카운트 베이시, 빌리 홀리데이, 로버트 존슨, 밥 딜런, 아레사 프랭클린, 브루스 스프링스틴, 스티브 레이 본. 20세기 미국의 대중음악을 대표하는 최고 스타라는 점 외에 어떤 공통점이 있을까? 이들은 모두 무명 시절에 한 사람에 의해 발굴되어 스타로 떠오르기 시작했다. 그들의 재능을 알아본 사람은 존 하몬드(John Hammond, 1910~1987), 스타 매니저 겸 음악 프로듀서였다. 그는 재즈, 블루스, 소울, 록 등 다양한 장르의 아티스트를 발굴하여 음반사와 맺어주는 역할을 했다. 하지만 그는 단지 음악적인 재목을 알아본 프로듀서가 아니었다. 흑백 분리가 엄중한 당시의 대중음악 비즈니스계에서 불합리한 관행을 깨려고 노력한 선구자였고 사회운동가이기도 했다.

2016년 기네스 맥주 광고의 토픽으로 등장한 존 하몬드

그는 뉴욕의 명문 밴더빌트 가문에서 태어났다. 그의 증조할아버지는 미국에서 가장 부유한 철도왕 윌리엄 헨리 밴더빌트(William Henry Vanderbilt, 1821~1885)였다. 어릴 때부터 클래식 음악만을 듣다가 하인으로부터 처음 흑인음악을 접한 그는, 10대 시절 흑인 거주지역인 할렘을 드나들며 베시 스미스(Bessie Smith)의 노래를 듣고 인생의 방향을 틀었다. 예일대를 중퇴하고 20대에 본격적으로 쇼 비즈니스에 뛰어들었다. 업타운의 대저택에서 나와 그리니치 빌리지의 작은 아파트에 거주하면서 라디오 DJ 일을 시작했다. 그러던 중 그는 음악 산업과 사회 전반에 퍼져 있는 인종 분리 문제를 실감하게 되었다.

1930년대 쇼비즈니스에 뛰어든 젊은 존 하몬드(오른쪽에서 두 번째)

“I heard no color line in the music (음악에서는 피부색을 들을 수 없어요)”라는 그의 말은 미국의 대중음악 역사에 회자될 정도로 유명하다. 그가 쇼비즈니스에 뛰어든 1930년대의 대중음악은 백인과 흑인으로 완전히 분리된 시기였다. 그는 백인 악단과 흑인 악단, 백인 출입 클럽과 흑인 출입 클럽으로 엄격히 구분된 환경에서, 할렘을 드나들며 흑인 뮤지션들과 친분을 쌓았고, 어떻게 하면 이 불합리한 관행을 없앨지를 궁리했다. “재즈에 있어서 흑인의 우월성을 백인에게 깨닫게 하는 것이 내가 생각해낼 수 있는 가장 효과적인 저항 수단이었죠.”라며 당시를 회상한다. 후에 자신의 누이와 결혼하여 매제가 된 당대 최고 스윙 스타 베니 굿맨(Benny Goodman)에게 흑인 뮤지션들을 소개하며 흑백 혼합밴드를 편성할 것을 권한다. 그의 소개로 베니 굿맨 콘서트에 나오며 유명해진 재즈 아티스트가 찰리 크리스천(기타), 테디 윌슨(피아노), 라이오넬 햄튼(비브라폰)이고, 17세의 할렘 가수 빌리 홀리데이는 그의 권유로 음반을 내며 데뷔하게 된다. 또한 캔자스시티의 라디오에 나온 카운트 베이시 오케스트라의 연주를 듣고 그들을 뉴욕으로 불러들여 전국구 악단으로 성장시키기도 했다.

베니 굿맨과 협연한 빌리 홀리데이의 역사적 첫 음반(1933). 이 뒤에는 두 사람을 연결한 존 하몬드가 있었다

그가 군대에 다녀온 1940년대의 재즈 신은 비밥이 크게 유행하던 시기였다. 비밥을 좋아하지 않았던 그는, 콜럼비아 레코드(Columbia record)에 입사해 다시 ‘스타 제조기’의 명성을 되찾는다. 당시 18세의 가스펠 싱어 아레사 프랭클린(Aretha Franklin)을 발굴하였고, 1961년에는 하모니카와 기타를 치던 무명의 포크 싱어 밥 딜런(Bob Dylan)을 발굴했다. 밥 딜런의 목소리와 음악을 싫어하던 당시 부사장이 그를 ‘하몬드의 대실수’라고 비아냥댔다는 일화도 있다. 사람들에게 잊혀져 가던 델타 블루스 원조 로버트 존슨(Robert Johnson)의 음반을 재발매하여 블루스 기타의 중흥을 이끌었고, 얼마 전 타계한 음유시인 레오나드 코헨(Leonard Cohen), 미국 대중에게 최고의 로커로 널리 인식된 브루스 스프링스틴(Bruce Springsteen)도 그의 안목으로 스타가 된 인물들이다. 존 하몬드는 1975년 프리랜서로 변모한 후에도 꾸준히 활동을 이어가 블루스 기타리스트 스티비 레이 본(Stevie Ray Vaughan)을 발굴하기도 하였다.

밥 딜런 데뷔 당시 존 하몬드와 함께. Via Pinterest
밥 딜런의 첫 앨범 실패 후 계약을 해지하려는 회사를 극구 말렸다는 존 하몬드

그가 발굴한 스타들은 ‘20세기 최고’라는 수식어가 따라 다닌다. 하지만 사람들이 그를 좋아하고 명예의 전당에 그의 이름이 올라가는 건, 그의 ‘스타 제조’ 능력 때문만은 아니다. 부유한 가문의 일원으로 평생을 유복하게 살아갈 수 있었으나, 모든 걸 박차고 자신이 좋아하는 음악에 투신했고, 사회 개혁과 지역사회에의 자선을 원하던 어머니의 유지를 따랐다. 전통적인 레코드 프로듀서의 영역을 벗어나 스타 발굴을 위해 뛰어다닌, 오늘날 탤런트 에이전트의 원조 격이다. 카운트 베이시(Count Basie)는 그를 추모하며, “내가 틀렸을 거야. 존의 아이디어가 그렇다면.”이라는 옛 농담을 상기하면서 그에 대한 무한 신뢰를 보여 주었다.

그를 꼭 닮은 아들 존 P. 하몬드는 블루스 싱어로 활동하고 있다

그의 두번째 부인, 에스메 오브라이언은 그의 음악 열정을 좇아 NBC 방송사와 RCA 회장인 남편과 이혼하고 존 하몬드와 재혼하였다. 그런 아내가 유방암으로 사망하자 존 하몬드는 심한 정신적 충격을 받았고, 이듬해인 1986년 그 자신도 심장마비로 아내의 뒤를 따랐다. 생의 마지막 순간에는 빌리 홀리데이의 음악을 들으며 영원한 안식을 찾았다고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