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결말에 대한 구체적이고 결정적인 스포일러는 없으나 후반부 내용을 예측할 수 있는 암시가 다소 포함되어 있습니다.)

이제 더는 무엇을 포기해야 할지도 가늠하기 어려운 작금의 N포 세대 청춘에게, 그저 "원래 청춘은 그런 거다." "견디고 노력하라."는 식의 교훈은 어리석고 낯 뜨거운 위로가 된 지 오래다. 그 대신 2014년 <족구왕>을 시작으로 <걷기왕>(2016), 2017년 초에 개봉한 <장기왕: 가락시장 레볼루션>(이하 장기왕) 등 '왕'이라는 이름의 뜻밖의 응원과 해학을 내세운 영화들이 새로운 위안으로 등장하기 시작했다.

<장기왕: 가락시장 레볼루션> 메인 예고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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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래 1절: 일상의 지속

'무언가의 왕'이라는 이 영화들의 직관적이고 시대착오적인(그래서 재미있는) 제목들은 실제 영화 속 줄거리와 고스란히 연결된다. <장기왕>의 주인공 두수는 우연히 장기의 재능을 발휘하여 탑골공원에 있는 아마추어 장기판을 접수하고, <족구왕>의 홍만섭은 군대는 물론 전역 후 교내 족구대회에서도 활약하며, <걷기왕>의 만복은 육상 경보를 시작한 지 얼마 안 되어 전국체전에까지 도전하는 식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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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족구왕>의 만섭은 이유나 계기 없이 영화 시작부터 그냥 족구를 잘한다

그렇다고 해서 이들의 삶이 딱히 특별한 것은 아니다. 동시대를 살아가는 대다수의 젊은 청년 또는 어린 청소년들이 그러하듯이 구체적인 미래의 목표나 꿈의 서사를 그리지 못한 채 하루하루의 일상을 겨우 영위해갈 따름이다. 영화 세 편 속에서 그나마 구체적인 미래를 그리는 캐릭터는, 배우를 꿈꾸는 <장기왕>의 낙훈과 공무원을 목표로 삼는 <족구왕>의 형국, <걷기왕>의 지현뿐이며 그들마저도 사실 녹록하지 않은 현실에 좌절하거나 힘들어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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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걷기왕> 만복의 짝 지현은 꿈을 묻는 담임선생님의 질문에 공무원이 돼 일찍 퇴근해서 맥주나 한잔하는 것이라고 답한다

 

후렴: 왕의 운명

그런 주인공들이 왕의 길을 발견하고 운명을 받아들이는 것은 별다른 이유 없이 순전히 우연에 의해서다. 족구가 단지 재미있어서 꾸준히 했을 뿐인 형국은 교내에 족구장 재건립을 건의하다가 어느새 교내 족구 전도사이자 인기스타가 되었고, 공부에 뜻도 없고 특별히 다른 데 관심도 없었던 만복은 단지 선천적 멀미증후군 탓에 오랜 시간 도보 등·하교를 한다는 이유로 담임 선생님에게 육상을 권유받는다.

<걷기왕> 예고편

하지만 우연한 출발 및 주인공들의 의도와는 달리 왕의 길은 '왕'이라는 이름이 결코 부끄럽지만은 않을 저마다의 무게가 있었다. <족구왕>의 만섭에게 족구는 그저 재미있는 취미이자 짝사랑하는 안나에게 보이고 싶은 자신의 특기였지만 동시에 일상과 꿈 없는 미래에 지친 학우들에게는 새로운 열정의 도화선이었고, <장기왕> 두수의 내기 장기는 영화 속 노숙인들의 보금자리인 '다시서기센터'의 존폐를 결정지을 건곤일척의 한 판이 되었다. <걷기왕> 만복에게 걷기는 어느새 이것마저 포기하면 자신이 아무것도 아니게 될까 봐 두려운 삶의 전부로 비치기도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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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기왕> 두수의 마지막 장기 한 판에는 여러 사람의 운명이 걸려 있다

 

노래 2절: 초라한 대관식

그러나 화려한 결말의 문턱 앞에서 이들의 대관식은 기대와 달리 볼품없거나 흐지부지한 모습으로 비치기도 한다. 만섭은 족구를 얻고도 그의 짝사랑과 대학교 학기 등록을 잃게 생겼으며, 두수 역시 내기 장기의 다 잡은 승기를 놓칠 위기에 처한다. 만복은 그렇게나 간절히 붙잡았던 경보를 포기하고 다시 예전의 일상으로 돌아갈 것을 고민한다.

<족구왕> 예고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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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인공들이 몰입했던 왕으로서의 당당한 위엄과 권위는, 마치 오리가 백조가 되듯 그동안 쓸모없게만 생각했던 나의 일상과 모습이 특별한 순간과 재능으로 변하는 환상으로부터 생겨났다. 그래서인지 막상 환상이 현실로 닥치는 순간 모든 것이 깨어진 꿈처럼 허무하게 여겨지기도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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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걷기왕> 스틸컷. 왕의 길은 꿈꾸었던 대로 마냥 탄탄대로인 것만은 아니다

 

다시 후렴: 왕의 일상

그렇다고 해서 그들이 더 이상 왕이 아니게 되는 것은 아니다. 만섭은 학교 역사와 학우들의 기억 속에서 영원한 '족구왕'으로, 두수는 희로애락을 함께 한 가락시장 혁명의 동지들에게 자랑스런 '장기왕'으로, 만복 역시 그의 도전을 응원한 선후배와 친구, 가족과 선생님에게 친근한 '걷기왕'으로 남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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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족구왕> 스틸컷. 영원히 왕으로 남을 빛나는 순간의 기억

주인공들은 일상의 원점으로 돌아오지만 왕이 되어 돌아옴으로써 다른 누구도 아닌 자기 자신을 구원한다. 세상은 바꾸지 못할지언정 자기 자신의 주체적인 마음가짐과 선택에 대해서만큼은 주인공 나는 무소불위의 권력을 갖는다. 이는 영화를 보는 한 사람, 한 사람도 마찬가지이다. 텔레비전 애니메이션 <피구왕 통키>(1992~1993), <축구왕 슛돌이>(1992)의 한국 방영 제목처럼 굳이 그 제목에 주인공 이름이 붙지 않은 까닭은 청춘이든 청춘이 아니든 남들이 정해주는 모범이나 서사에 상관없이 우리 모두 각자의 일상 속에서 무언가의 왕이 될 자격이 충분하기 때문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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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기왕> 스틸컷. 자기 삶을 구원한 것은 주인공 두수만이 아니었다

 

 

Writer

차분한 즐거움을 좇는다. 그래서 보고 들은 것과 일상에 대한 좋은 생각, 좋아하는 마음을 글로 옮긴다. 학부 시절 네이버 파워블로그에 선정된 후 쓰기를 이어와 현재 한국대중음악상 선정위원으로 활동 중이다. 웹진 <음악취향Y>, 잡지 <재즈피플>, 신문 <아주경제> 등에 글을 기고한다. 누구나 늘 즐겁기를 바란다. 너무 들뜨지 않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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