들어지는 촘촘하고 부드러운 맥주 거품이 올라가는데, 맥주를 한 모금 마시고 나면 마치 카푸치노의 우유 거품처럼 입가에 하얀 흔적이 남곤 한다. 진한 곡물의 향이 느껴지는 흑맥주의 매력을 제대로 느낄 수 있다.
기네스 캔이나 잔을 보면 아일랜드 전통악기인 하프가 그려져 있다. 아일랜드라는 작은 나라와 기네스가 얼마나 깊이 이어져 있는지 짐작이 가는 대목이다. 서울의 상징물로 남산타워나 경복궁을 내세우는 것과 비슷한 맥락이 아닐까 싶다.

기네스 스토어하우스 전경, 이미지 출처 ‘Get Your Guide

기네스의 설립자인 아서 기네스(Arthur Guinness)가 더블린의 세인트 제임스 게이트(St. James’s Gate)에 처음 양조장을 세울 때는 어떤 생각을 했을까? 훗날 자신이 만든 스타우트가 오늘날과 같은 인기를 누리리라 짐작이나 했을까? 적어도 아서 기네스가 동포들을 위해 좋은 일을 하는 것이라 믿었던 것은 분명해 보인다. 당시 더블린에서는 독주에 속하는 진(gin)이 대유행을 하고 있었는데, 그 폐해가 심각해서 일종의 사회문제로 여겨질 정도였다. 기네스는 상대적으로 알코올 도수가 낮은 데다가 비교적 풍부한 영양을 갖고 있었으니 술독에 빠져 살던 주당들에게는 구원의 손길이 될 수도 있었을 것이다.

기네스 스토어하우스는 유구한 역사와 세계적 인기를 얻고 있는 기네스 맥주의 모든 것을 알아볼 수 있는 박물관이자 체험의 공간이다. 기네스의 제조 공정 관람뿐만 아니라, 예술적 가치를 인정받는 광고 포스터 전시, 그리고 공장에서 방금 가져온 맥주 시음까지 2시간 정도는 훌쩍 지나가버리게 하는 유쾌한 공간임에 틀림없다. 스마트폰으로 유투(U2)의 <조슈아 트리(Joshua Tree)> 앨범을 재생하고, 한 손에는 제임스 조이스(James Joyce)의 소설집 <더블린 사람들(Dubliners)>을 폼나게 들고 주변을 어슬렁거리는 것은 부수적인 즐거움일 것!

주소 St. James’s Gate, Dublin 8, Ireland
예약 링크 https://www.guinness-storehouse.com/en
영업시간 09:30~19:00 (17:00 입장 마감)

 

 

2. 고즈넉한 가을의 로맨스를 꿈꾸다, 산토리 교토 브루어리(Suntory Kyoto Brewery)

산토리 교토 브루어리 견학 영상 by. 케이베리

교토의 매력은 역시 가을에 제대로 알 수 있다. 기온이나 청수사 같은 인기 있는 명소를 둘러보는 것도 좋지만, 아라시야마 같은 작은 마을이나 잘 알려지지 않은 한적한 동네 골목을 정처 없이 걸어보는 것 역시 근사한 여행법이 될 것이다. 구글 지도마저 놓쳐버린 운치 있는 뒷골목이나 여행 블로그에 소개되지 않은 맛집을 발견하는 재미는 덤!
교토 시내에서 조금 떨어진 외곽 지역에 자리한 산토리의 교토 양조장은 봄과 가을이면 일본은 물론 전 세계에서 몰려온 방문객들로 붐비곤 한다. 사실 우리나라를 비롯한 외국의 유명 양조장과 비교해 특별히 대단한 점을 발견하기는 어렵다. 다만 주변을 둘러싼 경관이 무척 수려한 데다가 산업시설이라는 것을 잠시 잊게 만들 만큼 깔끔하게 정돈된 장내 분위기가 어쩐지 기분을 좋게 만든다.

이미지 출처 ‘교토 관광청’ 홈페이지 

간략하게 산토리의 역사와 양조 과정 등을 견학한 뒤에는 모두가 기다리는 시음의 순간이 찾아온다. 공장에서 갓 뽑아낸 신선한 맥주인 만큼 사람들의 기대를 배신하지 않는 비범한 맛을 보여준다. 숙련된 조교의 시범으로 맥주 맛있게 따르는 법과 맥주잔 관리 요령까지 배우고 나면 일정 종료! 입과 혀뿐만 아니라, 눈과 감성마저 즐거워지는 순간을 만끽해보자.

주소 3-1-1 쵸시, 나가오카쿄시, 교토부 617-0844
전화 +81 (0)75-951-4151
영업시간 09:30~17:00

 

 

3. 비빔밥만 먹고 오기엔 아까운 전주, 하이트맥주 전주 공장

지난 2013년 영국의 한 유력 경제지에 ‘심심한 한국 맥주’에 대한 비판적 기사가 실린 이래로 우리나라 맥주에 대해 이른바 ‘맛 논쟁’이 끊임없이 이어지고 있다. 게다가 최근에는 외국의 유명 요리사가 내한해 국내 맥주 업체의 홍보에 뛰어들면서 이러한 논란이 새로운 국면을 맞고 있는 듯하다. 과연 우리나라 맥주의 맛은 본질적으로 낮은 수준인 것인가, 혹은 다양성의 부재를 ‘맛이 없다’는 식으로 과대 해석한 것인가에 대해 한 번쯤 고민해봐야 할 시점임은 분명해 보인다.

맥주 공장 내부

하지만 한 가지 분명한 사실은 공장에서 생산되자마자 마시는 우리나라 맥주는 시중에 일반적으로 유통되는 맥주와 상당한 차이가 있다는 점이다. 유통과정과 사후관리 등에 있어서 아직도 보완할 부분이 많다는 사실이 극명하게 드러나는 지점이기도 한데, 하이트진로의 전주 공장은 견학이나 투어의 의미와 더불어 제대로 된 우리나라 맥주에 대한 본격적인 평가의 시발점이 되는 듯하다. 다른 나라나 지역의 양조장 투어 프로그램과 마찬가지로 간략한 역사와 생산시설 견학을 마치고 나면 시음장에 들어서게 된다. 회식 자리와 각종 행사에서 접했던 맥주의 맛을 예상했다면 나름 충격적인 경험을 하게 되는데, 맥주가 대단히 맛있기 때문이다. 앞서 보고 듣고 느꼈던 모든 내용이 머릿속에서 지워질 정도로 기분 좋은 충격은 약 5분 이상 지속되는데, 그제서야 비로소 시공간이 다시 제자리를 찾는다.
이래도 안 가볼 텐가?

주소 전라북도 완주군 용진읍 신지송광로 25-33
투어 시간 9:30, 10:00, 10:30, 13:00, 14:00, 15:00, 15:30 (주말 및 공휴일 휴무)
전화 063-240-6129

 

Writer

번역과 잡다한 글쓰기를 취미이자 밥벌이로 삼고 있다. 맥주 입문서 <맥주 맛도 모르면서> 출간 후, 맥주판 언저리를 맴돌며 강연과 원고 작업을 진행 중이다.
안호균 페이스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