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7년 제74회 베니스국제영화제에서 길예르모 델 토로 감독의 신작 <셰이프 오브 워터>(The Shape of Water, 2017)가 황금사자상을 거머쥐면서 사람들은 델 토로 감독의 페르소나인 더그 존스에게 다시 한번 주목하지 않을 수 없게 되었다. 흔히 배우는 얼굴로 자기를 드러내고 대사와 표정으로 연기하기 마련이다. 그러나 얼굴, 대사, 표정 없이 연기하고도 영화마다 자기만의 인장을 깊이 새겨내는 이가 있으니, 바로 더그 존스다. 192cm의 큰 키 못지않게 유난히 가늘고 긴 팔다리와 손가락을 이용해 말을 건네고, 각종 SF와 판타지 및 호러 장르에 출연해 온몸에 특수분장과 CG를 도배하고도 결코 숨길 수 없는 존재감을 발휘하는 더그 존스의 인장들을 그가 연기한 캐릭터별로 돌아본다. 

<셰이프 오브 워터: 사랑의 모양> 포스터

 

정체불명의 존재

<헬보이 2: 골든 아미>(2008) 스틸컷. ‘에이브 사피엔’을 맡은 더그 존스

더그 존스라는 이름을 본격적으로 알린 영화는 아마도 <헬보이>(2004)일 것이다. 2편까지 이어진 <헬보이> 시리즈에서 주인공 ‘헬보이’의 파트너로 인간과 양서류 사이 정체를 알 수 없는 외양을 하고 있지만, 사실은 귀엽고 매력적인 성격으로 똘똘 뭉친 ‘에이브 사피엔’ 역할을 맡아 영화판 ‘헬보이’ 세계관을 완성하는 데 혁혁한 공을 세웠다. 특히나 원작 코믹스보다 더 만화 같은 델 토로 감독의 상상력이 집약된 캐릭터 이미지가 그만의 몸짓으로 완벽히 살아나면서 주인공 못지않은 매력을 뿜어낸 바 있다.

에이브 사피엔을 내세운 <헬보이 2: 골든 아미> 예고편

 

공포영화의 단골들
- 광대, 좀비, 뱀파이어

초기에는 꽤 뻔한 역할을 맡았다. 시절을 거슬러 올라가 팀 버튼의 <배트맨 2>(1992)의 크레딧에서 ‘마른 광대(Thin Clown)’로 이름을 올리고 있는 것이 그렇다. 단역이었지만 영화의 메인 빌런이었던 펭귄맨의 하수인 중 한 명으로 등장해 제법 기억에 남는 모습을 보여주었다. 이듬해에는 <하이 스쿨 뮤지컬>(2006), <마이클 잭슨의 디스 이즈 잇>(2009) 같은 영화로 잘 알려진 케니 오르테가 감독의 초창기 연출작 <호커스 포커스>(1993)에 출연해 마녀의 좀비 애인이라는 독특한 배역을 소화했다. 영화 <쿼런틴>(2008) 속 충격적인 비주얼의 좀비 바이러스 감염자 또한 더그 존스이다.

<호커스 포커스> 스틸컷
<호커스 포커스> 촬영 스틸컷. (왼쪽부터) 케니 오르테가 감독, 더그 존스, 분장을 맡은 토니 가드너

 

시선강탈, 뉴타입 괴물들

이미지가 일정한 전형에 갇혀 있을 수밖에 없는 전통적인 존재와 달리, 새로운 형태의 괴물 형상과 그에 딱 맞는 더그 존스의 연기로 잊을 수 없는 장면들을 만들어낸 괴물들이 있다. 길지 않은 등장이지만 인상의 강렬함만으로 따졌을 때 더그 존스 커리어 최정점에 위치할 <판의 미로 - 오필리아와 세 개의 열쇠>(2006) 속 ‘창백한 남자(Pale Man)’ 역할이 그중 하나다. 속칭 ‘눈알괴물’로 알려진 이 캐릭터의 충격적인 등장과 함께, 고야의 그림 <아들을 잡아먹는 사투르누스>를 연상시키는 요정 학살 장면은 동화로 여겨졌던 본 영화의 장르를 일순 의심케 한다. 잘 알려지지 않았지만 앞서 <둠>(2005)에 등장했던 괴물 역할이나, 근래에 역시 델 토로 감독과 함께했던 <크림슨 피크>(2015) 속 ‘레이디 샤프’의 이미지도 가히 충격적이다.

