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킬 빌> 스틸컷

쿠엔틴 타란티노의 2부작 영화 <킬 빌>에는 주인공 ‘키도’(우마 서먼)에게 무술을 전수하는 ‘파이 메이’(유가휘)라는 무림고수가 등장한다. 흰 눈썹과 수염을 휘날리며 혹독하게 제자를 가르치는 그는 중국 무협의 전설로 전해 내려오는 인물 ‘Bak Mei’(白眉, White Eyebrow)를 근거로 만들어진 캐릭터다. 그 전설에 따르면, 청왕조가 소림사를 반청 집단으로 규정하고 1723년 기습하여 불태울 당시 승려 128명 중 110명을 살해하였는데 5명의 고승이 살아남아 남쪽으로 탈출하였다고 한다. 소림오조라 불리게 된 그들은 오늘날까지 전해진 남방 무술의 원조 격인데, 그중 한 명이 파이 메이다. 일설에 의하면, 그는 청왕조에 협력한 반역자로 두 명의 고수에게 협공당해 살해되었다고 전해진다.

영화 <킬 빌> 2부에 등장하는 파이 메이

전설적인 무림고수 파이 메이가 영화에 등장한 것은 홍콩 무림영화의 중흥기였던 1970년대부터다. 파이 메이는 백련교의 교주인 악역으로 주로 등장하여 흰 눈썹과 수염을 휘날리며 가공할 무공을 선보이다 전설로 전해지는 대로 결국 두 명의 주인공에게 심판을 받는다. 당시 홍콩 영화에 등장한 파이 메이의 신묘한 권법은 <킬 빌>에서 그대로 차용된다. 그중 하나가 <킬 빌> 2부의 오지심장파열권(Five Point Palm Exploding Palm Technique)으로, 파이 메이에게 전수받은 ‘키도’가 이를 이용하여 ‘빌’(데이빗 캐러딘)에게 복수한다는 설정이다. 다섯 혈을 막고 심장을 치면 다섯 걸음 만에 심장이 터져서 죽는다는 것이다.

<킬 빌>에서 ‘파이 메이’ 역을 맡은 배우 유가휘가 비슷한 모습으로 출연한 영화 <홍문정삼파백련교>(Clan of the White Lotus, 1980)에 등장하는 심장파열권 장면

한편, 영화의 소재로 종종 등장해온 파이 메이에 관한 이야기는 구전으로 전해지는 전설일 뿐 역사적인 사실이라는 증거는 별로 없다. 청왕조가 소림사를 불태웠다는 얘기도 역사상의 정설은 아니며, 소림오조에 관한 이야기나 파이 메이의 백련교가 오늘날 삼합회의 전신이라는 설, 그리고 중국과 북미 지역에 성업 중인 백미관(白眉館) 무술도 사실에 근거를 둔 것 같지는 않다.

파이 메이의 얼굴로 자주 인용되는 초상화

2012년 미국의 중국 연구학자들이 파이 메이의 실존 가능성 여부에 대해 조사한 결과, 삼국지와 같이 구전되는 전설을 당시 무협소설 작가의 상상력으로 가공한 것이며 역사적 근거는 불충분하다는 결론이었다.

시판 중인 파이 메이 캐릭터의 토이 피규어

쿠엔틴 타란티노 감독이 우마 서먼과 함께 <킬 빌> 후속편을 다각도로 기획 중이라는 보도가 심심찮게 나오고 있다. <킬 빌> 2부에서 살아남은 키도와 그 딸이 주인공이 될 가능성이 있고, 빌과 파이 메이를 대체할 만한 무협고수 캐릭터가 새롭게 등장할 것이라 기대해도 될 듯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