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는 지난 한 세기 가장 대중적이고도 보편적인 간접체험 매개체였다. 시청각을 동반한 가상을 마치 현실인 양 투사해내는 영화의 매력은 다른 매체가 쉽사리 대체하지 못하는 것으로서 장시간 우리 곁에 머물러 왔다. 그중 데이빗 린치는 실로 ‘악몽’을 체험하게 하는 감독이라고 할 수 있다. 의식과 무의식의 희미한 경계에서 발생하는 비논리적이고도 불쾌한 악몽의 선명한 경험은 우리가 그의 작품에 열광하게 하는 이유도, 동시에 그의 작품을 혐오하게 하는 이유도 된다.

<데이빗 린치: 아트 라이프> 스틸컷 속 데이빗 린치의 모습

 

컬트의 신성, 제왕이 되다

데이빗 린치 이름에 으레 따라붙는 ‘컬트’라는 단어는 의미상으로 기실 작품의 내재적 형식에 따른 장르 일종이라기보다 외재적 소비에 의거한 편의적 구분으로 보는 편이 적절할지도 모른다. 이는 그것이 예배, 제사, 숭배, 숭배자의 무리를 뜻하는 사전적 정의에 따라 소수의 마니아나 젊은 층으로부터 전폭적인 지지를 받았던 탈주류 영화에 대한 통칭이었기 때문이다. 물론 주로 과도한 폭력과 섹스를 소재로 삼거나 엽기적이고 기이한 표현방식을 택하는 등의 공통점이 있기도 했지만 그 주제와 형식, 감성은 무정형으로 드러나 각기 다양한 양태를 대표했다.

<이레이저 헤드> 포스터, <멀홀랜드 드라이브> 스틸컷

그중 장편 데뷔작 <이레이저 헤드>(1977)를 통해 컬트 영화의 신성에서 전범으로까지 숭배받는 데이빗 린치 작품들의 특징은 더욱 독특하다. <이레이저 헤드>만 해도 개봉 당시에는 난해하고 괴상한 화면에 의해 상영을 금세 내려야 했지만, 후일 한 배급자의 눈에 띄어 몇 년 동안 극장 심야프로그램으로 장기간 상영되면서 그 진가를 알릴 수 있게 되었다.

<이레이저 헤드> 예고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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린치의 영화들은 사실 난해한 것으로 악명이 높다. 그러나 한편으로는 그것이 단지 불가해한 내용을 의미 없이 열거하기 위한 것이 아니라 감독 자신의 이야기를 반영하거나 겉으로는 쉬이 파악되지 못할 주인공 내면의 무의식과 금지된 욕망까지 가감 없이 드러내는 시선을 담아내기 위함이기에 비록 소수일지언정 팬들은 그 복잡한 이야기에 깊이 빠져들게 된다. 데이빗 린치의 최고작 중 하나로 꼽히는 <멀홀랜드 드라이브>(2001)만 해도 주인공으로 하여금 질서 있는 일상 규율 이면에 감추어진 내면의 환상을 누비게 한다. 이 같은 린치의 작가정신은 그가 초월명상을 수십 년간 수행해온 데서 오는 것이기도 하다. 실제로 그는 관련 재단을 만들고 명상수행을 확산시키는 운동을 벌이기도 했으며, <멀홀랜드 드라이브>의 경우 그가 명상 도중 떠오른 아이디어를 영화로 만든 사례이다.

<멀홀랜드 드라이브> 예고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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뒤죽박죽 무의식(無意識), 시적 의식(儀式)이 되다

“영화가 현실이며 간통이 하나의 관습이다. 그 나라에선 내 몸이 외부와 섞여 한없이 넓어진다. 꿈이 내부와 외부의 모든 거울을 깨준다. 꿈조차 사라지고 한 편의 시가 완성되었다.”
- 김혜순 ‘당신의 꿈속은 내 밤 속의 낮’

김혜순 시인의 시구 한 구절은 마치 데이빗 린치의 작품을 설명하기 위해 존재하는 듯하다. 린치의 작품은 여러 주체가 복잡하게 얽히고설켜 있기보다 주로 한두 주인공의 서사가 단일 시점으로 전개된다. 그런데도 린치의 작품이 유독 어렵게 파악되는 것은, 이야기가 하나의 시점(視點)일지언정 그것이 마치 꿈처럼 현실과 환상의 경계가 없어진 혼몽한 세계를 시점(時點)을 알 수 없이 혼란스럽게 오가기 때문일 것이다. <멀홀랜드 드라이브>를 비롯해 <블루 벨벳>(1986)이나 <트윈 픽스>(1992)와 같은 작품 모두가 몽환적인 작품 구조로 되어 있다.

