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독 엔딩 장면의 음악이나 엔딩 크레딧의 음악으로 기억되는 영화가 있다. 영화는 시청각을 동시에 활용하는 매체이지만, 보다 추상적이고 극단적인 표현의 변화가 가능한 것이 청각이며 시각적 잔상보다 청각적 잔향이 기억에 머무르는 시간이 더 길기 때문이다. 단지 영화의 끝을 장식하고도 영화 전체에 대한 기억을 대신한 음악들 가운데, 두 번째로 2000년대 영화들을 추억해본다.

 

빛에 대한 향수

<아이 엠 샘> 스틸컷

두 차례의 세계대전을 겪은 격동의 세기를 지나 이제 막 신세기의 환상을 마주한 2000년대에는 지난 세기의 문화적 향수를 소환하는 영화들이 많았다. 20세기를 지배한 대중음악에 대한 회고가 대표적인 것이었다. 아예 비틀스의 트랙으로만 영화를 가득 채운 <아이 엠 샘>(2001), <어크로스 더 유니버스>(2007)의 경우 엔딩곡으로 ‘Two of Us’와 ‘Love Is All You Need’라는 인상적인 리메이크 트랙을 남겼다. 에디트 피아프의 삶을 그린 <라 비 앙 로즈>(2007) 속 ‘Non, Je ne regrette rien’이나 밥 딜런을 다층적으로 묘사한 <아임 낫 데어>(2007)의 ‘Like A Rolling Stone’도 기억에 남는다.

<라 비 앙 로즈> 예고편. 극 중 마리옹 꼬띠아르가 ‘Non, je ne regrette rien’을 부르는 장면은 실제 에디트 피아프의 무대와 완벽하게 비슷하다
에디트 피아프(Edith Piaf) ‘Non, je ne regrette rien’

그러나 왠지 이 모두를 종합하는 듯한 한 편의 영화가 있다면 바로 <사랑도 리콜이 되나요>(2000)이다. 허름한 레코드 가게 주인이자 팝 음악 마니아인 주인공 로브가 어느 날 여자친구에게 차이면서 자신의 인생을 돌아본다는 평범한 로맨스 이야기 속에는 대단한 음악 애호가로 알려진 영화의 원작 소설(<하이 피델리티>) 작가 닉 혼비가 곳곳마다 채워 넣은 20세기 팝 음악들이 쉬지 않고 새어 나온다. 그리고 이 영화의 마지막 페이지 엔딩 크레딧에는 스티비 원더의 'I Believe'가 아름답게 흘러나와 누가 동시대의 ‘끝판왕’인지를 강조하는 것만 같다.

<사랑도 리콜이 되나요>의 포스터(좌)는 비틀스의 1964년 앨범 <A Hard Day's Night>(우)의 커버를 연상시킨다

 

어둠에 대한 환멸

<릴리 슈슈의 모든 것> 스틸컷

당대 사회의 각종 어두운 이면에 대한 환멸을 제각각의 미학으로 그려낸 작품들도 있었다. 미결 연쇄살인사건을 다룬 영화 <살인의 추억>(2003) 속 강렬한 여운을 주는 엔딩 신에는 영화 동명의 엔딩 타이틀곡인 ‘Memoires of Murder’가 이어지고, <어둠 속의 댄서>(2000) 엔딩에서는 장면에 이율배반적인 가사의 ‘Next To Last Song’이 더해져 영화에 비극성을 더한다. 가난과 가정폭력 같은 어두운 소재로 점철된 자전적인 이야기에 에미넴 본인이 직접 배우로 참여여 화제가 된 <8 마일>(2002)의 엔딩곡 ‘Lose Yourself’는 2000년대 가장 유명한 엔딩곡 중 하나일 것이다.

에미넴 'Lose Yourself'(한글자막)

이와이 슌지의 <릴리 슈슈의 모든 것>(2001)은 최근 ‘부산 여중생 폭행 사건’으로 국내에서도 큰 이슈가 된 학원폭력 문제를, 가상의 가수를 등장시킨 10대의 팬 문화와 결부시켜 독특한 감각으로 완성한 영화다. 영화 속 가상의 가수 릴리 슈슈의 대표곡이자 영화의 메인 테마, 엔딩 타이틀이기도 한 ‘Glide’는 비록 유명하지 않지만, 이 영화를 한 번이라도 본 이에게 쉽게 잊히지 않을 메아리 중 하나다.

릴리 슈슈(Lily Chou Chou) ‘Glide’

 

세기를 넘어선 환상

<판의 미로> 스틸컷

아직 구체적으로 체화되지 않은 신세기의 구상 대신 시대와 무관한 환상으로 역사적인 시청각을 남겨낸 영화들도 이 시기에 몰려 있다. 의심하는 이에게는 잔혹한 현실, 믿는 이에게는 기괴하지만 아름다운 동화가 되었을 <판의 미로>(2006)에서는 엔딩 타이틀 ‘A Tale & Long Long Time Ago’가 주인공 오필리아의 마지막 여정을 보조한다. 치히로의 신비롭고 고생스런 여정을 아름답고 소박하게 마무리해주는 <센과 치히로의 행방불명>(2001)의 ‘Always With Me’이나 칼과 러셀의 환상적인 모험을 매듭짓는 재즈 스코어 ‘Up With End Credits’도 소중한 엔딩이다.

<센과 치히로의 행방불명> 예고편

물론 모든 환상이 다 아름답고 훈훈하지만은 않다. 잭 스나이더가 감독한 <새벽의 저주>(2004)는 대니 보일의 <28일 후>(2002)와 함께 21세기 좀비물을 성공적으로 부활시키며 피 튀기는 환상을 완성한다. 특히나 헤비메탈 밴드 디스터브드는 <새벽의 저주> 엔딩 크레딧까지 이어지는 주인공 일행의 여정에 박력 넘치는 길동무가 되어준다.

디스터브드(Disturbed) ‘Down With The Sickness’. <새벽의 저주> 엔딩 크레딧에서 마치 괴성처럼 터져 나오는 이 곡은 영화 중반에서는 평화로운 멜로디 버전으로 흘러나오니 비교해보자

 

Writer

차분한 즐거움을 좇는다. 그래서 보고 들은 것과 일상에 대한 좋은 생각, 좋아하는 마음을 글로 옮긴다. 학부 시절 네이버 파워블로그에 선정된 후 쓰기를 이어와 현재 한국대중음악상 선정위원으로 활동 중이다. 웹진 <음악취향Y>, 잡지 <재즈피플>, 신문 <아주경제> 등에 글을 기고한다. 누구나 늘 즐겁기를 바란다. 너무 들뜨지 않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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