계절이 바뀔 때마다 어김없이 우리를 찾아오는 음악이 있다. 매년 봄이 오면 버스커버스커의 ‘벚꽃 엔딩’을 귀에 딱지가 앉을 만큼 듣게 된다. 또한 여름이 무르익을 즈음에는 비치보이스(The Beach Boys)의 ‘Surfin’ USA’가 TV 프로그램의 배경 음악으로 쓰이곤 한다. 추운 겨울에는 비발디(Antonio Vivaldi)의 ‘Four Seasons’ 가운데 2악장, 그리고 그렇다, 바로 그 아티스트! 우리 모두 예상할 수 있는 바로 그 팝스타 머라이어 캐리(Mariah Carey)의 ‘All I Want for Christmas is You’의 손아귀를 벗어날 수 없는 계절 또한 바로 겨울이다. 그럼 지금 우리가 그 한복판을 지나고 있는 가을은 어떨까? 주옥같은 명곡들이 있겠지만 베리 매닐로(Barry Manilow)의 ‘When October Goes’를 빼고 가을의 사운드트랙을 논할 수는 없을 것 같다.
음악이 이처럼 계절의 변화를 알리고 추억의 배경음악이 되어준다면, 매년 열리는 행사와 축제는 바쁜 일상 속에 쉼표 하나 찍을 수 있는 '쉴 만한 물가이자 푸른 초장’이 아닐까 싶다. 그렇다면 10월에는 옥토버페스트(Oktoberfest)를 핑계 삼아 한번 놀아보면 어떨까? 굳이 독일까지 날아가지 않더라도 말이다.

 

1. 옥토퍼베스트는 핑계일 뿐, 그냥 맥주를 마시자는 말씀!

'2016 옥토버페스트' 보도 영상

옥토버페스트가 처음 시작된 것은 1810년 10월 12일이었다. 바로 이날 바바리아(Bavaria)의 황태자 루드비히(Ludwig)의 결혼식이 열렸는데, 뮌헨(Munich) 시민들은 광장에 모여 축제를 벌였고, 더불어 황실이 주최한 경마 대회를 즐겼다고 한다. 일단 한번 재미있게 놀아본 뮌헨 시민들은 그 감흥을 잊지 못했는지 매년 비슷한 형태의 축제를 벌이게 되었다. 시간이 흐름에 따라 회전목마 같은 놀이기구를 비롯해 사람들의 갈증을 날려줄 맥주 가판대가 하나둘 들어서기 시작했다. 19세기 후반이 되자 맥주회사들이 본격적으로 축제에 뛰어들기 시작했는데, 오늘날 옥토버페스트의 상징으로 자리 잡은 대형 맥주 텐트들 또한 이때 등장한 것이다.
2016년을 기준으로 이 행사를 위해 뮌헨을 찾는 사람들의 숫자는 무려 600만 명에 달하는데, 주말 동안에는 텐트에 자리를 잡기조차 힘든 게 사실이다. 맥주는 대개 1리터짜리 잔에 제공된다. ‘믿거나 말거나’ 식으로 들려오는 이야기에 따르면, '한 잔을 모두 비우지 못한 채 화장실에 가는 사람은 사람도 아니'라는 핀잔 아닌 핀잔을 듣는다고 한다. 그러니까 자리에 앉아 맥주를 주문하기 전에 화장실부터 먼저 다녀오도록 하자.

 

2. 서울에서 느껴보는 비어홀의 감흥 - 공릉동 바네하임(Vaneheim)

사진 출처 ‘바네하임’ 공식 페이스북
사진 출처 ‘바네하임’ 공식 페이스북

서울 노원구 공릉동의 조용한 주택가 한 귀퉁이를 오롯한 모습으로 지키고 있는 바네하임(Vaneheim)은 2000년대 초반까지 거슬러 올라가는 비교적 긴 역사와 오랜 경력에서 비롯된 탄탄한 내공을 갖고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최근 우리나라에 불어닥친 크래프트 비어 열풍의 중심에서는 한 걸음 살짝 비켜서 있는 가게이기도 하다. 하지만 최근 들어 여러 국제대회에서 수상하는 한편, TV 등에 소개되는 바람에 많은 사람의 주목을 받고 있다. '작지만 강하다'는 표현은 들을 때 마다 예외 없이 진부하게 느껴지긴 해도, 우리 주변에서 이 말의 의미를 실제로 와 닿게 하는 대표적인 예가 바로 이곳 바네하임일지도 모른다. 풋내기들과의 비교를 불허하는 10년 이상의 공력과 기본 라인업을 채우는 세 종류의 맥주를 통해 바네하임이 지향하는 바를 쉽게 알 수 있다. 그러니까 벌컥벌컥 마시기에 좋은 ‘호박색’ 에일과 곡물의 풍미가 훌륭한 ‘검은색’ 에일, 그리고 지난해 10월부터 선보이고 있는, 국내에서는 도무지 만나기 힘들었던 알트비어(Altbier)까지. 소박하지만 깊은 풍미를 보여준다. 더불어 벚꽃이나 장미를 활용한 계절맥주(seasonal beer) 또한 놓칠 수 없는 즐거움인데, 계절맥주의 특성을 고려해 방문하기 전에 미리 재고 상황을 확인해보는 것도 좋을 것이다. 비교적 널찍한 비어홀에서 가까운 사람들과 흥겨운 분위기를 내고 싶은 분들에게 추천, 맥주와 더불어 독일식 음식을 아우르는 다채로운 푸드 페어링을 즐기고 싶은 분들에게는 한 번 더 추천!