<블루 벨벳>, <트윈 픽스> 포스터

주인공은 모를지언정 나만큼은 꿈과 현실을 구분해 이야기를 따라갈 수 있을 것 같다가도 어느새 나마저도 영화 속 인물과 마찬가지로 현실의 경계를 벗어난 초현실적인 상황이나 전모를 알 수 없는 사건의 미궁 속으로 빠져들게 되는 식이다. 이를 통해 관객은 린치가 설계한 꿈의 세계 속 사건의 경계를 가늠하고 탐문하는 몰입의 주체가 되며, 이를 통해 관객은 그 서사가 명징하게 제시된 대개의 영화 속 줄거리를 고스란히 따라가는 것과 또 다른 긴장감과 재미를 느끼게 된다.

<블루 벨벳> 2016년 재개봉 예고편

 

희미한 악몽, 선명한 현실이 되다

데이빗 린치의 작품이 ‘시’가 되는 것은 그것이 결코 단순한 의미로 파악되지 않는 상징적이고 은유적 이미지들을 곳곳에 배치하기 때문이다. <광란의 사랑>(1990)의 경우 린치는 고전 명작 <이상한 나라의 앨리스>(1951)를 모티프로 하면서 동시에 <오즈의 마법사>(1939)의 상징들을 적극적으로 차용하지만, 동시에 이것이 앞선 자기만의 방식으로 소화된 것으로서 단순한 패러디나 오마주를 넘어서는 독창적인 미학이 된다.

<광란의 사랑> 스틸컷. 도로시나 앨리스 대신 세일러 역의 니콜라스 케이지가 사랑의 환상을 누빈다

이 과정에서 데이빗 린치는 자신이 의도하는 이미지나 환상을 드러내기 위해 반드시 실체화해야 할 대상을 선명하게 드러내 놓는다. 그의 영화에 대한 불편함은 불친절한 서사에서 오는 난해함 이외에 바로 이러한 폭력성과 괴상한 표현에서도 발생한다. 이는 린치가 영화를 본격적으로 시작하면서 미술을 공부했기 때문이기도 하다. 그에게 영화는 관객과의 친절한 소통의 도구가 아닌 정교한 해석작업을 요구하는 예술적인 정신 자체인 것이다.

<데이빗 린치: 아트 라이프> 예고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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분명한 것은 데이빗 린치의 세계를 직접 경험하기 전 린치에 대해 떠도는 말과 해석만으로 그의 작품에 대한 도전을 포기한다면, 우리가 경험 가능한 간접체험의 영역 역시 데이빗 린치의 독자적 작품 세계의 영역만큼 줄어들 것이라는 점이다. 주지하면 그의 작품은 서사가 실종된 조잡한 이미지의 배합이 아니며 해석을 완강히 거부하는 것, 고의로 의미 없는 불편한 이미지를 전시하는 것도 아니다. 린치의 작품 세계에 대한 치열한 시적 해석과 정답 없는 해명 작업의 적당한 쾌감은 보지 않고는 결코 겪지 못할 것이다. <데이빗 린치: 아트 라이프>에서는 데이빗 린치가 직접 출연하고 설명하는 그의 작품 세계를 조금이나마 더 확인해볼 수 있다.

 

Writer

차분한 즐거움을 좇는다. 그래서 보고 들은 것과 일상에 대한 좋은 생각, 좋아하는 마음을 글로 옮긴다. 학부 시절 네이버 파워블로그에 선정된 후 쓰기를 이어와 현재 한국대중음악상 선정위원으로 활동 중이다. 웹진 <음악취향Y>, 잡지 <재즈피플>, 신문 <아주경제> 등에 글을 기고한다. 누구나 늘 즐겁기를 바란다. 너무 들뜨지 않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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