담담하게, 과장되게, 혹은 풍자적으로 ‘핵전쟁’을 다룬 영화들이 있다. 가상의 시나리오는 모두 다르지만, 그 결말은 하나같이 참담하다. 문명과 인류, 살아있는 모든 것을 파괴하는 그 최후의 날을 들여다보자.

 

1. <그날이 오면>

On the beach ❘ 1959 ❘ 감독 스탠리 크레이머 ❘ 출연 그레고리 펙, 에바 가드너, 프레드 아스테어, 안소니 퍼킨스

핵전쟁으로 남반구 호주의 인류만 살아남았다. 마침 대서양을 항해 중이던 미국 잠수함 선원들은 간신히 살아남았고, 이들은 호주로 향한다. 하지만 방사능 낙진으로 그곳마저 파멸을 앞둔 상황. 인류는 희망이 사라진 마지막 순간을 어떻게 준비할까?

영화의 원제는 'On The Beach'로, 영국계 호주 작가인 네빌 슈트(Nevil Shute)의 동명 소설을 영화화했다. 원작에서는 죽음 앞에 평등해진 인류를 차분하고 평화롭게 그렸지만, 영화는 약탈과 범죄로 물든 현실을 보여준다. 그 때문인지 원작 소설가는 이 영화를 무척 싫어했다는 후문이 있다. 하지만 당시 최고의 배우였던 그레고리 펙과 에바 가드너의 만남은 암울한 배경 속에서도 빛난다.

<그날이 오면> 예고편

 

2. <매드맥스:분노의 도로>

Mad Max;Fury Road ❘ 2015 ❘ 감독 조지 밀러 ❘ 출연 샤를리즈 테론, 톰 하디, 니콜라스 홀트, 로지 헌팅턴 휘틀리

<매드맥스> 시리즈는 1971년 첫 개봉한 작품으로, ‘포스트 아포칼립스(종말 이후)’를 다룬 영화에서도 단연 백미로 꼽힌다. 암울하고 폭력적이지만 마지막 희망의 힌트를 심어 두는 세계관, 투박하고 거친 질감의 자동차 추격씬 등은 외과 출신의 호주 감독 '조지 밀러'를 B급 매니아들의 거장으로 등극하게끔 한다. 그리고 <매드맥스 3> 이후 무려 30년이 지난 2015년, <매드맥스: 분노의 도로>가 공개되었다.

무엇보다 전세계를 놀라게 한 것은, 세월이 조지 밀러 감독에게 늙음이 아니라 성숙을 선사했다는 사실. 주체적이고 능동적인 여성 주인공, CG 없이 ‘아날로그’로 구현하여 더욱 생생한 화면, 심장을 두드리는 사운드, 핵전쟁 이후 자원을 독점한 악당 독재자에 대한 묘사 등은 으레 ‘포스트 아포칼립스 영화’라면 보여줄 것으로 기대되던 클리셰들을 충격적으로 부수어 버리며 전세계의 찬사를 받았다.

수 년에 걸쳐 촬영한 영화답게 재미있는 비하인드 스토리가 많다. 특히 원래 촬영지로 예정되어 있던 호주의 붉은 사막이 기록적인 폭우로 인해 녹지로 변해버려 촬영 장소를 바꿀 수 밖에 없었다는 일화가 유명하다. 핵전쟁의 절망을 다룬 영화가 생동하는 자연에 의해 경로를 바꾸었다는 사실이 흥미롭다.

<매드맥스: 분노의 도로> 예고편

 

3. <Threads>

Threads ❘ 1984 ❘ 감독 Mick Jackson ❘ 출연 Karen Meagher, Reece Dinsdale, David Brierly

영국 BBC에서 제작, 미국의 <The Day After>(1983)보다 더욱 사실적이고 비관적인 미래를 다룬 영화. 2014년 '테이스트 오브 시네마(Taste of Cinema)'에서 선정한 '가장 보기 불편한 영화 20'에 <홀로코스터>, <마루타> 등을 제치고 1위를 차지했다.