주소 서울시 노원구 공릉로32길 54
전화 02-948-8003
영업시간 15:00~01:00

 

3. 제대로 마셔보자, 독일식 맥주 - 합정동 크래머리(Kramerlee)

사진 제공 크래머리

합정동의 작은 동네 한쪽을 다정한 맥주 향기로 채우고 있는 크래머리(Kramerlee)는 우리나라에서 정통 독일식 맥주를 구현하고자 의기투합한 사람들, 독일인 브루어 크래머(Kramer)와 두 명의 한국인 브루어 리(Lee)의 이름을 전면에 내세웠다. 이들은 좀 더 강렬하고 보다 특이한 맥주를 추구하는 업계의 최근 추세와는 조금 거리가 있는, 전통에 충실하면서도 시대에 뒤떨어지지 않는 묵직한 맥주를 빚어낸다.
독일 바바리아 지방을 중심으로 지난 500여 년간 유지되고 있는 이른바 ‘맥주순수령(Reinheitsgebot)’에 따라 독일에서는 물, 홉, 맥아, 그리고 효모 이외의 재료는 맥주에 첨가할 수 없다. 따라서 오렌지 껍질이나 쌀 등이 첨가된 맥주는 공식적으로는 맥주라 부를 수 없다. 크래머리의 모든 맥주가 이러한 맥주순수령을 따르지는 않지만, 이들의 기본 철학이 맥주순수령과 깊이 맞닿아 있는 것 또한 사실이다.
필스너(Pilsner)가 화려하지는 않지만 기품이 느껴지는 베네딕트 컴버배치(Benedict Cumberbatch)라면, 바이젠복(Weizenbock)은 진지한 표정 속에 도발적 눈빛을 번뜩이는 하정우를 떠올리게 만든다. 반드시 마셔볼 것! 최근에는 크래프트 맥주 팬들의 요청에 부응하고자 크래머리만의 방식으로 만들어낸 인디아 페일 에일(India Pale Ale)을 내놓고 있는데, 일반적인 IPA에 다소 부담을 느꼈던 사람들에게 특히 호의적인 반응을 얻고 있다.
살며시 눈을 감고 맥주의 맛을 음미하다 보면 시공간의 개념이 다소 흐릿해지는 초자연적 경험을 할 수 있을지도. 프랑크푸르트(Frankfurt) 뒷골목 어느 작은 펍에서 느낄 수 있을 법한 정서적 울림을 원하는 이들에게 추천, 다양한 종류의 자가양조 맥주들을 비교해보고 싶은 이들에게 또 한 번 추천! 그럼 모두 함께 프로스트(Prost, 건배)!

주소 서울시 마포구 토정로 31
전화 010-2496-5429
영업시간 17:00 ~01:00 (주말은 15:00부터)

 

시대를 평정했던 만화 <슬램덩크>에는 '왼손은 거들 뿐'이라는 유명한 대사가 나온다. '어차피 오른손으로 중심을 잡고 슛을 하는 것이 중요할 뿐, 왼손은 그저 도와주는 정도에 불과하다'는 의미를 간결하게 표현한 말이다. 옥토버페스트에는 '맥주는 거들 뿐'이라는 말이 어울릴지 모른다. 평소 혼자 마시는 맥주를 즐겼던 사람들이라도 10월에는 맥주를 핑계로 주변의 지인들을 모으고 또 모아서 왁자지껄한 축제 한 판을 흐드러지게 즐겨봐도 좋을 듯하니까.

 

메인 이미지 François Jaques, <Peasants Enjoying Beer at Pub in Fribourg>(1923)

 

Writer

번역과 잡다한 글쓰기를 취미이자 밥벌이로 삼고 있다. 맥주 입문서 <맥주 맛도 모르면서> 출간 후, 맥주판 언저리를 맴돌며 강연과 원고 작업을 진행 중이다.
안호균 페이스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