<판의 미로 - 오필리아와 세 개의 열쇠>(좌), <크림슨 피크>(우) 스틸컷

 

인간 너머의 존재
- 휴머노이드, 천사와 악마, 반신, 외계인

더그 존스의 몸 언어는 우리의 상상 너머에 존재하기도 한다. 영화 <타임 머신>(2002)에서는 무려 80만 년 이후의 인류를 사냥하는 휴머노이드 종족 ‘멀록’을 연기한다. 마치 커다란 ‘골룸’처럼 등장해 도망치는 인간들을 향해 울부짖는 그의 고갯짓은 결코 인간의 것도, 짐승의 것도 아니어서 흠칫 놀라게 된다. 앞서 언급했던 <헬보이2: 골든 아미>(2008)에서는 ‘에이브 사피엔’ 뿐만 아니라 괴물 문지기 ‘챔버레인’ 역과 함께 ‘죽음의 천사(Angel of Death)’, 곧 사신의 모습도 연기해 무려 1인 3역을 맡았다. 똑같이 느릿하고 우아한 손짓이지만 한끝의 표현에 따라 귀여운 에이브가 되기도 소름 끼치는 사신이 되기도 하는 그의 표현이 놀랍기 그지없다.

<타임 머신>(좌), <헬보이2: 골든 아미>(우) 스틸컷

악마 같은 사신이 아닌 진짜 악마를 연기한 적도 있다. 1999년 TV 시리즈 <미녀와 뱀파이어>의 4번째 시즌 10번째 에피소드에서 ‘젠틀멘(Gentlemen)’이라는 그룹의 키 큰 수장으로 나와 사악한 모습에 말쑥하게 정장을 갖춰 입은 산뜻하고도 섬뜩한 악마 비주얼을 선사하기도 하였고, <키스 더 데빌 인 더 다크>(2016)라는 29분짜리 단편영화에서는 실감나는 분장으로 영상의 하이라이트를 독점하기도 했다. 그 밖에 <판타스틱4: 실버 서퍼의 위협>(2007) 속 지구 밖 외계에서 온 빌런 ‘실버서퍼’를 연기하기도 했지만, 최고의 연기는 아무래도 <판의 미로 - 오필리아와 세 개의 열쇠>의 ‘판’을 꼽고 싶다. 선인지 악인지 모를 ‘판’의 신비로운 역할과 부산스러운 더그 존스 몸 언어의 궁합은 어디에서도 찾아보기 힘든 캐릭터를 완성해냈다.

<판타스틱4: 실버 서퍼의 위협> 포스터(좌), <판의 미로 - 오필리아와 세 개의 열쇠> 스틸컷
<키스 더 데빌 인 더 다크> 예고편. 좀처럼 보기 힘든 인간의 모습으로 등장한 더그 존스는 아니나 다를까 악마로 변신하여 1인 2역을 연기한다

 

Writer

차분한 즐거움을 좇는다. 그래서 보고 들은 것과 일상에 대한 좋은 생각, 좋아하는 마음을 글로 옮긴다. 학부 시절 네이버 파워블로그에 선정된 후 쓰기를 이어와 현재 한국대중음악상 선정위원으로 활동 중이다. 웹진 <음악취향Y>, 잡지 <재즈피플>, 신문 <아주경제> 등에 글을 기고한다. 누구나 늘 즐겁기를 바란다. 너무 들뜨지 않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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