사건은 소련이 영국에 ICMBs(대륙간 탄도 미사일)을 발사하면서 전개된다. 소련과 미국의 국제 분쟁 상황 속에서, 영국 정부는 핵전쟁에 대비하도록 국민들을 교육시킨다. 하지만 전쟁 후 질병으로 서서히 죽어가는 사람들의 모습은 그러한 대비책이 아무 쓸모 없다는 사실을 확인시켜줄 뿐이다. 핵폭발 이후 꽁꽁 얼어버린 도시, 고양이가 멸종된 영화 속 현실은 그저 참담하다. 지금까지 수많은 재난 영화에 영향을 끼쳤지만, 그 악명 때문인지 우리나라에서 딱 한번 TV를 통해 방영되었을 뿐이다.

<Threads> 예고편

 

4. <검은비>

Black Rain ❘ 1989 ❘ 감독 이마무라 쇼헤이 ❘ 출연 타나카 요시코, 키타무라 카즈오, 이치하라 에츠코, 미키 노리헤이

‘이부세 마스지'의 동명 소설을 원작으로, 히로시마에 원자폭탄이 투하된 이후의 모습을 담은 영화. 원폭이 투하되기 전 마냥 한가롭기만 했던 사람들의 일상은 환한 빛과 함께 모두 파괴된다. 방사능 물질인 검은 낙진이 떨어지는 것을 어리둥절하게 바라보는 사람들, 녹아내리는 피부를 그대로 응시하는 눈빛이 화면에 그대로 담겨 있다.

실제 있었던 사건의 후일담이기에 비극은 더욱 생생하게 다가온다. 이 영화는 칸 영화제 황금종려상을 두 차례나 수상한 세계적인 감독 이마무라 쇼헤이의 작품이다. 감독은 생전에 "지저분하고, 정말 인간적이면서 일본적인, 심란한 영화를 만들고 싶다"고 밝힌 적이 있다. 그의 말처럼 영화는 아름다운 흑백 영상을 통해 전쟁의 참상을 담담하고 인상깊게 보여준다. 1989년 키네마 준보와 일본 아카데미의 최우수 영화상을 수상한 작품.

<검은 비> 예고편

 

5. <닥터 스트레인지러브>

Dr. Strangelove ❘ 1964 ❘ 감독 스탠리 큐브릭 ❘ 출연 피터 셀러스, 조지 C 스콧, 스털링 헤이든

‘가장 유머러스하고 풍자적인 블랙코미디'이라는 수식어가 붙어 다니는, 스탠리 큐브릭 감독의 작품이다. 영화에서 미국의 '잭 D.리퍼 장군'(스터링 하이든)은 이상한 망상에 사로잡혀 핵 폭격기를 출격시키는데, 이로 인해 소련이 가지고 있는 전대미문의 핵무기가 활성화될 예정. 물론 소련은 ‘전쟁을 막기 위해’란 명목으로 그 핵무기를 설치했다고 하는데, 그 덕에 지구가 멸망할 상황에 처한다. 미소 정상이 모인 워룸에서 핵전쟁을 막기 위한 회동이 일어나지만 그저 우스꽝스럽기만 하다. 인간의 오만과 광기로 핵전쟁은 언제든 일어날 수 있다는 메시지를 담은 이 영화를 두고 당시 미국 정부는 '터무니없다' 며 비난했다.

영화 속 등장 인물의 이름도 재미있다. 극단적으로 반공에 몰두하다 결국 핵전쟁을 시작해버린 '잭 D.리퍼 장군'은 영국의 유명한 살인마 '잭 더 리퍼'에서 따왔다. 극중에서 답답한 행동으로 옳은 판단이 전달되는 것을 가로막는 대령의 이름 '뱃 구아노'(Bat Guano)는 박쥐 똥이라는 의미다. 더불어 1인 3역을 연기한 피터 샐러스의 연기도 흥미롭다. 그가 맡은 역할이 무엇인지 찾아보는 재미도 쏠쏠할 것이다.

<닥터 스트레인지러브> 예고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